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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예수 죽다!

23:26-49, 사순절 여섯째 주일, 2016320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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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질문에 속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살고 싶으신가요?’ 나름으로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는 분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예수 닮기 원하네.’라는 복음 찬송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면서 살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정도로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온갖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꼼꼼히 따져보면 그런 생각을 포기할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예수님은 고독하게 사셨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 죽음이란 것도 모두가 저주스럽다 생각하던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형법인데, 오늘의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겁니다. 여러분 자신이나 자식들이 이런 운명에 떨어진다면 펄쩍 뛸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딜레마에 놓여 있습니다.

 

이 문제를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으로 대충 처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인류 구원을 위해서 그런 운명으로 사는 게 당연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인생살이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성실하게 살면 되지 굳이 예수님과 똑같은 운명으로 살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낼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제쳐놓고 그분의 실존을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긴 채 그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에 묶여 있으면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공허한 존재로 떨어집니다. 말로는 예수님과 그분의 운명을 믿는다고 하지만 모든 삶에 대한 경험과 판단의 기준은 다른 데서 찾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신앙의 심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모양만 취한 상태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우리의 삶에서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만 참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또한 그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면 바람과 돌과 꽃과 인간의 고통과 환희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되려면 예수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핵심은 그의 죽음입니다. 복음서를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장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수난설화가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먼저 교회 전승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23장에서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는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유대 권력자들과 민중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달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이 집행될 골고다 언덕까지 오는 과정에서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다음에도 모욕적인 촌극들이 벌어집니다. 사형 집행인들과 군인들로부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이런 인간적인 모욕과 육체적인 고통을 예수님은 여섯 시간동안 견디셨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는 순간을 누가복음 기자는 눅 23:46절에서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구절을 읽다가 나는 죽는 순간에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하고 자문해봤습니다. 일종의 유언에 해당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유언을 할 거 같습니까? 가지각색이겠지요. 가장 일반적으로는 아내나 남편, 또는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자기가 몰래 숨겨놓은 돈을 밝힐 수도 있을 겁니다. 원수를 갚아달라거나, 더 살고 싶다고 매달리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가 정신 줄을 놓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유언을 하고 싶습니다.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이 어디에 삶의 중심을 두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죽음의 순간에 나올 말도 결정될 겁니다.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외쳤다는 것은 그가 평소에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런 호칭을 쓴 사람과 대상이 부자지간이라는 뜻인데, 그게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게 들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있긴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의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더 넓게 보면 유대인들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유대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산헤드린 종교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된 빌미가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즉 메시아를 사칭한 사람입니다. 산헤드린의 그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자랑하듯이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고유한 믿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친밀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가까이 계신 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14:36)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빠는 더 친근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과 거룩한 종교의식으로 하나님을 멀게 느끼던 유대인들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주 가까운 분으로 인식하고 사셨습니다. 하늘의 새를 먹이고 야생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신뢰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버지라는 표현을 남녀 차별적이라 해서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라고 하거나 차라리 아버지를 빼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긴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늘 남자로서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니까요. 예수님의 경우는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고, 또한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당시 종교 권력자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친밀하게 느끼고, 실제로 신뢰하고 있나요? 호흡처럼 가깝게 느끼시나요? 그런 믿음으로 살고 싶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막연하게 느낄 때가 많을 겁니다. 겉으로 나는 정말 매 순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 하는 신자들도 그게 뭔지를 설명해보라면 말문이 막히거나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기도 응답입니다. 기도 응답 받는 게 하나님을 친밀하게 느끼는 기준이 됩니다. 그런 느낌과 생각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깊이가 있고 성숙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 응답이 없는 상황, 하나님이 침묵하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멀게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상황을 아시지요? 아우슈비츠 상황을, 또는 시리아 내전 상황을 아시지요? 그 외에도 기도 응답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상황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친밀한 관계인 아버지로 경험하셨습니다. 그런 경험이 뭔지 설교하는 당신은 아는지, 안다면 좀더 구체적인 당신의 말로 설명해보라, 하고 저에게 눈짓을 하는 분들이 여기 계십니다.

