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15년 10월4일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구약성경을 한번이라도 다 읽어보신 분이 계신가요? 구약성경은 39권으로 구성됩니다. 그중에 가장 읽기 힘든 성경은 욥기입니다. 욥기는 전체가 42장으로 비교적 양이 많지만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의인이고 부자였던 욥이 어느 날 갑자기 쫄딱 망했다가 다시 축복을 받아 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는 전체 42장에서 단 세장, 즉 앞의 1, 2장과 마지막 42장에만 나옵니다. 욥의 줄거리만 알고 싶다면 이 세 장만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욥기가 정작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대목은 나머지 장에 나옵니다. 3장부터 39장까지가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 대목은 욥의 친구들과 욥, 그리고 욥과 하나님 사이에 벌어지는 신학적 논쟁입니다. 이런 신학적 논쟁이 지루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욥기 읽기를 꺼려합니다. 믿음의 깊이와 세상 삶의 불가해한 차원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욥기가 필독서입니다.
욥의 대재난
욥은 두 번의 큰 재난을 당합니다. 하나는 자녀들과 재산을 모두 잃은 사건입니다. 욥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욥에게는 아들이 일곱에다가 딸이 셋이 있었고,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 마리가 있었으며, 그 밑에서 일하는 종들도 많았습니다. 욥은 요즘의 큰 기업체 사장에 해당됩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모범적으로 잘했습니다. 욥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소식을 연달아 들었습니다. 1) 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쳐 들판의 소와 나귀를 강탈해가고 종들을 죽였다. 2) 번개가 쳐서 양과 종들이 모두 죽었다. 3) 갈대 사람들이 들이닥쳐 낙타를 강탈하고 종들을 죽였다. 4)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돌풍이 불어 자식들이 모두 죽었다.
욥이 당한 두 번 째 큰 재난은 욥이 가장 저주스러운 병에 걸린 사건입니다. 욥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재난을 당한 뒤에도 욥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재난은 원래 사탄의 음모였습니다. 천상회의에서 사탄은 욥을 함정에 빠뜨리겠다고 하나님과 흥정을 벌입니다. 욥이 하나님에게 성실한 것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니까 그 축복을 거두어들이면 하나님을 거부할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허락합니다. 사탄은 욥의 재산을 빼앗고 자녀들을 죽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욥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자 사탄은 다시 하나님과 흥정을 벌입니다. 재산과 자식을 잃었어도 자기 몸이 성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거니, 그의 몸을 치면 달라질 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생명만은 손을 대지 말라는 단서를 달고 사탄의 요구를 허락합니다. 욥 2:7, 8절은 욥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고대인들에게 악성 피부병은 가장 저주스러운 병입니다. 일단 겉으로 볼 때 흉하기도 하고, 본인이 견디기도 힘들고, 전염성도 높기 때문입니다. 욥이 걸린 병이 나병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나병과 악성 종기나 피부병이 구분되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 조치됩니다. 본문에서 욥이 재 가운데 앉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재는 똥더미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요즘의 쓰레기장입니다. 욥이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몸이 가려워서 긁었을 수도 있고, 자학적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욥은 지금 인간으로서 죽지 않는 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한 셈입니다. 이 순간에 갑자기 욥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그는 욥에게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 여자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을 한 날에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하나도 아니고 열을 잃은 겁니다. 참척의 고통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크게 느낍니다. 열 달 가까이 몸에 품었던 아들과 딸을 잃었으니 이 여자가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남편은 차마 옆에서 보기 힘든 상태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많던 재산과 하인들도 없어졌습니다. 날품팔이나 구걸을 통해서라도 욥을 돌보지 않으면 욥은 굶어 죽습니다. 아내는 욥을 돌보면서 위로하기도 하고, 살 길을 찾아보자고 의논하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내에게는 모순이요 자가당착으로 들렸습니다. 모든 걸 잃고 몸도 병들더니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다른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아내는 욥에게 악담을 했습니다. ‘당신,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게 차라리 좋겠어요.’ 이런 상태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오히려 낫다고 뜻입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가한 비난은 이후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그 신학적인 논리가 더 풍부해집니다. 욥의 친구들은 세 명입니다. 엘리바스, 소발, 빌닷입니다. 이들은 유대의 지혜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배운 것도 많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친구 욥이 끔찍한 재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와서 위로하고 조언했습니다. 욥이 이런 불행을 극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상식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욥이 지금당한 재난과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욥을 다시 세워주실 거라고 충고했습니다. 욥은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더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욥은 그들을 맞받아쳤습니다. 이들 사이의 논쟁이 한바탕 지난 뒤에 젊은 유대교 신학자인 엘리후가 등장해서 또 다른 논리를 제시합니다. 욥에게 임한 재난은 높은 경지의 신앙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니, 참고 견디면 좋은 시절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겁니다. 욥은 사면초가에 빠졌습니다. 아내와 세 명의 친구와 젊은 신학자가 다 욥을 비난했습니다. 본문 욥 2:10절은 아내를 향한 욥의 대답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위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대답입니다. 이것은 기복주의의 극복입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전통적인 입장과는 위배됩니다. 구약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임하고,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보십시오. 다 복 받아 부자로 살았습니다. 