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2021년 7월11일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로마 제국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때입니다. 유대 지역을 총괄하는 로마 제국의 총독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정치 세력은 헤롯 왕조입니다. 헤롯 왕조의 전개 과정은 복잡합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다음에 세 명의 아들들이 분할된 지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분봉 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를 다스린 분봉 왕은 헤롯 안티바스입니다. 눅 3:1, 2절은 그런 정치 상황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Herod Antipas)이 갈릴리 분봉 왕으로, 그 동생 (헤롯)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 있을 때”
헤롯(안티바스)을 복음서 기자들이 다루는 이유는 그가 세례 요한을 죽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첫 부인과 이혼하고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헤롯 왕가의 공주였던 헤로디아는 빌립 왕과 이혼한 후 딸 살로메를 데리고 시숙인 헤롯 안티바스와 재혼한 겁니다. 이 사건을 세례 요한이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었습니다. 이런 일은 파격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 관례가 헤롯 왕실에 있었나 봅니다. 딸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가서 의논합니다.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게 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요구였으나 일이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당대 거물인 선지자 세례 요한은 허무하게 목이 잘렸습니다. 이 장면을 그린 화가가 많은데, 카라바조(1571년경~1610년)의 그림이 가장 유명합니다.
왕
헤롯이 요한을 처형시킨 이유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헤로디아의 책임이 더 크게 나옵니다. 헤로디아는 전형적인 요부(Femme fatale)로 그려집니다. 그녀는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으나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두려워했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헤롯의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요한의 목을 치라는 명령은 분명히 헤롯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예수 죽음의 책임을 주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 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빌라도 총독의 책임이 줄어들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유대계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이 사건을 기술했습니다. 요한의 대중적인 인기가 올라가는 걸 헤롯이 두려워했습니다. 자칫하면 민중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사해 부근의 마캐루스 요새로 옮겨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양쪽의 보도가 부분적으로는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도덕적인 비난이나 요한의 대중적인 인기나 모두 선지자 세례 요한으로 인해서 자신의 절대 권력에 손상이 간다고 헤롯이 판단했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입니다.
왕권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이지 않으면 왕권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정적이 나타나면 회유하거나 제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우리는 동서양 역사에서 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정 시대인 옛날에 비해서 민주 공화정 시대인 오늘날의 정치는 조금 나아 보이지만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와 야의 트집 잡기식 정치 싸움은 그야말로 난장판입니다. 진영 사이의 충돌도 심각합니다. 그들이 배설 수준으로 쏟아내는 말은 국민의 정신 건강을 크게 해칠 정도입니다. 흔히 말하듯 ‘남 탓’이 도에 넘칩니다. 코로나19 사태만 아니었다면 서울은 계속되는 시위로 몸살을 앓았을 겁니다. 내년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까지 진흙탕 싸움이 더 격해질 겁니다. 여기에 일반 대중들도 끼어듭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저는 거기에 연루된 일부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파렴치하고 뻔뻔해서 정치판을 흐린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권력의 속성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제가 정치인이 되었다면 그분들과 비슷하게 행동했을지 모릅니다. 가끔 초등학생들도 권력을 쥐려고 엉뚱하게 행동한다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어느 조직이나 권력을 향한 인간의 과도한 열정이 작동하는 겁니다. 그런 권력 지향적 열정의 절정이 바로 헤롯에게서 볼 수 있듯이 정적 제거로 나타납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렇습니다. 왕이 왜 필요할까요? 왕이 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오히려 살기 더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여기서 왕은 절대 권력을 가리킵니다. 요즘으로 바꾸면 검찰총장이 왕이고, 대법원장이 왕이고, 국방부 장관이 왕이고, 전체적으로 대통령이 왕입니다. 재벌 총수들도 왕이겠지요. 왜 이런 절대 권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답은 여러분도 다 아십니다. 그런 권력이 개인과 사회를 지켜준다는 게 대답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가 없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카오스로 떨어질 겁니다. 아프리카 야생을 상상해보십시오. 서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합니다.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여지없이 잡아 먹힙니다. 그곳에도 왕이 있다면 약한 동물은 잡아먹힐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야생에는 왕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잔혹한 맹수라도 배가 고프지 않으면 약한 짐승을 잡아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릅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끝없이 챙기려고 합니다. 야생보다 더 무질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한다면 왕이 필요 없습니다. 법도 필요 없고, 군대도 필요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인간만은 일반 동물과 다르게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기에 왕이 없으면 인간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으로 변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대통령과 검사들에게 엄청난 권력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평화롭게 어울려서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왕이 오히려 자기의 절대 권력을 사유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벤 헤롯 왕에게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선지자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크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노숙인처럼 살면서 유대인들의 양심을 깨우는 나팔수였습니다. 수많은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일행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 중의 일부는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세례 의식은 기독교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지자 세례 요한을 떼어놓고 예수님과 기독교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선지자들은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왕조와 대립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왕은 자기를 절대화하는 속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로마 황제나 헤롯만이 아니라 유대의 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 앞에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선지자들이 토를 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역할을 감당한 선지자 전통이 다른 나라에는 별로 없습니다. 