예수 강림!
살전 3:9-13, 대림절 첫째 주일, 2018년 12월2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11.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대림절 신앙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가 어필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여럿입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예수 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재림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의 구성요소입니다. 사도신경 후반부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나옵니다.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예수 승천을 다루고 있는 행 1장에도 예수 재림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전 16:22절과 계 22:20에 나오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표현도 재림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2 독서의 한 구절인 살전 3:13절에도 예수 재림이 나옵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가 언젠가 미래에 다시 온다는 주장은 아무리 신앙적으로 돈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예수 재림을 기다렸지만 아직도 예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반론 역시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예수 재림(강림)을 시종일관 주장했습니다. 교회력의 시작이 대림절이라는 것도 기독교가 예수 강림을 신앙의 초석으로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우선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강림(재림) 교리를 신화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젊은 유대인의 모습 그대로 예수가 때가 되어 구름을 타고 공중 부양하듯이 지구를 찾아오는 그림은 그야말로 신화입니다. 이런 신화는 천동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의 사람들이나 솔깃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주에는 재림할 예수가 임시로 머물 곳이 없습니다. 우주에는 빅뱅 순간에 만들어진 암흑 에너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주 어딘가에 지구와 비슷한 생태 조건이 갖추어진 행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 생명체가 그곳으로 갈 수 없고, 그곳의 생명체가 이곳으로 올 수도 없습니다.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비행선을 타고 힘들게 오갈 수는 있겠지만 예수 강림 이야기는 그런 과학적인 방법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 재림을 비록 신화적인 형식으로 말했지만 신화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강림 이야기는 말하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달은 곧 예수를 통한 생명 완성, 즉 구원입니다. 따라서 예수 강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예수를 통한 생명 완성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왜 절대적인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예수 강림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생명이, 또는 생명 완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예수 공생애 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관심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요 3:1절 이하에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막 10:17절 이하에 어떤 부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예수 제자들의 궁극적인 관심도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생명이지 다른 게 뭐 있냐고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여러분들은 경험적으로 잘 알 겁니다. 착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으나 그것도 잘 안 됩니다. 부자가 되고 건강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국가 경영이라는 차원으로 들어가면 더 어렵습니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납니다. 기업을 살리는 게 우선인가요, 노동자들을 살리는 게 우선인가요? 부자 나라가 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합니다. 재미있는 일을 찾아보지만 그것도 잠시이지, 다시 우리는 깊은 공허의 심연으로 떨어집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나 우리 모두 평생 목마른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먹고 살 만큼 재산이 있는데도 계속해서 재산을 축적하려는 이유가,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와 생명 완성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말은 곧 예수에게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구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을 그들은 알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확신을 하게 되었을까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병자와 장애인을 고치고, 때로는 죽은 자를 살렸다는 것을 근거로 생각합니다. 예수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런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구약성경이 그런 기적과 표적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내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과 표적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증거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성경시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현대인들도 끊임없이 기적과 표적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찾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크게 부흥시킬 기업가와 정치인을 찾습니다. 대한민국이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의 경제적인 불이익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만약 대통령이나 총리가 나서서, 또는 정당 대표가 나서서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조금 낮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라가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가정 경영도 이와 비슷합니다. 수입이 늘기도 하지만 줄기도 합니다. 거기에 맞춰서 살림살이 계획을 짜면 됩니다. 수입이 줄었다고 해서 부부가 매일 싸우고, 가족 간에 서로 잔소리를 하면 더 이상 가족이 아닙니다. 수입이 줄어도 가족애가 더 돈독해지는 가족이 있고, 수입이 늘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후자의 가족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불평이 많고, 대통령 탓도 많이 합니다. 제가 어른이 된 이후 지금까지 경제가 좋았다는 말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늘 나빴는데도 지금 우리는 가난한 나라에 비해서 잘 먹고 잘 삽니다. 어디까지 잘 살아야 이런 불평을 하지 않게 될까요? 세상살이가 척박하고 살벌하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이미’ 왔다면 구원이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그걸 알고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그쪽으로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그게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게 어디 하나님뿐인가요? 정작 중요한 것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다수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자리하고 삽니다. 이미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 더 기승을 부리는 듯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구를, 또는 어떤 것을 사랑하고 사랑받아 본 적이 있는 분들은 알 겁니다. 그 사랑만이 절대적이기에 그 이외의 것들은 사소해지고, 사소해진 것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눅 15:11 이하)에 두 아들이 나옵니다. 작은 아들은 그야말로 탕자처럼 살았고, 큰 아들은 모범생으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큰 아들은 그게 불만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거칠게 살지는 않을 겁니다. 인생살이가 외롭다고 몸부림치지 않을 것이며, 먹을 게 부족하다고 아우성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걸 배 아파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지만 어떤 사람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악의 나라로 경험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나이브하고 너무 혁명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랑에 의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손상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인류 역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아직은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건 자신의 책임입니다. 존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과 운명에 자신을 계시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그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다른 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자신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생명을 얻는다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해서 제자들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가 우리를 생명으로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제자들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
예수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기독교의 주장에 다음과 같은 비판이 세상으로부터 강력하게 제기되었습니다. 예수 이후로도 세상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예수를 통한 생명 완성이라는 주장이 어떻게 성립되느냐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지금도 이런 비판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여전히 생명 완성이 아니라 생명 파괴가 더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 제기가 합리적이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생명 이해가 깊지 않은 데서 나오는 비판입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1)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개인과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완성되었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 이유로 인해서 그걸 아는 사람도 있고,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건 단순히 선교사를 파송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종말입니다. 종말까지는 여전히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은 은폐의 방식으로 비밀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종말이 되면 모든 것이 얼굴로 맞대고 알 수 있듯이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종말에 완성될 생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재림 신앙입니다.
2) 예수 강림 교리가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구원이 완성되었기에 개인과 인류의 미래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운명과 연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치하신다는 경험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것 이외의 것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생명 완성을 경험했고, 또한 그것을 약속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지금 이미 생명이 완성되었기에 지상에서의 삶이 완전히 파괴되는 죽음마저도 생명 완성의 한 순간입니다. 따라서 개인에게는 자신의 죽음이 곧 예수 강림입니다.
3) 예수 강림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적인 관점이 하나 필요합니다. 그것은 현재와 종말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2018년 12월2일에 대림절 첫째 주일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동떨어진 시간이 아니라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죽음의 순간이 이미 현재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교회에서 수요일마다 이사야를 공부합니다. 그럴 때마다 시간의 신비를 절감합니다. 2천5백 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사야와 그걸 공부하는 우리 사이의 시간은 긴 것 같지만 순간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2천5백년이라는 시간도 순간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5천 년 역시 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한평생도 한순간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더 절감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인생이 뭔지를 알만하면 ‘이제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듭니다. 아직 죽지 않았으나 이미 삶이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게 아니라 시간이 신비롭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믿음 안에서 현재와 종말을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현재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완성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휩싸여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실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본문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1) 당신들은 서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2) 마음을 굳게 하기를 바랍니다. 3)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완성에 가까이 가라는 뜻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을 선포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의 강요와 회유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가리킵니다. 종교와 정치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는 세력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거꾸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명의 현실(reality)로 경험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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