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
롬 1:1~7, 대림절 넷째 주일, 2022년 12월18일
종과 부르심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여기서 명백하게 규정했습니다. ‘종’이라고요. 그냥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요. ‘종’이라는 단어가 일단 어감상 좋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주체성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에게 그 단어는 치명적입니다. 종은 무슨 종이냐고, 종으로 살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보다 더 심하다고, 자기 정체성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이나 조직에 종속적으로 살면 안 됩니다. 삶을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재미있는 인생을 여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소위 잘 나가는 현대인들의 삶은 지금 그렇게 풍성해지는 듯이 보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실하게 노력하거나 운이 좋아서 돈을 벌었다고 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즐긴다고 해서 자유로울까요? 오히려 옛날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종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건 아닐까요? 예를 들어서 ‘재미’에 종속되는 건 아닐까요? 많은 이들이 재미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지 않습니까. 억지로라도 흥밋거리를 두리번거리면서, 오히려 피곤할 정도로 찾지 않습니까.
거칠게 말씀드리는 걸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 어떤 인간도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나름으로 성취했어도 본질에서 종이라는 실존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왕이면 제대로 된 종으로 사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종으로 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겠습니까. 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말만 이렇게 하는 것 같아서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서 말씀드린 겁니다.
교회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종종 사용됩니다. 저도 예배 중 중보기도를 드릴 때 ‘이 종이 간구하지 못한 것까지 … ’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기도하는 저 자신을 가리키는 일종의 인칭대명사로 사용하는 겁니다. ‘종’ 개념이 오, 남용되는 때도 있습니다. 아무개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야, 하는 표현에는 어떤 특권 의식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지, 같은 표현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큰 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교회를 크게 키워서 유명하게 된 목사를 그렇게 부릅니다. 종은 삼보일배의 태도로 사는 사람인데, 어떻게 ‘큰 종’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하고 물으면 자신감이 떨어지겠지요. 롬 1:1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을 종으로 규정했습니다. 바로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경험을 해보셨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은 부르심의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을 가리킵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 대표적인 사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한 자들입니다.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된다는 사실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질의 차원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말이 여전히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사과를 먹어본 적이 없는 이는 사과 맛에 대한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실감이 가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사실을 인간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진지하게 느끼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이라는 건 당연하니 진지하게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주보 표지에 실린 그림에서 보듯이 출생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지 여러분은 다 아실 겁니다. 여기에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 외에는 더 타당한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그걸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울처럼 자기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부르심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종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종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누구에게 부르심을 받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지가 중요합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기울어지는 마귀의 종도 없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전업 목사나 신학자나 선교사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는 거꾸로 전업 목사나 선교사가 되었어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실제로 알지 못하고, 복음의 내용을 실제로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복음’(유앙겔리온 데우)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흔하게 하나님을 말하고, 복음을 말하니까요. 정말 알고 있을까요? 바울은 종교적으로 그럴듯한 어떤 이상 세계나 이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전체 존재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경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비유로 다시 설명하면, 자신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의 깊이를 완전히 새롭게 경험한 사람의 영혼에서 우러나온 고백입니다. 지금까지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인간 삶을 시원적인 깊이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외계인을 직접 만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전력투구하면서 지금까지 찾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찾지 못했던 구원을, 즉 참된 생명을 하나님의 복음에서 경험했습니다. 그 생명을 준 대상에게 그는 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복음의 실제적인 내용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어서 5절에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라고 말했으며, 6절에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7절에서 다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뻐해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바울은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바울의 고백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런 경험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왜 하나님의 복음인지를 바울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그 핵심은 3장에 나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의’라는 소제목이 달린 19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20절) 여기서 율법을 종교적 업적이나 돈으로 바꿔도 됩니다. 목사가 교회를 아무리 크게 키워도, 또는 교회 개혁을 아무리 소리높여 외쳐도 그것으로는 우리가 의로워지지 않습니다. 다음 28절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말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요? 