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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골 1:12-23)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가요? 이런 질문은 무의미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실제로 아는지 물으면 대답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해야 한 두 마디면 끝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몰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종교 소비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트에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오는 것으로 만족하듯이 교회에 가서 종교적 기호에 맞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이런 종교 소비자들에게는 예수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비심리만 충족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일반 종교에서는 이런 것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불교는 각자의 마음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라고 말합니다. 불교신자들에게는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싯다르타는 먼저 깨달은 인물일 뿐이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하고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에 집중하는 불교의 예불과는 달리 기독교의 예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입니다.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그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보다 더, 아니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약성서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대한 해명이며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골로새서에는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 송가(15-20절)가 나옵니다. 일종의 찬송가입니다. 1연인 15-17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관해서 노래하고, 2연인 18-20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즉 화해되었다는 사실에 관해서 노래합니다. 더 줄이면 그리스도 송가는 하나님의 형상과 만물의 화해를 주제로 합니다. 이 양자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자리합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우주론적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만 정확하게 알아도 우리는 신약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해서 무엇을 말하려는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15-17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찬송가라고 생각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그리스도 송가는 ‘그’가 누군지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서 만물의 근원입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모두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의 핵심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를 ‘에이콘 투 데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이콘이라는 헬라어는 요즘 흔하게 사용하는 ‘아이콘’의 어원입니다. 헬라어 사전은 에이콘을 likeness, image, form, appearance, statue라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런 단어들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각각의 단어를 이 시간에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그중에서 form이라는 한 가지만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특징 개념인 ‘형상과 질료’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이 있을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은 형상과 질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여기 ‘공간울림’이라는 건물이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 사용된 돌, 나무 등은 질료(matter)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건물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형상(form)이라고 합니다. 질료는 헬라어로 ‘휠레’라 하고, 형상은 ‘에이도스’라고 합니다. 에이도스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기도 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 ‘에이콘’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이런 설명을 전제하고 15-17절을 다시 읽어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고백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만물보다 먼저 있었고, 만물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에이도스, 폼, 에이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하고 명백해서 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예, 신앙이 철학은 아닙니다. 그러나 철학 없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변증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철학에 대한 오해가 자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비실용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요즘 노숙자들과 교도소 피수감자들도 철학을, 즉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삶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하는 학문입니다. 신학이 기독교 영성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시 오늘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도 이것을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실적인 것을,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참된 것을 알아야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실적인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이도스라고,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장자와 노자는 도(道)라고, 하이덱거는 존재라고, 화이트헤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보이지 않지만 참된 현실인 하나님의 에이콘(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에이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골로새서 기자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송가’는 찬송이며, 시이며,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중간에 함께 암송한 ‘사도신경’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에 대한 명제를 나열할 뿐이지 논리적인 설명을 부연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그리스도 송가를 부른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예컨대 부부로 사는 사람이 함께 부부의 사랑에 대한 노래를 부르면 되지, 왜 부부가 되었는지를 매번 마다 논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도 좀 곤란합니다. 그럴 때는 질문해야 하고, 답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 묻는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답입니다. 본문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18절)라고 이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을 다시 생명체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단순히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확인하고 보도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유일회적인 것입니다. 반복될 수 없었습니다. 종말에 나타날 궁극적인 생명이 예수님에게 선취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설명할 방법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경험을 그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언어가 나에게 말을 건다.”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객관적인 증명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한 사람의 경험이 확실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약성서의 부활에 대한 진술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진술에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진술이 진리라는 사실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증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명령에 합당한 태도입니다.

 

    만물과의 화목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송영’의 두 번째 연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런 말씀은 우리가 흔하게 들었습니다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을 향해 왜 자기를 버리느냐고 외쳤습니다. 당시에 아무도 십자가의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리고 무슨 근거로 예수의 십자가가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킨다고 믿었을까요?

     19절이 이 대답을 찾아가는 출발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충분하게 거하셨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웠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이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깨닫게 된 데에는 구약의 속죄 개념이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간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장은 양이나 소를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속죄를 위한 제사가 반복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이런 반복된 속죄제사를 끝장내는 구원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이제 모든 사람들은, 더 나가서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용서 사건이 곧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근본적으로 죽음의 극복을 뜻합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나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죽지 않을 수 없듯이 우리가 그 어떤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즉 유대교의 희생제사를 아무리 거룩하게 바쳐도 그것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으로는 사람이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과의 일치가 깨져서 죽음의 운명에 떨어진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증거는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인 부활의 세계에 처음으로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의 십자가는 죄의 형벌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초기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그리스도 송가’가 말하는 핵심이며, 동시에 신약성서 전체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요? 정보로 아는 것과 크게 깨우침으로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만물과의 화해라는 사실이 우리 삶의 능력으로 자리하고 있나요? 먼 나라가 이야기로 떨어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만물과의 화해는 단지 기독교의 교리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지금 당장 잘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속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과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킨다는 사실은 공허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참된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극복했으며, 그를 통해서 우리도 이미 죽음 너머의 새로운 생명인 부활에 참여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 삶의 굳은 토대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세상과 삶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송가를 인용한 후에 ‘복음의 소망에서’(골 1:23) 흔들리지 말라고 강권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삶의 능력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멘.(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 7월18일)

골로새서 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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