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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주현절 둘째 주일, 2014년 1월19일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고, 또 직책에 따른 호칭도 있습니다. 한 사람인데도 여러 호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사로, 신학대학에서는 교수로, 집에서는 남편이나 아버지로 불립니다. 호칭은 그 사람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한낱 몸짓에 불과했던 대상을 꽃이라고 불러주자 자기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께도 여러 칭호가 있습니다. 일단 ‘예수’는 고유명사로 그의 실제 이름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그를 ‘예수!’라고 불렀겠지요. 동생들은 형님이나 오빠라고 불렀을 겁니다. 제자들은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다양해졌습니다. 신약성서에는 55개나 되는 호칭이 나옵니다. 그중에 몇 가지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자, 재림주, 그리스도, 다윗의 후손, 주(퀴리오스) ... 등등입니다.


오늘 제2독서인 고전 1:1-9절에도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1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2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3절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6절에는 그리스도, 7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8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9절에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칭호가 나옵니다. 반복되는 칭호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세 가지 칭호는 거의 한 묶음으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인 2, 3, 7, 8, 9절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칭호를 통해서 예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경험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는 고유명사이니 접어두고 주와 그리스도만 살펴봅시다.


1) ‘주’는 헬라어 퀴리오스의 번역입니다. 우리가 보통 ‘주님’이라고 할 때의 그 주(主)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경건한 유대인들이 입에 담기 힘들어했던 하나님 명칭인 ‘야웨’를 바꿔 부르기 위해서 사용된 겁니다. 이 칭호는 초기 기독교에서 두 가지 시각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은 이 주 칭호를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분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헬라 전통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교회와 세계를, 더 나가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양쪽 모두 정치와 경제 권력의 최정상에 서 있는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부활 승천하시고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와 근동까지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로마 황제와 그 권력 집단들이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가소롭게 생각했겠지요.


2)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 칭호는 원래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왕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세계를 지배할 왕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왕권은 평화와 정의로 실행되어야만 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해설>에서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메시아 칭호는 하나님 통치인 최후 심판을 위해서 재림할 예수가 미래에 갖게 될 기능의 특징을 가리켰다. 따라서 이 칭호는 부활한 주의 현재적 현실성과 관련되었다. 이 부활한 주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미 현재의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최후 심판자라고 믿었고, 그것에 근거해서 비밀한 방식으로 오늘의 진정한 통치자라고 믿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미래와 현재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바울은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의례적인 인사로 시작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바울은 그들을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4, 5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던 교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만 확인 해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예찬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전 13장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텍스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겁니다. 12장에서는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14장에서는 방언에 대해서, 15장에서는 부활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전 12-15장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셈입니다. 신자들끼리 몇몇 문제로 다투기도 하고 열광주의 흔적을 나타내는 등, 문제가 없지는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고린도교회는 요즘 식으로 말해서 꾸준히 성장하는, 아주 잘나가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바울은, 그리고 자칫 그런 것으로 신앙이 왜곡될 것을 염려한 바울은 신앙의 더 근본적인 차원을 고린도전서 앞부분에서 짚었습니다. 7b, 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예수님에 대한 똑같은 칭호가 여기서 반복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뜻인지는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통치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온갖 불행이 우리와 주변에서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웁니다.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불의가 득세하는 듯이 보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괴롭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평화를 잃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불치병이나 큰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교회를 아무리 개혁적으로 꾸려간다고 해도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다툼이 있고 불안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지금 여기에 실증적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를 가리켜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생명이 완성될 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기다린다고 했고, 8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견고히 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그 날을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신앙적으로 각오를 다져도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왕좌왕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가 어느 사이에 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회로를 선택합니다. 열광적인 신앙의 세계로 빠져들거나 기복주의에 빠져듭니다. 단순하게는 교회성장에 매달립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인 자기성취에 매달립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뭔가 구원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지만 신앙이 꾸준하게 성장하지는 못합니다. 교회생활의 노하우는 늘지만 영성은 깊어지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로도 시험에 빠지곤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우회로들은 구원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 즉 생명은 엑스트라 노스(extra nos), 즉 자기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거지 자기 안에서 찾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아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적으로 의존하는 겁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런 포즈를 취하겠지만 그게 실제로는 자기에 대한 열망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대립했던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헌신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었지만 그게 결국은 자기의 종교적 업적이었던 것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그때까지 흔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본적으로 말하면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는 8절 말씀이 그걸 가리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붙들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에는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노력이 다 담겨 있습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샘터교회를 찾아오신 거는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동시에 여러분의 생각과 결단이 다 포함된 겁니다. 하나님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을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은 ‘흔들리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흔들리지 않는 길을 제시합니다. 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마틴 루터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분이시기에 당신들을 부르시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과 친교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바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그분이 나타나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바른 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친교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번역입니다. 일치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현대 영어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떤 번역이든지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열망이 강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오히려 느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벗어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무리 벗어나라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먼저입니다. 일단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 염려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기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라는 말은 막연합니다.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교우들과의 친교도 서툰 마당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늘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그런 말이 친교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도취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떻게 보면 설교자로서 무책임할지 모르나, 여기서 여러분에게 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이르는 답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답은 목사인 제가 아니라 성령만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성령의 소리를 듣고 거기에 반응해야만 합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마음이 더 무거워지거나 신앙의 세계가 더 모호해진 분이 계신가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정답은 아니나 틀린 답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저는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40년 이상 신학의 세계에서만 살았습니다. 어설픈 상태에 머물러 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기독교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기독교 자체를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르쳤고, 가르치면서 또 배웠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기독교 신앙의 세계가 보였고, 보이는 만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이르는 길은 ‘배움’이 최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공부 말입니다.


기독교 신자로 사는 것은 영적인 시인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인이 되려면 배워야 합니다. 좋은 시를 많이 외워야 합니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합니다. 준비가 되면 그 시인은 언어로부터 어떤 것을 듣습니다. 언어와 친교를 맺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배워 알아야만 그와의 친교가 가능합니다. 그런 앎의 과정이 성령의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상과 세상살이의 요령에 대해서만 많이 알면 그는 그런 것들과 친교를 나누게 되지 예수 그리스도와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기회 얻는 대로 배우십시오.


기독교 신앙에서 배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예배가 가장 중요한 배움의 자리입니다. 거기서 말씀이 읽히고, 선포되고, 세례와 성찬이 베풀어지고, 기독교 영성이 담긴 찬송이 불립니다. 여기서 배움은 단지 예배 순서를 잘 익히고 설교를 잘 알아듣는다는 게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전달되는 궁극적인 생명 세계와 조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기적인 예배 참석은 아주 중요한 배움의 자리에 들어서는 겁니다. 좋은 기독교 서적을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신자들끼리의 신앙적인 대화도 보탬이 됩니다. 이런 일에 시간을 내기가 힘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사실은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겠지만요. 그래도 살아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나름으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즉 생명 완성의 날에 대한 기다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생명이, 존재가, 사랑이, 구원이, 시간이, 그리고 죽음의 비밀까지 모든 것이 빛처럼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reality)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1-9
https://youtu.be/draDRjII3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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