선지자들의 활동이 구약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등등, 대부분 선지자는 무소불위의 왕권에 대항하여 온몸으로 싸웠습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말씀을 받았노라고 주장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간혹 사이비 선지자도 나왔습니다.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구약학자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은 선지자들과 왕의 대립을 다룹니다. 선지자들은 대안적 세상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현실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세상을 개혁하려는 몸부림입니다. 반면에 왕은 현실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를 발전시켰습니다. 성전을 화려하게 건축했습니다. 그 성전이 바로 왕조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선지자들은 성전 중심주의를 벗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화려한 제사보다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다고 외쳤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설교를 한 대목만 인용하겠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1~24) 선지자는 성전이나 궁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왕에게서 녹을 먹으면 자유롭게 말씀을 외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지자 전통이 세례 요한에게 이어졌고, 예수님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중심주의를 어떻게 비판했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왕권에 맞서 세상을 개혁하려는 선지자의 외침이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켰을까요? 저는 유럽의 역사가 이런 선지자의 전통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등, 우리가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나라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왕권의 절대화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제도화된 겁니다.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었고, 노동 시간을 법적으로 제한했습니다. 복지를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개인들의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려는 노력입니다. 선지자들의 상상력이 그런 나라에서 나름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런 나라가 절대적인 나라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다시 선지자들의 전통을 거부하는 세력이 그곳에도 나타날 겁니다. 몇 년 전 아프리카와 근동의 난민을 내치던 유럽 국가의 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 시절의 미국이 상징적입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선지자 전통은 우리가 포기해서도 안 되지만 쉽게 실현될 수 있다고 낙관해서도 안 됩니다. 선지자 전통의 극단적인 형태라 할 공산주의가 오히려 절대 권력으로, 자기 숭배로 변질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선지자들의 삶은 대체로 힘겨웠습니다. 고립무원에 떨어지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절대 권력을 손에 쥔 왕들이 그들을 적대시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젊은 나이에 헤롯에게 죽임당했고, 예수님도 역시 죽임당했습니다. 요한은 지역 맹주인 왕에게 밉보여서 죽었고, 예수는 로마 제국의 법에 따라서 죽었습니다. 비슷한 운명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과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여기는지를 물었습니다. 마 16:14절에서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고, 또는 엘리야나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6:14, 15절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요한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서 죽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본질에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요한은 선지자지만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는 여러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칭호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칭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이미 제자들에게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우리도 시몬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고백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세례 요한은 선지자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세상을 개혁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제도를 변화시켜야 하고, 사람의 행동도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뇌물을 받는 사람들은 앞으로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백성의 본이 되어야 할 왕으로서 제수와 재혼한 헤롯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적폐 청산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메시지 앞에서 당시 모든 사람의 간담이 서늘해졌을 겁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9)
예수님의 설교는 요한과 달랐습니다. 요한의 회개는 윤리 도덕적인 변화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회개는 존재론적인 변화입니다. 요한의 하나님은 심판의 주(主)이지만 예수님의 하나님은 사랑의 주이십니다. 이 두 관점은 충돌합니다. 옥에 갇힌 요한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우리가 기다려야 할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인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을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충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3) 자기의 메시지를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경험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새롭게 경험하려면 하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거로 여길 수밖에 없는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로 인해서 영혼이 충만해지는 경험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종교적 사변에 불과한가요?
왕은 자기 말만 잘 들으면 연봉을 높여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좋은 왕은 실제로 그렇게 정치하겠지요. 나쁜 왕은 백성을 이용하겠지요. 선지자는 연봉의 차이를 줄여나가자고 외칩니다. 빈부 차이를 줄이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인간 삶의 조건에서는 빈부 차이가 없어지는 세상은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이 온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빈부격차가 적은 북한 사람들이 행복한가요? 그곳이 지상낙원일까요?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미 충분한 연봉을 받았다는 사실로 눈을 돌리라고 호소합니다. 숫자로 표기될 수 없는 그 충분한 연봉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걸 볼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만 뜨면 재테크와 먹방 이야기와 권력투쟁 이야기로 뒤범벅이 된 이 현실에서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살기에는 뭔가 불안하신가요? 제가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 있겠습니까. 믿음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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