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성령강림(Pentecost)주일입니다. 오래전 어떤 교단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우물주물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면서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하늘나라의 말 곧 방언이라고 강조했던 교단이 있기도 했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기에 교회의 직분을 받을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기도실이나 아니면 기도원에 방언학교를 설립하여 성경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말들을 노트에 적어서 그것을 빠르게 읽게 한다거나 또는 더욱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서 할렐루야를 100번씩 빠르게 반복하게 함으로써 나중에 혀가 꼬부라져서 소리가 애매모호하게 들리면 그것이 곧 방언이라고까지 한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70-80년대의 한국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성령이란 거룩한 영이란 말로써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영을 일컫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성령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자신을 열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spirit)이 곧 성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성령이란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란 말인데“ 파라”(옆에서 혹은 곁에서)+“칼레오”(말한다)란 말의 합성어로써 성령이란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열매 맺게 하시며 승리하게 해주는 분이 곧 성령이란 말입니다. 성령을 영어로 Holy Spirit, God's spirit, Jesus' spirit 이라고도 하지만 위로자란 뜻으로 comforter란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라틴말 Com(함께)+Forte(강하다)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면서 강하게 해주시며(Comforter) 우리를 지원하며 후원 해주시는 (Sustainer) 하나님의 손길이며,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Helper)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성령을 신학적으로 본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성령이 우리 속에 거주하여서 항상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며, 일하게 하며 봉사하게 하며 감사하게 하며 위로를 주시면서 끝끝내는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신앙하는 믿음이 있어 무언가 신앙의 일을 하는것 같다가 얼마 후에 그 신앙마저도 사라져 버려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의 경우를 보면, 처음부터 예수를 생명의 주, 구원의 주로 확실하게 신앙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값싼 성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시고, 우리를 후원해 주시며 우리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영-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우리 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그러한 싸구려 성령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I
그러면 성서에서는 성령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적어도 성서는 성령에 대해서 3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각각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볼 수 있는는 성령의 모습은 사도행전 2:3절에 나타나는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부활절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에 대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불같은 성령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 후 50일이 지난 어느 날, 어떻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까 걱정하며 염려하는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 나타난, 불의 혀같은 뜨거운 성령이 임하여, 그들 모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불의 혀”같이 갈라져 임하는 성령 곧 성령이 각 사람에게 강하게 임하였으나 꼭 같은 한 성령이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다양한 은혜와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성령의 열매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불”을 하나님의 보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심판 등등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불같은 성령이란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고 있으며 강력한 하나님의 요구를 뜻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들 모두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신앙이 충만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모두들 과거의 옛 모습, 자신 속에 있는 육체의 일 곧 더러운 생각, 육체의 쾌락을 찾는 마음, 우상숭배, 헐뜯음과 싸움, 질투와 분노, 언제나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 불평과 무조건 비판적인 태도, 자기의 작은 당파 외에는 모두 나쁜 것으로 인정하는 배타주의, 시기,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방탕함-과 같은 모든 옛 모습들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를 보고 불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 성령세례란 것은 단 한번 있는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반복적인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첫째,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사로잡혀서 꿈과 비젼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둘째, 그 꿈과 비젼을 실현시켜 나가고자 하는 뜨거운 신앙의 열정이 있는 것이며;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spirit)을 가지고서 온전히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삶을 성령충만한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신앙의 비젼과 열정이 넘쳐나고 있는 사람,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헌신의 생활이 넘쳐나는 사람, 나아가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생활을 통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과 감화를 주면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이어야 비로소 불같은 뜨거운 성령이 충만한 신앙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두 번째의 모습은 비둘기같은 성령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3:13-17절과 마가복음 1:9-11절과 누가복음 3:21-22절에 의하면 비둘기 같은 성령이란 말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 물속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바로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면서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187장 1절에도 “비둘기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 오셔서, 거친맘 어루만지사 위로와 평화 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비둘기를 온유함으로 아름다움으로 평화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순종으로 순결로 그리고 속죄제물에 바쳐지는 희생제물로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 예수를 믿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봉사하며 이웃과 세상을 묵묵히 봉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마음껏 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후부터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남이 하기 힘들어 하는 일들, 이름이 나지 않는 일들에는 조용히 앞장서서 일을 척척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없어야 교만한 마음, 남을 기만하는 마음, 항상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는 옛사람의 모습들이 넘쳤으나 이제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며 항상 봉사하면서 예수의 향기를 조용하게 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비둘기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비둘기 같은 성령이 넘쳐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에서 오는 위로와 함께 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이하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즉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게 하시려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위로와 용기와 새힘을 부여해 주면서 참된 구원의 길-참된 평화의 길-참된 평화의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만들어 내는 선교지향적인 신앙-선교지향적인 교회야말로 비둘기같은 성령의 역사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같은 성령이란 강력하게 급선회하는 것을 의미하고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신앙을 일컫는다면 비둘기 같은 성령이란 조용하게 점진적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같은 성령의 모습은 태울것은 철저하게 태워버리고 끊어버릴 것은 단호하게 끊어버리고서 예수를 뒤따르는 과감한 신앙, 용기가 넘치는 신앙이라면 비둘기 같은 성령이란 온유하고 겸손하며 말없이 묵묵히 사명을 완수해 나가면서 무언가의 깊은 깨달음을 주고, 나아가서 잔잔한 감동을 주면서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넘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III