저 사람은 아주 도덕적이고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근면 성실하다고, 본받을 게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우리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 행위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폭탄 발언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 고위층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고, 당시 그리스도교 주류 세력도 바울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의 이런 발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어딘가 불편합니다. 아닌가요? 사실은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께서도 당시 사람들에게 불편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울보다 더 과격했습니다. 성전을 허물라고,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높은 가치를 두는 것들로 우리가 의로워지지 않는다, 즉 구원받지 못한다, 또는 행복하지 않다는 말씀을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아니 그게 어떤 사태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겁니다.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했기에, 즉 예수가 누군지를 모르기에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가 너무나 거리가 먼 겁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신앙행태를 보면 됩니다. 여러분이 다 알듯이 겉으로는 믿음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행위에 치우칩니다. 교회 일에 매달리는 것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기도 많이 하라고, 예배 빠지지 말라고, 헌금 정성껏 최대한으로 바치라고, 교회 봉사를 잘하라고 말입니다. 그런 행위가 필요하긴 합니다. 교회 조직에 성실한 이들이 있어야 교회가 운영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런 행위가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는 체면이나 명예심으로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그의 영혼이 빈곤을 면치 못합니다. 그의 영혼이 의로워지지 않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교회의 종이 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교회를 믿는 겁니다.
행위에 떨어진 신앙행태의 내면에는 사실상 자기 욕망이 자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으니 결국 자기의(義)에 사로잡힙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듯이 자신의 옮음을, 정말 그게 선하고 괜찮은 일일 수도 있는데, 절대 기준으로 삼는 태도가 바로 설교하는 저 자신에게도 종종 나타나는 ‘자기의’입니다. 그 ‘자기의’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유대교에서 돌아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 경험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경험이 그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났다는 사도행전의 진술이 가리는 의미입니다. 그런 경험의 근거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4절)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는 ‘살아있다’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절감한 겁니다. 예수를 알기 전에도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며 열정적으로 종교 생활을 했으니까 ‘사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이 살아있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유롭지 못했고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냥 살 뿐이지 부활의 능력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한 건 아닐까요?
남 못지않게 율법에 철저했던 바울은 부활한 예수님을 경험한 뒤로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절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그것은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입니다. 더는 율법의 포로가 아니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수능 점수로 평가받지 않고 사랑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세상을 발견한 학생의 심정과 같습니다. 아니 사랑은 가치 평가를 초월하는 능력이니까 아예 평가가 없는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놀라운 생명의 세계를 예수를 통해서 경험했기에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경험은 너무 추상적이라고, 아니 평범한 사람에게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예수 경험은 옆으로 내려놓고 그냥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면 충분한가요?
바울이 말하는 ‘종’에는 두 가지 삶의 능력이 변증법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는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함으로써 그 외의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겁니다.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설입니다. 힘들어도 억지로 종으로 살라는 게 아닙니다. 종의 삶이 자유의 원천이라서 자발적으로 종으로 사는 겁니다. 예수 믿어도 실제로는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외롭고, 인생이 힘들다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순종’하지 못했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순종을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 본 적이 없기에 그를 통한 자유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얼마나 친밀하게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예수의 하나님 경험이 무엇인지, 그가 자신의 운명 앞에서 얼마나 절망했는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하나님께 매달렸는지가 느껴지시는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알고 싶어 하거나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순종(사랑) 없이 어떻게 자유를 원합니까?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고전 2:2)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바울의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걸 구분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어떤 목사와 선교사와 장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목회와 신학 업적이 유달리 뛰어나고,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는 목사라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지 아닌지 남이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남만 모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를 수 있습니다. 저도 사실은 이런 점에서 자신이 없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7절에 근거해서 하나의 흔적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게는 분명히 은혜와 평화가 임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마누엘’을 경험했기에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참된 평화를 누리는 겁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께서 자기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아니까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잠시 흔들려도 곧 제 자리를 잡습니다. 은혜와 평화를 실질적으로 누리는 겁니다. 이런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을 맞았고, 더구나 성탄절을 일주일 앞둔 여러분에게 이런 특권이 더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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