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회개
욥 42:1~6,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21년 10월24일
『욥기』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특이한 성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총 42장입니다. 그중에 욥에 관한 서사는 세 장, 즉 1~2장과 마지막 42장뿐입니다. 나머지는 무죄한 이의 재난이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신학 논쟁입니다. 재난이 죄가 원인이라거나 신앙 단련 과정이라는 친구들의 논리를 욥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않으나 이런 재난을 당할 정도로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욥은 마지막 42장에서 갑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3절을 들어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이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친구들 앞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삿대질하면서 왜 자신에게 이런 재난이 닥쳤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고함친 사람이었습니다. 이럴 바에야 태어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 능력을 부정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렇게 당당했던 욥이 이제 자신이 깨닫지도 못한 일을, 그리고 알지도 못한 일을 떠들어서 부끄럽다고 말하는 겁니다. 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잘못을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일종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토록 처절하고도 줄기차게 자신의 의로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던 욥이 자기주장을 거둬들인다고 했습니다. 급기야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티끌과 재는 한편으로 마을에서 격리된 욥의 실제적인 실존을 가리키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궁극적인 미래를 암시합니다. 자기 자신을 티끌과 재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때만 회개할 수 있고, 그런 수준의 회개만이 참된 회개라는 뜻일지 모르겠습니다.
욥이 회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본문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친구들과의 논쟁은 37장에서 끝났습니다. 서로 자기주장만 내세웠지 서로의 생각을 좁히지는 못했습니다. 38장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이 논쟁에 개입합니다. 그게 41장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네 장에 걸친 그 내용은 주로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몇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39:19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악어)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장엄하고 신비한 자연 세계에 대한 묘사입니다.
욥기에서 이런 묘사는 새로운 게 아닙니다. 이미 앞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산을 무너뜨리고 해를 뜨지 못하게도 하고 별들을 가두신다고 발언했습니다. 9:10절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욥만이 아니라 욥을 비난한 소발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11:7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누구나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말씀을 다시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비약이 심해 보입니다. 욥이 회개한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관한 간접적인 단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하나님에 관해서 지금까지 ‘듣는’ 수준에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고대 유대 선생들에게 볼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며, 말씀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나,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리신다는 가르침이 그들의 역사에서 이어졌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구도적인 태도로 살아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랍비이고, 바리새인이고, 서기관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당대의 지식인들입니다. 그들이 고대 유대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사회 현상은 오늘도 비슷합니다. 수능시험이나 각종 임용고시는 그 사람의 지식에 대한 평가입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사회적 권한이 주어집니다. 과거제도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법조인의 영향력이 우리나라에는 유독 큽니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두를 달리는 여야 대표자들이 모두 법조인입니다. 현재 대통령도 법조인입니다. 국회의원도 법조인 비율이 가장 높습니다. 대한민국이 유달리 법치가 강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 아닐 겁니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에 오히려 법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더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 대장동 개발 사건에도 고위 법조인들이 상당수 연루되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앎의 양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삶을 우리는 삽니다. 따라서 앎의 근본에 대해서는 평소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주어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들어서 아는 게 정말 많습니다. 저에게는 여동생들이 둘입니다. 서울에서 삽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가끔 얼굴을 봤지만, 이제는 전화 통화만 가끔 합니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함께 지냈기에 서로 통하는 정서가 많습니다. 동생들과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재미있는 거지요. 학력이 높지 않은 평범한 60대 여성들인데도 대화하다 보면 아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화, 예술, 과학,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현상 등등을 알만큼은 압니다. 여러분들도 아는 게 많을 겁니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라서 의학이나 물리학이나 철학 같은 전문분야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식과 정보를 근거로 해서 지혜롭게 사는 건 좋습니다. 문제는 어떤 정보나 가르침을 들어서 안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로 앎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앎의 도구화로 인해서 알면 알수록 더 교만해지고, 그걸 이용해서 자기 잇속을 챙길 수 있습니다. 아는 게 많은 사람이 더 위선적이고 악하다는 게 아니라 많이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삶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게 많습니다. 교회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법도 잘 압니다. 목사들은 이런 분야에서 전문가들입니다. 늘 성경공부를 지도하고 설교하니까 아는 게 오죽 많겠습니까. 자기가 아는 내용을 성실하게 가르치면서 평신도 지도자나 목사 역할을 감당하는 건 좋습니다. 그렇게 들어서 안다고 해서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는 게 아닙니다. 욥이 고백했듯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이고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는 자이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는 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저 “귀로 듣기만” 한 사람입니다. 욥과 그 친구들이 온갖 미사여구와 논리로 하나님을 말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기독교 의식이 세례입니다. 세례로 시작하는 기독교인의 삶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전혀 새롭게 살지 않습니다.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지 못합니다. 약간만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듣거나 낮춤을 당하며 화가 나서 못 견딥니다. 우리가 세례받았다는 증거가 실제 삶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일반적인 예를 하나 더 들면 죽음입니다. 누구나 곧 죽는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듯이 태평스럽게 삽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내용을 안다 해도, 아무리 많은 처세술과 교육 방법론을 알고 말한다 해도, 귀로 듣는 수준에서 산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수준에서는 삶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서 보듯이 말만 많고 깊은 깨달음은 없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저 잘난 맛’에 사는 겁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믿는다면 그런 삶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소꿉놀이하면서 싸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인생을 다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과 안식과 평화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매일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 성숙의 길입니다. 그런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은 도반입니다.