 

일단 비유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종종 세상을 충만한 어떤 것으로 경험합니다. 어떤 때는 바람이 충만합니다. 어떤 때는 흔들림으로 가득합니다. 밤에 집으로 들어갈 때 밤하늘을 보면서 어둠과 빛이 충만하다는 걸 느낍니다. 어떤 때는 소리와 음악, 또 어떤 때는 색깔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가득하다는 말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는 기도가, 말씀이, 성찬이, 찬송이 충만합니다. 교회 용어로 말하면 이런 모든 경험은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에서 자연이 아름답다거나 예배가 은혜롭다는 것쯤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엄청난 힘(틸리히-ultimate reality, 판넨베르크-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 비밀한 방식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험이 내 삶에 확실한 토대로 자리한다면 욥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아버지로 생각합니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입시와 취업과 결혼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총선에 나선 정치인들은 그 누구보다 선거에 목을 매고 있겠지요.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에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열정적으로 일상을 살아야겠지요. 문제는 이런 일상에 과도하게 매달려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고(6:24) 경고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생하게 경험하고 느낄 수 있을까요? 기도를 많이 하면 될까요?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될까요? 무조건 믿으면 될까요?

 

내 영혼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다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다니,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다니, 억울해서 못 견디겠으니 아무튼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표출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명을 영혼의 차원에서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혼은 무엇일까요? 헬라어 성경에는 영혼이 프뉴마로 나옵니다. 프뉴마는 spirit, inner life라는 뜻입니다. 루터 성경은 프뉴마를 Geist(가이스트)로 번역했습니다. 독일어 가이스트는 우리말로 영, 또는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프뉴마라는 헬라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2천 년 전 성서시대 사람들이 이 단어로 말하고 싶어 한 것을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영혼은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그 어느 누구도 사람의 영혼에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10: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현대 생물학과 물리학은 성서가 말하는 영혼 문제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뇌 과학은 영혼을 뇌의 생리 화학적 작용으로 봅니다. 지난 39일부터 15일까지 이세돌 바둑 사범과 구글 회사가 만든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5회에 걸린 바둑 시합이 열렸습니다. 이세돌 사범이 1:4로 졌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머리에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깊이 각인되었을 겁니다. 빅 데이터를 갖춘 컴퓨터가 딥러닝(심화학습)을 통해서 인간의 지능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내다봅니다. 더 진도가 나가면 감정을 느끼고 자기를 의식하는 컴퓨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감정과 자기의식이 있으면 영혼을 소유하는 겁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도 결국 생물학과 물리학의 영역으로 떨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이 생물학적으로 옳지만 그것으로 인간의 생명 현상이 완벽하게 해명되는 게 아닌 것처럼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의 발전을 거듭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문제를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포함된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인 세계를 깊이 알아갈 수 있지만 알아갈수록 세계의 깊이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 깊이는 우리에게 비밀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 끝까지 도달해도 그곳보다 더 먼 세계가 숨어 있다는 걸 확인할 뿐입니다. 그런 것에만 매달리면 허무에 떨어지겠지요. 이게 우리 피조물의 한계이고, 창조주의 전능입니다.

 

세상의 깊이와 비밀을 아주 가까운 일상에서 예를 들겠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저는 마당 한 편에 여러 종류의 꽃씨를 뿌렸습니다. 해바라기 씨를 제일 많이 뿌렸습니다. 모종으로 자라면 다른 곳으로 옮겨 심을 생각입니다. 씨는 대개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시간이 지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씨와 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위대해도 씨앗을 강제해서 몇 시간 만에 꽃을 피우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씨의 생명 현상에 약간의 도움을 주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생명 자체를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에 너무 겁먹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 영혼은 오직 아버지의 손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말과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초능력을 발휘해서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게 아니라 실제로 죽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실제로 죽는 순간이 옵니다. 이 사실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외면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전자에 속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죄와 죽음 문제를 자신의 인생에서 상수로 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전적으로 몰입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죽었듯이 우리도 죽을 것이며, 그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다시 살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23:26-49
https://youtu.be/NxAbg2UIU2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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