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창조절 둘째 주일, 2014년 9월14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설교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겠지요? 베드로는 아주 넉넉하게 숫자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세 번까지 용서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눅 17: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는 숫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동의를 얻겠다는 생각으로 일곱 번 정도 용서해주면 되겠지요, 하고 물은 겁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22절에서 예상외의 답변을 하셨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여기서 용서의 숫자는 대폭 늘어났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한다면 490번이나 됩니다. 사백 구십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요.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해도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이를 악물고 따라야만 할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막무가내고 제자들을 다그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는 마태복음 기자가 속한 초기 기독교의 어떤 특별한 사정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사정을 따라가면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예수님이 경구에 이어서 하나의 비유를 듭니다. 이 비유는 복음서 중에서 여기만 나오는 특수 자료입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는 말로 비유가 시작됩니다. 내용이 흥미진진합니다. 임금은 자기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채무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채무자는 어떤 대형 금융 사건에 휘말려 임금에게 천문학적 금액의 재정적인 손해를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로 이미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오천만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당입니다. 당시 헤롯 정권의 일년 예산이 9백 달란트였고, 갈릴리와 뵈레아 지역의 세금 총액도 2백 달란트에 불과했다는 걸 감안하면 일만 달란트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 큰 나라의 일 년 예산에 맞먹는 금액입니다. 임금은 종과 그 가족 모두를 팔아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엎드려 절하면서 언젠가 갚을 테니 참아달라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임금은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석방시켜주면서 빚 자체를 탕감해주었습니다. 이 종은 이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 빚을 갚으라고 다그쳤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해 오십만 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참아달라는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붙들어 책임을 물은 뒤 감옥에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35절에서 다음과 같이 내리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니라.
오늘 설교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둘째 단락은 예수님의 비유, 셋째 단락은 비유의 결론입니다. 세 단락이 용서를 주제로 해서 다 연결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나 느낌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용서가 정말 중요하구나, 그리고 용서도 형식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해야 하겠구나, 하는 느낌과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옳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용서를 기독교인의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쳤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당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주기도의 한 대목에서도 이런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초기 한국교회사에 등장하는 손양원(1902-1950) 목사 이야기는 전설과 같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은 탓인지 기독교인들은 용서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자주 말하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봐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특히 기독교인 아내들이 믿지 않는 남편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용서가 잘 안 되면 이를 악물고 일곱 번을 채워야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용서가 되든가요? 인간의 본성으로는 일단 용서가 잘 안 됩니다. 기분 나쁜 말만 들어도 화가 치밀거나 속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빠집니다.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그 사람을 봅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뻔뻔한 사람입니다. 인간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대충 비슷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 깊은 곳에 상처로 남습니다. 그게 반복되면 병이 됩니다. 이런 일들이 마태복음 기자가 속한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변으로부터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했습니다. 신앙 문제로 인해서 직장을 잃기도 하고,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박해를 당하기도 하거나 때로는 순교까지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신앙 자체를 포기하거나 기독교인다운 삶의 태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내가 왜 이렇게 당하고 살아.’ 하면서 악에 바친 신자들도 나왔습니다. 이런 반응은 인간에게 본성적인 거라서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심리학에서도 중요합니다. 어릴 때 반복적으로 폭력에 노출되면 자라면서 가학적인 사람이 되거나, 거꾸로 자학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폭력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당할 수도 있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신적인 폭력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시대정신이 폭력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몇 달 전 유튜브를 통해서 독일 티브이 방송국(ORF2)에서 방영된 <Die Schulsklaven>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일이 있습니다. 그 제목의 뜻은 ‘학생노예들’입니다. 초등학생들의 군대체험과 서울의 한 여고생의 수능준비 과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독일 사람들의 눈에 우리 초등학생들과 청소년들의 생활은 노예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이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리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청소년들의 정신은 장애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청소년들도 아주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어른이 되어도 심리상태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계층과 계층의 반목, 세대와 세대의 불신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 공동체 해체의 조짐까지 있습니다. 노예처럼 공격받았으니 언젠가는 공격의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참아라, 용서해라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강요는 오히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듭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의 윤리가 그렇게 오용되기도 했습니다. 용서할 마음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는데 예수 믿는다는 명분 하나로 꾹 참고 지내면 더 큰 병이 들 뿐입니다. 