그 새로운 차원의 삶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앞의 들음을 풍문(風聞)이라고 한다면 여기 봄은 한자로 볼 견(見), 또는 볼 관(觀)입니다. ‘들음’은 앎이 도구에 떨어지는 차원이라면 ‘봄’은 앎이 삶의 실체가 되는 차원입니다. 선승 불교 전통에서는 이런 봄의 차원을 별안간 깨닫는다는 뜻의 돈오(頓悟)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나무 숲에서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거나 지붕의 기왓장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에 우주와 자기의 존재론적 신비를 깨닫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신구약 성경에도 그런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 경험을 계기로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간 겁니다. 시인들도 시마(詩魔)가 떠나면 시를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혹시 이런 말들이 허황하게 들리시는지요?
옛날부터 사람들은 구름을 보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구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구름 모양은 일정하지 않고, 순간마다 바뀝니다. 구름을 재미있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자기 삶을 구름과 같다고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닫는 사람은 자기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구름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사라지기에 그런 인생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세속 권력과 건강과 미모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곧 티끌과 재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엄정한 사실을 아는 데도 거기에 연연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사실을 ‘봄’이 아니라 ‘들음’의 차원에서만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봄의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들음에서 봄으로 회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세상살이와 기독교 신앙에서 대충 알만한 것은 다 아는 데도 왜 회개하지 못할까요?
이유가 어디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각자 그런 문제의식을 안고 살다 보면 답을 얻는 사람도 있고, 또는 얻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긴 합니다.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는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죽어야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그제야 절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죽기 전에 회개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을 풍문으로 듣는 데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실체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을 향한 열망이고 영생을 향한 열망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하나님을 본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욥의 경험과 같습니다. 한 사람은 요한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과 제자 빌립의 대화를 전합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6)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실체로 믿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리킵니다. 그냥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이와 비슷한 뜻의 문장은 신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이런 문장이 가리키는 것은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을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본질은 곧 생명입니다. 참된 안식과 자유와 평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 둘러싸여서 삽니다. 그 세력은 자기를 염려하게 만들고, 죽음을 두렵게 합니다. 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 치우치게 하는 세력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물질적으로 더 넉넉하게 살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평생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살든지, 아니면 현재를 즐기는 데만 몰두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로 인해서 종교적인 율법 수행에 매달립니다. 생명이 풍요로워지는 길과는 거리가 먼 길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며,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 경험이 무엇인지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상에서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그리고 실질적으로(real) 경험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도 그 배고픔에서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몸살이 나도 살아있음은 분명합니다. 고독해도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삶이 충만해지고 세상이 환해집니다. 노숙자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 깊어지려면 우주와 지구의 생명 현상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소한 일들과 자기가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욥처럼 ‘듣는’ 정도가 아니라 눈으로 ‘본다’라고 말할 정도로 경험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자신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저 목사는 살아있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안 계시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운명 안에서 우리는 지금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사실을 듣지만 말고, 보는 데까지 밀고 나아가십시오.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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