성경에 나타나는 성령의 셋째 모습은 요한복음의 16장 13절에 잘나타나 있는데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 8장 31- 32절에서도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란 새 사람을 입게 하는 힘이요, 자유케 하는 힘이며, 거룩하게 하는 영이요, 깨끗하게 하는 영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 신령한 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성령이란 성서말씀을 읽고 깊게 연구하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실천하게 하며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삶을 살아내게 하는지를 찾아내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찬송가 187장 2절을 보면 “진리의 빛을 비추사 주의 길 바로 걸으며 주님을 옆에 모시고 경건히 살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신앙의 사람을 성령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불같은 성령이든, 비둘기 같은 성령이든,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성령이든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는 믿음의 자세-믿음의 마음-믿음의 삶이 넘치는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충만함이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의 영, 예수의 정신이 넘치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바로 깨닫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성경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바로 깨닫는 정각(正覺)있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신앙의 방향으로 바로 서있는 정립(正立)의 사람을 살아가야 하며 그리고 성경말씀이 요청하고 있는 일들을 올바로 실천하는 정행(正行)의 실천해 나가는 신앙이야말로 성령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요 제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언제 어디서나 지극히 자신을 낮추시며 작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의 열매를 가득 맺어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가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다.
IV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5장 19-21절에서 육체의 열매 즉 더러운 생각, 육신의 쾌락을 찾는 마음, 우상숭배와 헐뜯음, 질투와 분노, 언제나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늘 불평과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신앙과 비슷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 나쁜 것으로 인정하는 배타주의와 거기서 나오는 잘못된 교설, 시기,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등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며 이런 모습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5장 22-23절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친절)와 양선(선하고도 착함)과 온유와 충성(진실)과 자신의 삶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절제의 모습, 이 아홉가지의 신앙의 모습을 성령의 열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열매가 아홉가지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야말로 값지고도 귀한 “성령의 열매”요, “서로 용서하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것”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나 자신 속에 담겨있는 죄성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새 삶을 살아가는 것”도 성령의 열매요, “몸과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도 성령의 열매요, “서로 짐을 져주는 마음”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크기는 비록 작고 교인 수는 비록 적어도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 그리고 오늘의 세상을 향해 새로운 비젼을 제시해주는 교회”도 성령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오늘처럼 기후위기-기후재앙의 시기에 대안적인 신앙과 비록 조금은 불편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공동체들을 섬겨나가겠다고 결단하는 신앙 또한 성령이 함께 역사는 신앙이라 확신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령의 역사를 교회 안에서만 국한하여 생각해 왔습니다. 그린데 고린도전서 12장 7절의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보면 성령의 역사를 교회 안에만 국한한 것을 넘어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은 공공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온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이요 나아가서 세상 속에서 공공의 선(common good)을 도모하며 공공의 복지(public welfare)를 위해 섬겨나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불같은 성령이든, 비둘기같은 성령이든, 진리를 깨닫는 성령이든 21세기 오늘의 세상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오늘의 교회는 고린도전서 12장 7절 말씀처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웃과 사회와 세상 속에서 공공의 선을 도모해가야만 성령이 충만한 신앙인이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신앙,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과 같은 기후위기의 시대에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공동체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연을 아끼고 돌보아 인간과 자연의 공동의 유익을 위한 신앙의 구조로 바뀌어 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참된 신앙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올바른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후손들이 우리들의 교회를 일컬어 본받을 만한 값진 신앙이요 공공의 유익과 공공의 선을 위해 최선을 다한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섬기는 대상에 따라 그 사람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나를 던져 희생하며 사랑하고 봉사하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며 섬기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뜨겁게 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헌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여나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날 모여 예배만 드리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의지하며 섬기는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의 말씀이 나를 부르고 그의 말씀이 우리 샘터교회 공동체를 불러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간곡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모두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여기에 모인 우리 샘터교회가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이 무엇인지를 정각(바로 깨닫고) 정립(말씀 위에 바로 서 있으며) 그리고 그 말씀을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바르게 실천해 나가는 정행의 신앙을 갖추어 잇다면 여러분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이 함께 하는 신앙의 사람이요 예수의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강림절에 예수의 정신을 지닌, 성령의 역사가 우리 온 교회 넘치게 해봅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는 일들마다 보람되고, 날이면 날마다 생명의 기운이 넘쳐서 신이 나고 흥이 나며, 기쁘고 즐거운 삶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삶에 멋이 듬뿍 담겨 있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맛있는 삶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성숙한 신앙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몸담은 샘터교회를 통해 성령 곧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넘치고 충만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아름다운 교회와 세상을 열어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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