영혼 속에 내재된 상처를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전범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책임의 크기에 따라서 사형을 받은 사람도 있고, 무기 징역형에 처해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 재판을 피한 사람을 최근에 체포해서 다시 재판에 부친 일도 있습니다. 이건 사회적인 앙갚음의 과정, 즉 힐링의 과정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음에 쌓인 원한이 씻기고, 상처가 치료됩니다. 지난 4월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비슷합니다. 그분들에게 이걸 다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이제 그만 일상생활로 돌아가라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생긴 트라우마를 씻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일종의 씻김굿이 그것입니다.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제가 말할 입장은 아니나,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참된 의미에서의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심리학적이거나 사회과학적인 힐링과 용서의 프로그램보다는 성경이 말하는 더 근원적인 길을 전해야 합니다. 성경의 길은 사회과학이 말하는 길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한계를 넘어섭니다. 일백 데나리온을 손해 본 사람에게 보상해주고, 심리적으로 위로해주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살아가면서 또 일백 데나리온을 손해 보는 일을 만날 것이며, 또 그런 일로 분노할 것이고, 다시 보상과 심리적 치유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발상 자체를 전환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일만 달란트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2천 년 전 마태복음 독자들은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이 바로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을 겁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와 같습니다. 이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백 데나리온으로 얽히고설키는 세상살이에서도 용서의 영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지지만, 배신과 폭력에 시달린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미워지는 거와 같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해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은 존재론적인 해방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어서 백 데나리온으로 그의 영혼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세상과의 참된 화해가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그들 교회가 처한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공격받고 미움 받아서 시험에 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맞받아치려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겁니다. 사랑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앙갚음 하려는 마음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들을 향해서 마태는 우리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영혼에 견지해야만 새 힘을 얻어서 영혼의 근본적인 치유가 가능하고, 그럴 때만 참된 용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저는 마태복음 기자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람에 따라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다는 사실이 별로 실감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 사실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아도 막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탕감 받을 게 없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잘못은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하는 거니 대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만 느끼고 사는 건 잘못입니다. 일만 달란트 이야기는 심리적인 죄책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에 대한 직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전히 빚을 지고 삽니다. 모든 걸 공짜로 받았습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태양을 보십시오. 태양을 하나 만들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요? 일만 달란트의 수천 배가 있어도 안 됩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극히 일부만 지구에 오는데, 그것이 지구의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입니다. 놀랍지요. 늘 태양이 뜨고 지면서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그걸 누리는 게 당연하다거나, 태양은 자연현상이니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거는 아니라거나, 또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큰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도 똑같이 혜택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 빚을 진 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불신앙입니다. 여기서 영성의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일만 달란트로 느낄 수도 있고, 백 데나리온 정도로 느낄 수도 있고, 아무런 느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삶을 더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태양만 보더라도 우리는 무한한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을 생각한다면 일만 달란트가 아니라 수조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일곱 번을 용서할 것인지, 사백구십 번을 용서할 것인지, 또는 무한정으로 용서할 것인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용서의 영성을 숫자로 계량화하면 율법이 되고 맙니다. 본문은 형제용서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짚음으로써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마태복음 기자의 가르침에 대해서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풀어야 할 질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당사자 앞에서 가서 미안하다, 용서한다, 말하고 친하게 지내야만 실제로 용서한 것이 될까요? 이 질문을 저 자신에게 직접 해보았습니다. 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좀 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기억이 납니다. 그분들이 반드시 악해서가 아니라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아서도 그런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저는 지금 그분들을 미워하지 않고 다 이해하지만 서로 만나서 재미있게 지내기는 힘들다는 게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분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억지로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선일 수도 있고,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내 인생살이에서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영성이 여전히 미숙한 증거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걸려 넘어지지 않고, 그들은 그들대로 살면 되고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마태가 말하는 용서의 영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는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저는 오늘 설교 본문을 읽으면서 마치 마태복음 기자가 속했던 초기 교회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당해 실족한 믿음 어린 신자들에게 마태복음 기자가 따뜻하지만 준엄한 충고를 한 겁니다. 그의 충고는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백 데나리온에 얽힌 일은 그만 봅시다. 그런 건 때로 손해 봐도 됩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집중합시다. 그럴 때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용서가 가능하고, 또한 여러분의 영혼이 생명을 얻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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