중간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간이고, 더 나가서 그것은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이고 결국에는 다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이자 자신들을 선택한 신이라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이런 생각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런 생각과 논리가 유대의 지혜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그것이 구약의 중심사상인 신명기 역사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욥은 이런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복만이 아니라 화를 당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의 대답은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재난을 당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욥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자기 죄의 탓으로 돌리고 인정하든지, 아니면 이유 없이 재앙을 내린 하나님을 욕하고 죽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아내와 친구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욥은 그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욥은 겸손하지도 못하고 용기도 없는 인물로 비쳤을 겁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못했으니까요. 여러분들도 욥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욥이 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걸까요?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성실하게 섬기던 사람이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 신앙이 가능할까요? 욥기는 바로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팔복에서 복되다고 말씀하신 대상은 가난하고 울고 외롭고 갇힌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길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람들로 매도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 그리고 시냇물을 찾는 목마른 사슴의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나님만을 향하게 됩니다. 세상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참되게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시나요?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불행한 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더 근원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게 뭘까요?
얼마 전에 둘째 딸과 아침을 먹으면서 식탁에 올려놓고 제가 조금씩 읽고 있는 하이데거에 관한 책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섬뜩한 느낌으로서의 불안’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계 안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면 섬뜩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설명을 듣자 딸은 자기도 더 어렸을 때부터 그와 비슷한 느낌을 종종했지만 너무 무섭고 낯설어서 자꾸 피하면서 재미있는 일상에만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느낌을 경험했을 겁니다. 내가 어디서 왔을까, 하는 질문만 파고들어도 아득하고 섬뜩합니다. 혼자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된 상태를 견뎌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그런 느낌은 더 심각해집니다. 이런 걸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입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고립무원으로 세상을 대면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백척간두라고 불렀습니다. 백 척이면 30미터쯤의 높이입니다. 그런 나무 기둥 위에 혼자 올라서면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욥의 운명이 이와 비슷합니다. 아내, 친구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하나님도 도움이 안 됩니다.
현대인들은 영적인 고립무원과 백척간두를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 교육이 그런 경험을 막고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모두 대학을 위한 정보를 배우는 데 몰두하고, 대학교에서는 취업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교육 제도 아래서 셍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말하듯이 이 세상의 모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의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관계를 맺는 경험이 가능할까요? 특히 스마트 폰이 청소년들의 정서와 영성 형성에서 더 큰 문제일지 모릅니다. 그 기계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유용한 도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의 역기능이 너무 큽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누군가와, 그리고 어떤 에피소드와 접속합니다. 그게 반복되면서 혼자서 세계를 직면할 능력을 잃어갑니다. 고독을 느낄 틈조차 내기 힘듭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연예인들과 스포츠와 인터넷 게임만이 자기 삶의 현실로 경험됩니다. 기껏해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익숙한 것들이 자기 뜻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만 두려워할 뿐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빈말과 호기심과 애매성에 빠져서 본래적인 자기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신학적으로 바꾸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라는 영적 실존이 무엇인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세상살이에만 쫓김으로써 참된 믿음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설명이 실감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욥의 운명은 쓰레기장처럼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모든 것들과 단절되었습니다. 피부는 병들어갑니다. 숨이 붙어 있긴 하나 죽은 거나 다를 게 없습니다. 욥 3장에서 그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욥 14장에서 자기를 스올, 즉 지옥에 감춰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욥의 운명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욥입니다. 우리는 곧 늙고 병들고 모든 정들었던 것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집니다. 모든 기억들이 망각됩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득달같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이 옵니다. 쓰레기장으로 가야합니다.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욥의 운명을 안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엄중한 사실은 외면한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순간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런 믿음 없이 어떻게 오늘의 삶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그런 믿음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경험했던, 즉 완전히 버림받았던 한 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2천 년 전 삼십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가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반국가 사범에게 내려지는 로마의 사형제도입니다. 그는 체포당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이로 인해서 모든 기존 권력과 체제에 위협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유대교 최고법정인 산헤드린과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빌라도 총독이 이 사람에게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여섯 시간 동안 몇 마디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다음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그는 나사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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