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2:6-12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포로 귀환 이후
구약성서 중에서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출애굽을 다룬 모세오경이나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를 다룬 전기 예언서는 그 안에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후기 예언서라고 부르는 구약성서는 이해하기가 까다롭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성서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를 읽기가 까다로운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로 이 말씀이 운율을 갖춘 시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소설보다는 시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이사야서의 역사적 배경이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2천5백 년 전이라는 시간적인 차이도 그렇고, 이사야와 그들 민족이 처한 상황도 우리와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읽어도 현실적으로 느끼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대강절 셋째 주일의 설교 본문이 이사야 61장이었는데, 그날 설교에서 소위 제3 이사야로 불리는 이 말씀이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고 사회 지도급 인사를 비롯해서, 거기에는 다니엘도 포함되는데,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패망하자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기원전 539년경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대략 50년 정도의 포로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 뒤로 2차, 3차로 귀국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고대의 전쟁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겁니다. 전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처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고대의 전쟁은 좀 더 심각했습니다. 중요한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나라의 보물들은 모두 빼앗기고, 사람들은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모든 걸 잃게 되고, 거꾸로 승리하면 모든 걸 얻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 성을 공격할 때 그 성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진행으로만 놓고 본다면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를 잃은 유대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져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천만다행으로 바벨론 제국이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일제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역시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했기 때문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상해보십시오. 바벨론에 의해서 쑥대밭이 된 다음에 50년 이상 버려졌던 예루살렘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곳에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남아있기는 했지만, 패전한 백성은 끽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파송한 총독이 유대를 수탈의 대상으로만 삼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거미줄을 쳤으며,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활동은 일체 중지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퇴락해버린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방이라는 감격을 안고 고국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이 바로 그랬습니다. 한번 무너진 국가를 재건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어디서 조달할 수 있나요? 신학과 학문의 전통이 쉽게 복원될 수 있나요? 바벨론의 식민통치로 인해서 약화된 민족의식이 순식간에 회복될 수 있을까요? 포로 귀환 이후 수많은 예언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그들 앞에 놓인 문제들이 단시일에 해결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사야입니다.
예루살렘의 재건
한 민족의 정통성은 수도의 재건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귀국한 유대인들에게도 예루살렘의 재건이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이사야는 6,7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 위에 보초들을 세운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아니하고 그들은 결코 잠잠해서는 안 된다. ‘야훼를 일깨워 드릴 너희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야 되겠느냐? 하느님께서 가만히 못 계시게 예루살렘을 기어이 재건하시어 세상의 자랑거리로 만드시게 하여라.’”
일반적으로 보초를 세우는 이유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것이지만, 오늘 이사야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보초의 임무는 야훼를 일깨우는 것입니다. 야훼를 일깨운다는 말은 야훼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문장은 일종의 비유이며 상징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의 재건이 매우 시급하다는 사실입니다. 보초를 세워놓고 야훼를 일깨워야 할 정도로 예루살렘의 재건이 시급합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의 재건이 궁극적으로는 야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재건이 자신들의 힘으로 쉽게 가능했다면 이런 설교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유대의 역사에 야훼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재건은 오직 야훼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의 보초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재건을 잊지 않으시도록 일깨워야만 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일깨운다는 건 그들이 무작정 떼를 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그들은 야훼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 약속이 7,8절에 진술되어 있습니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내주지 아니하리라.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외국인들에게 너의 포도주를 내주지 아니하리라.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곡식을 먹으며 야훼를 찬양하게 되리라. 포도를 거둔 사람이 자기 포도주를 마시되 나의 성소 뜰 안에서 마시게 되리라.” 본문에 먹을거리와 마실거리가 나옵니다. 곡식과 포도주입니다. 이건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밥과 막걸리입니다. 성서 뜰 안에서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는 표현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을 뜻한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땅, 혹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성소로 본다는 게 아닐까요? 어쨌든지 이사야는 지금 이렇게 생존을 약속하신 야훼 하나님께 예루살렘의 미래를 걸어두고 있습니다.
