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딤후 2:8-15), 10월10일, 성령강림절 후 20째 주일
디모데서는 믿음의 스승인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혈연관계도 아니고 직장의 동료 관계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혈연관계가 가장 가깝다고 말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가족의 혈연이 아니라 진리라는 점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야말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데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사제 관계만이 아니라 도반 관계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도반이었습니다. 도반이며 스승인 바울은 자신의 길을 가야할 뿐 아니라 디모데의 길을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를 바울은 디모데에게 간곡하며 단호한 어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
딤후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는 싸우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싸움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출현 자체가 투쟁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도 싸움이 많았습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싸움꾼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투쟁적인 모습이 없었다면 복음 공동체가 아니라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싸움이 아니라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평화 공동체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이 거짓된 평화를 요구할 때 일어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평화’와 투쟁했습니다. 로마의 정치, 경제, 외교 체제를 절대화하는 개념이 ‘로마의 평화’였습니다. 로마 식민 지배 밑에 놓은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동의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것 자체가 투쟁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시대정신에 고분고분한 종교인이나 랍비 정도로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그는 인간 실존의 허무를 깊이 각성하고 자기 내부의 불성을 발견하라고 가르친 부처와 달랐습니다. 부처는 내면세계를 철학적으로 접근했지만 예수님은 외부세계와 충돌했습니다. 공자의 도덕적 가르침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이 천수를 다 한 부처나 공자와 달리 30대 초반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이런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지 세상과의 투쟁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종의 마술이나 주술과 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악령 영화에서 보듯이 십자가 모형을 들면 악령이 도망치는 것과 같은 사건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싸움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 싸웠다는 사실은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 좀더 타협적으로 나왔어도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진리를 향한 싸움은 사람들에게 귀찮게 받아들여집니다. 개혁이 힘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가부장제에 찌든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 지지 받기 힘듭니다. 체벌이 당연시되는 교육계에서 체벌 없는 교육을 주장하면 지지 받기 힘듭니다. 레드콤플렉스가 교리로 굳어진 사회에서 공산주의자와의 대화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아도 일반적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매사에 트집 잡기 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평불만에 빠져 있는 삶과 진리에 속한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불평불만은 자기에게 민감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정을 받기만 하면 잘못된 일도 얼마든지 받아들입니다.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예민한 게 아니라 옳은 것을 꾸준히 추구합니다. 그야말로 진리 논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옳지 않은 질서에서 어려움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 산다는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진리라는 말도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진리에 속해서, 진리를 위해 투쟁하면서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우리 자신의 일상을 지켜내기도 벅찹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렵습니다. 내 코가 석자인 형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존이 일단 급선무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는, 힘든 병을 치료하고 있는 형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가 감당해야 할 진리 투쟁은 요원합니다. 저는 지금 그런 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이 늘 그렇게 급박한 것도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웰 푸드’를 찾느라 여유가 없습니다. 생존이 문제가 아니라 ‘웰 빙’이 문제입니다. 더 많은 것에, 더 고급스러운 것에 마음이 빼앗겨 병사의 투쟁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외면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치 안방에서 주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던 애견이 주인과 함께 야생에 나갔을 때 주인을 위해서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길들여진 애견과 같다고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KTX의 ‘통도사’라는 역명을 반대하는 일에는, 팔공산 불교 테마 공원 조성을 반대하는 일에는 온갖 에너지글 불태우면서 남북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일과 빈부격차 해소와 생태를 지키는 일에는 미온적입니다. 사랑을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병사의 싸움도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마마보이처럼 자기 연민에 휩싸인 사람은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잠시 싸우는 시늉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병사의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걸 감당할만한 영적 동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사회투쟁에 앞장 서야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가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깊숙이 참여할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겠지요. 저는 지금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관심과 태도를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비록 사회투쟁에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사건에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그런 부분에는 둔감한 채 자기 외모에만 민감한 사춘기의 소녀들처럼 자기교회를 키우는 것이나 개인적으로 축복받는 일에만 열을 내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병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우리에게 그런 영적 동력이 있을까요? 아니라면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삶에 지쳐서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든지, 또는 기독교 신앙을 착각하고 있든지 말입니다.
기억의 해석학
제가 이렇게 말은 쉽게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늘 예민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병사들도 늘 전쟁에 대해서 예민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병사들은 훈련을 철저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영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무뎌졌던 영혼이 각성되는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훈련은 ‘기억’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b) 이어서 딤후 2:14절에서 바울은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라고 이릅니다. 당시 그 교회에 말다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말다툼을 하지 말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 영성의 근본이기도 하고, 목회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의 병사로 살아갈 수 있는 영적 동력이 살아납니다.
‘기억’을 시시하게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좀더 화끈한 것, 말하자면 ‘40일 특새’처럼 뭔가 화끈한 것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기억입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는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계속 기억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때마다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시편이 역사에 남은 것도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덕분입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했고, 그 기억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냈습니다. 지금 우리의 예배도 기본은 기억입니다. 2천년 동안 똑같은 성경을 읽고,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의 근본을 기억했습니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기억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성서 신앙은 기억의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차원에서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권했습니다.
여러 동물 중에서 인간의 기억력이 가장 좋습니다. 몸의 크기에 비해서 뇌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뇌출혈 등으로 뇌의 일정한 부분이 손상당하면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치매에 걸리면 오래된 것에 대한 기억력은 남아도 최근의 것에 대한 기억력은 형편없이 떨어집니다. 건강한 사람도 건망증이라는 것으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뇌가 기계적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것 같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뇌가 취사선택을 합니다. 똑같이 당한 사건이라고 해도 기억에 남는 것도 있고, 사라지는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의지와 신앙적인 태도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평소에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서 기억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 살기 위해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하고, 기억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디모데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만 선한 싸움의 영적 동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른 것을 비유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인류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삶의 용기와 지혜가 생깁니다. 개인들이 어머니 자궁에서 생명으로 자랄 때를 기억하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본질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에 우리의 영적인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목회 현장을 다시 돌아봅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앞서 짚은 대로 디모데가 목회하던 교회에서는 말다툼이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말다툼은 해결되기가 어렵습니다. 나중에는 서로 말꼬리를 물게 되고 감정이 개입됩니다. 그런 정도까지 말다툼이 확장되면 신앙의 본질까지 훼손됩니다. 이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현상들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근원적인 것에 영혼을 담지 않으면 교회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개인의 삶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내부에는 끊임없는 말다툼이 일어납니다. 자기와 또 다른 자기가 다툽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속상하고 불만스럽습니다. ‘행복을 파는 전도사’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런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디모데가 이 사실을 몰라서 바울이 말한 게 아닙니다. 알고 있어도 실제 삶에서는 시간이 가면서 느슨하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일수록, 열심히 목회하는 사람일수록 이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경향이 높습니다. 삶과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투쟁적인 삶을, 즉 영적 긴장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생각되나요? 그렇다면,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것만이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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