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롬 1:1-7), 12월19일, 대림절 넷째 주일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인 롬 1:1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택함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바울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표현은 자신이 복음 전도자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별로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복음’(유앙겔리온 데우)을 전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세 번째 요소가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이유도, 또한 로마를 방문하고 싶다고 한 이유도 결국 복음을 전하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로마서 전체의 주제도 복음에 대한 해명입니다.
‘유앙겔리온’, 즉 복음은 무엇인가요? 사전적인 의미는 ‘좋은 소식’(good news)이라는 뜻입니다. 대학시험을 본 학생들에게는 합격 통지서가 좋은 소식이겠지요. 몸이 크게 나빠져서 건강진단을 받은 사람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이 좋은 소식입니다. 성서는 그런 것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처음에만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할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월과 더불어서 시들해지는 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복음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복음입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겠다는 약속이 복음입니다. 이 말이 복잡하게 들리나요?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유앙겔리온은 하나님의 임재(parusia)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복음인 이유는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구원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자는 메시아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유대인들은 왜 그런 약속에 매달렸을까요? 메시아는 왔을까요, 아니면 아직도 안 왔을까요? 이런 질문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메시아를 생각할 정도로 세상살이가 한가롭지 못하다는 관점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게 바쁘기 때문에 메시아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배부른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메시아를 기다리기보다는 사람이 직접 나서서 세상을 고치는 게 더 현명하다는 관점입니다. 이 세상의 일은 우리 인간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성실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할 일이 없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완성되기를 절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바로 메시아 대망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세상과 삶이 도저히 완성될 수 없습니다. 구원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걸 유대인들은 역사에서 충분하게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세상과 역사라는 거창한 차원은 접어두고 우리 개인의 일상만 놓고 볼 때도 이것은 옳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인격이나 정신 상태를 이룰 수 없을 겁니다. 궁극적인 평화와 기쁨도 우리에게서 거리가 멉니다. 마음을 갈고 닦는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성을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넉넉하면 삶이 풍요로울 것처럼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추구하던 모든 것들은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에, 혹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시시한 것들이 되고 맙니다. 인간으로부터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가 오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은 옳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 예수님은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바울은 3절부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본성을 설명합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설명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육신의 차원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예수님이 육체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마 1:6) 족보 끝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자 예수의 아버지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면 분명히 요셉의 아들인데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요셉이라는 말을 굳이 피하고 마리아를 내세운 이유는 예수님의 출생설화에 놓여 있습니다. 그 설화에 따르면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한 채 성령으로 예수님을 임신했습니다. 요셉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겁니다. 동정녀 사건입니다. 많은 이들은 동정녀 사건이 예수님의 신성을 담보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는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동정녀 사건을 담보합니다. 그 신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제일 먼저 기독교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고, 동정녀 사건은 이 교리를 뒤따라 나오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약간 복잡하게 들릴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역사의 긴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 복잡한 역사 과정을 생략하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독단이 되고 맙니다. 고단하더라도 우리는 그 속사정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도 깊어질 수 있고,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정당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올바른 판단 능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기서 핵심은 예수님의 육신에 대한 강조입니다. 동정녀 사건도 그렇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다윗의 혈통’도 그렇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하는 사도신경의 한 구절이 말하려는 것은 예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초기 기독교에 나타난 이단 중의 하나가 영지주의적인 가현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신을 부정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추한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실제 몸이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교부들은 이 가현설을 배격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몸으로 사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육신으로 사신 예수님은 당연히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를 ‘카타 사르카’라고 했습니다. 사르카는 사르크스의 격변형입니다. 사르크스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단백질로 된 이 육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체로 세상에 오셨고, 그렇게 사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중요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벌인 심각한 신학논쟁의 역사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당시의 가장 치열한 신학논쟁이었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정체성이 처음부터 완성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투쟁의 결과입니다. 진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명제 중의 하나가 “vere homo, vere Deus”(참 인간, 참 하나님)입니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하나님이라는 게 아니라 온전히 인간이며 온전히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두 속성이 적당하게 혼합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속성이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물리적 실험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본질의 신비입니다. 특히 ‘참 인간’이라는 요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참 하나님이라는 점은 잘 알아듣는데, 참 인간이라는 점은 못 알아듣습니다. 영지주의적인 가현설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성이 참 인간이라는 말은 ‘카타 사르카’ 우리와 똑같다는 뜻입니다. 이걸 부정하면 이단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본성을 설명하는 또 하나는 영적인 차원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합니다.(롬 1:4) 여기서 ‘성결의 영으로는’이라는 표현은 앞에 나온 ‘육신으로는’과 대비됩니다. ‘카타 프뉴마 하기오수네스’라는 헬라어입니다. 각각 ‘카타’(따라서)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다윗의 후손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부활의 능력과 연결됩니다. 부활로 인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호모우시오스’라는 신학용어로 고백했습니다.
위에서 예수님의 두 가지 본질을 바울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카타 사르키)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으며, 영적으로(카타 프뉴마) 부활의 실체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참된 사람이며, 다른 한편으로 참된 하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두 본성을 지닌 분이십니다.
그는 주다
이 두 본성이 우리의 신앙, 또는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도입부에서 이렇게 까다로운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그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 두 본성을 지닌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롬 1:4b) 이 표현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관용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주’는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붙여진 타이틀입니다. 당시 황제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의 대리자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을 ‘퀴리오스’, 즉 주로 믿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황제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정치권력, 경제권력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그런 시대정신을 거부합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고, 영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믿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중요합니다. 이는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살았던 역사적 실존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 역사적 인물인 예수가 바로 우리의 주이며, 우리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오늘 어떤 이들은 다중 그리스도를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민중해방을 부르짖는 이가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전태일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자는 좋은 뜻이긴 하지만 이런 다중 그리스도론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신성이 부정되고 인간적 실존만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강조한 영지주의를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신성을 부정하고 인간성만 강조한 에비온주의도 거부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런 논쟁과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리는 성탄절을 바로 앞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를 주목하십시오. 그는 육신으로 우리 사람과 동일하고,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나이십니다. 그만이 우리 사람의 위치로 내려오신 하나님이고, 그만이 하나님으로 들림 받은 사람입니다. 그만이 우리의 고통을 그대로 아시고, 그만이 부활 생명의 능력이 있으십니다. 바울은 그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그에게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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