생존은 구원의 가장 아래층에 놓여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곧 생존보다 더 절대적인 구원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온갖 부도덕한 사건들도 역시 이 생존의 지평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간 가족을 즉결 처형한 여호수아의 행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아간 가족을 인민재판의 방식으로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도 역시 그들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끔찍한 바벨론 포로를 경험한 그들에게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이 곡식과 포도주를 보장하신다고 예언합니다.
해방의 역사
이스라엘의 생존은 곡식과 포도주로 끝나지 않고 정치적 해방으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먹을거리가 충분하게 보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민족의 생존은 정치적 해방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그들은 이런 민족적인 생존의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이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도착한 선발대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서 매진합니다. 이제 제2, 제3의 포로들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후발대가 돌아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나아가라, 성의 이 문 저 문을 지나 나아가라. 하느님의 백성이 올 길을 닦아라. 큰 길을 닦고 또 닦아라. 걸림돌을 치워라. 뭇 백성 앞에 깃발을 높이 올려라.”(19절).
그들이 바벨론에 남아 있는 포로들의 귀환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을는지 우리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50년 내지 70년 가까이 오직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날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아직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포로 1세는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겠지요. 오히려 제2세, 3세들이 훨씬 많았을 겁니다. 이들이 곧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의 귀환은 곧 하나님의 구원사건입니다.
예언자들은 이렇게 야훼 하나님의 구원을 단지 개인의 영적인 차원이나 개인의 생존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민족 전체의 생존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출애굽은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그들을 이끌어내신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라는 게 곧 구약성서의 가장 기본적인 야훼 하나님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치적 구원은 무엇일까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마 남북통일이 아닐까요? 이렇게 65년 동안 분단된 채로 살아가는 나라는 이 세상에 한민족 말고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런 부분에서 훨씬 소극적입니다. 우리가 통일을 끌어내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인이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남북의 적대감을 해소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제가 독일 뮌스터 대학교에서 잠시 공부하고 있던 1985년에 뒤셀도르프에서 “교회의 날”(kirchen Tag) 행사가 열렸습니다. 격년제로 열리는 이 행사는 서독 개신교의 가장 큰 선교행사였습니다. 첫째 날 개회예배의 설교를 맡으신 분이 동베를린의 어느 여자 목사였습니다. 동서독 통일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한 교회가 동독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였다고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남북통일을 위해서 어떻게 마음의 담을 헐어내고 있나요? 혹시 우리는 그 담을 쌓는 데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사야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큰 길을 닦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지금 길을 더럽히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의 오심
이사야는 상상력이 뛰어난 예언자였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닦으라고 선포하는 이사야는 이제 전혀 새로운 영적인 상상력으로 이렇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너를 구원하실 이가 오신다.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11절). 이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십니까? 바벨론 포로들이 앞서서 걸어오고, 그 뒤를 하나님이 따릅니다. 그 백성은 하나님이 구해내신 사람들입니다. 흡사 전쟁 포로를 구해낸 외교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데리고 오십니다. 그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오시어 예루살렘을 재건하실 겁니다. 이 예루살렘은 앞으로 세상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버릴 수 없는 도시’(12b)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사야의 진술은 그가 하나님의 구원에 이스라엘의 운명을 걸어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곡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며, 아직 바벨론에 남아있는 포로들을 마저 데리고 오실 것이며, 예루살렘은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위대한 도시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사야의 진술을 정확하게 보십시오. “너를 구원하실 이가 오신다.”(11b). 지금 이사야는 구원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많은 포로들이 바벨론에 남아있으며, 예루살렘의 재건은 확실한 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구원하실 그 야훼 하나님이 아직 여기에 당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오십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분명히 오십니다.
이런 긴장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것을 완성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생명이 파괴되는 세상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예루살렘이 재건될 수 있다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우리도 참된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믿고 있으며, 또한 포로의 귀환을 위해서 큰 길을 닦으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서 길을 닦을 뿐입니다. 이런 긴장 안에서 살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2천년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으로 오신 분입니다.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그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온전한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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