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몸’
(히 10:5-10)
종교의 형식화와 교권화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선택해서 읽은 히브리서는 구약 사상을 기초로 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변증합니다.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 전통을 해명하는 책입니다. 그들의 역사와 종교 전통은 깊이가 있으면서 오묘하고, 오늘 우리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내용들도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종교의식입니다. 종교의식은 일종의 종교적 상징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입니다. 로마가톨릭의 미사나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도 우리 개신교도들의 예배와 같은 기독교 전통이지만 우리 눈에는 낯설어 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의식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예컨대 그들에게는 번제라는 종교의식이 있습니다. 짐승이나 새를 태우는 방식으로 행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우리가 고기를 구워먹는 식당에 들어갔을 때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광경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광경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요즘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사제들이 연기 나는 용기를 사용하는 것이나 불교의 예불에서 향을 피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기와 냄새는 고대시대부터 신과의 일치를 이루는데 중요한 종교적 상징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전통이 세워지게 된 이유는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살을 불에 태워서 하나님께 드릴 때 죄가 용서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교의식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사이고, 다른 하나는 제물입니다. 제사는 요즘 우리의 경우로 바꾸면 예배이고, 제물은 헌금입니다. 이 둘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최고의 예를 갖추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따르고, 제물을 통해서 제사가 가능해집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제사 전통은 뿌리가 깊습니다. 제사상에 산해진미를 다 올립니다. 문명이 시작된 이후로 인류 역사에서 이런 방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은 종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근본에서는 일치합니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어리석은 탓이었고, 지금처럼 첨단의 문명 세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틀린 생각입니다. 실제로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나름으로 제사행위에 빠져듭니다. 저금통장이나 주식증서를 바라보는 것이나, 티브이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일종의 종교의식입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국회의사당이 오늘의 예루살렘 성전이고, 증권회사의 증권 현황판이 제단일지 모릅니다. 거기서 구원이 임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듭니다. 좀더 극단적으로 보면 우리 자녀들을 오늘의 무한 경쟁의 교육체제라는 성전에 번제물로 바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세속적인 현대인들도 역시 제사와 제물을 어딘가에 바치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거기서 행해지는 종교의식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무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실제로 임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바침으로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종교 전통은 소중하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종교적 전통의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두 가지로 훼손되었습니다. 하나는 형식화이고 다른 하나는 교권화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제사장 제도가 일종의 종교권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번제로 드릴 짐승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던 짐승을 갖고 오지 못하고 성전에 와서 그런 짐승을 사야했습니다. 성지순례가 제도화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살던 사람은 제사장이 허락하는 돈으로만 성전세를 내야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성전에는 환전상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아주 복잡해졌습니다. 헌금의 종류도 너무 많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종교교육 프로그램도 너무 많습니다. 물론 모두 좋은 뜻으로 시작된 것이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단지 형식과 교권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
초기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제사 행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사행위에서 핵심은 제물이었습니다. 소와 양의 피를 뿌리고 살을 태우는 행위였습니다. 그런 번제행위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죄가 용서된다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전통입니다. 이와 달리 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진정한 제사이며, 그것이 진정한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거기서 피를 흘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제 더 이상 소와 양을 통한 제사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히 10:10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제 초기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가 행하던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그가 인용한 시편은 40:6절 이하입니다. 6절은 이렇습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은 기원전 5,6세기의 신앙 문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는 5백년 정도 시간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5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시편의 이 구절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선재적(先在的) 그리스도론입니다. 약간 까다로운 신학개념인데, 이 개념을 통해서만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님이 이미 태초에 존재했다는 말이 가능한가요? 이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세상을 평면적으로만 보는 미숙한 생각입니다. 시간이 단순히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갈 뿐이라는 단선적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과거에서 미래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분입니다. 그에게는 태초가 종말이고 종말이 태초입니다. 그 종말의 미래가 오히려 지금 우리를 끌어가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서 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동질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호모 우시오스’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한 게 우연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하는 시편은 일반적인 유대교의 전통과 어긋나 있습니다. 유대교는 제사와 제물을 절대화합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가 없으면 민족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 40:6절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시편 40편 기자만 한 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예언자들이 선포했습니다. 한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아모스 5:22절입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제사의 형식보다는 제사에 임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전통은 뿌리가 깊습니다. 사사와 초기 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제사 형식보다 본질을 올곧게 세우는 게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지지만 큰 울림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와 신앙의 본질에 천착해야 한다는 주장은 큰 힘을 얻지 못합니다. 대신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서나 큰 힘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교회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책임도 똑같습니다. 서울에 있는 ‘사랑의교회’가 2천1백억 원을 들여서 교회당을 건축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예배당이 불어나는 신자들을 감당할 수 없으며, 앞으로 큰일을 하기 위해서 큰 교회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늘 대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교회가 최소한 자립하고 선교를 감당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크기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무한정 소유를 늘려야 한다는 천민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교회에도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제사와 예물을 절대화하는 세력이 늘 주류로 자리한 것과 똑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소수의 목소리였던 시편 40:6절을 인용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변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히 10:9)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히 10: 10) 이제 더 이상 소와 양은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 제사를 반복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모든 제사와 예물이 ‘단번에’ 성취되었습니다.
소와 양 같은 제물이 필요 없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예배와 헌금이 필요 없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이지 행위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게 아닙니다. 제물이 없으면 예루살렘 성전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종교업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는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오늘도 역시 헌금이 없으면 교회 유지와 복음 선포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와 예물은 그것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였지만, 지금 우리의 예배와 헌금은 이미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감사의 의미입니다. 전자는 사죄의 조건이고 후자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고 헌금을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거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종교적 제사행위는 이미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예배는 그 사건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거룩함을 입은 자들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죄를, 구원을, 즉 거룩함을 얻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한 인물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 보편적인 구원의 토대가 된다는 말인가요? 그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해보라고 하면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 증명해보라는 주장과 똑같습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증명이 가능한 존재라고 한다면 그런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실증적인 논리들은 모두 궁극적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님들의 사랑도 애틋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지만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한 구원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성서의 증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서에 근거해서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그 내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몸은 헬라어 ‘소마’의 번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 달린 바로 그분의 몸을 가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합니다. 그의 운명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저주받아 죽은 그 몸입니다. 그 몸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몸만이 유일하게 참된 제사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만이 부활의 몸을 입으신 분입니다. 그에게만 인류 역사에서, 더 나아가 우주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부활생명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과 구약성서를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지금 예배를 통해서 이 구원의 신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미심쩍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더 이상 설득력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조언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영혼의 귀를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 일어난 사건 말고 여러분의 미래를 맡길만한 대상이 있다면 그쪽으로 마음을 돌리셔도 됩니다. 저는 그런 대상이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만이 현재와 미래에 이르는 제 삶과 운명의 근원입니다. 그 약속만이 저를 허무한 이 삶에서 지탱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근원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진솔하게 질문해 봅시다. 이 대림절과 성탄절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며, 대림절과 성탄절이 이런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몸을, 즉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영원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는, 아니 그만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분입니다. 그의 몸을 통해서, 그의 운명을 통해서, 그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대림절 넷째 주일, 2009.12.20.)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