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0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BGgFc0bazxs?si=0HKumiXhsvFt9lpv
▣ 들어가는 말
-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
당대 최고의 문헌학자 ‘리츨’에게 “천재란 이런 것이다.” “모든 젊은 학도의 우상이다.” “문헌학의 미래다” 극찬을 받던 천재 중의 천재, 20대 대학생 시절에 이미 종신 교수직을 제안받았던 이, 바로 니체입니다. 그는 『우상의 황혼』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참된 세계,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는 플라톤 철학을 비판합니다. ‘참된 세계’라는 것은 인간이 현실의 삶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우상이라는 것이지요. 아울러 “기독교는 생에 반하는 도덕이다. 이 도덕은 우울한 자, 실패한 자, 약한 자가 만든 도덕이다.” 기독교가 고통을 미덕으로, 금욕을 덕으로,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죽음 이후의 천국만을 기대한다며, 이러한 태도는 생명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보라,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위버멘쉬일 때만 온전한 인간이다.”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을 얽매고 있는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진정한 자유인, ‘위버멘시’로 살고자 했던 니체… 그러나 불행히도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 거리에서 유명한 “마부의 말 사건”이 일어나지요.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고 울면서 쓰러지고 맙니다. 이후 11년간 말을 거의 못 하고, 어머니와 누이의 보호 아래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채 무기력한 상태로 살다 1900년에 사망합니다.
그를 향해 미셸 푸코는 말합니다. “니체는 철학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곧 그를 파괴시켰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의 가장 끝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초인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니체의 무너짐에 대한 해석은 의학적, 심리적, 철학적으로 다양합니다. 제 나름대로 신학적으로 이해해 본다면, 자유와 억압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신이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신이 되어 살고자 했던 인간 불굴의 의지였을까요. 니체의 위대한 초인의 이상은 연약한 인간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마치 신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증언한 예언자 같습니다.
-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 20:3~4) 십계명의 첫 구절입니다. 성경의 제일 계명이지요. 신께서 인간을 향해 세운 첫 번째 원칙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성경의 가르침은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유일신 사상이지요. 그런데, “다른 신”은 대체 무엇일까요?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을 두지 말라는 명령이 어떻게 성경 제일의 원칙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성경 전체가 이 다른 신에 대한 투쟁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과 세계, 삶을 파괴하는 온갖 다른 신들 즉, 우상과의 치열한 싸움의 기록인 것이지요. 성경이 말하는 세계는 온통 우상으로 가득 찬 세계인 것 같습니다. 만신전의 세계이지요. 그렇다면, 니체는 바로 그런 세계의 실체, 실상을 꿰뚫어 본 예언자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형이상학, 전통 도덕, 그리고 심지어 종교(기독교)조차 모두 인간이 만든 억압적인 체계,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우상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거짓말을 믿어왔다. 이젠 망치를 들고 그 우상들을 시험할 때다.”(『우상의 황혼』)
“기독교는 삶을 부정하는 종교이며, 인간을 죄책감으로 얽매는 우상 체계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선언합니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은 단순한 무신론적 선언이 아닙니다. 그가 죽이고자 한 것은 이미 죽어 있는, 살아 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개념’ ‘우상’입니다. 니체에게 우상이란,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고 삶을 포기하게 하며 자기 존재를 억누르게 만드는 허위의 절대 가치들입니다. 그는 그것들을 망치로 깨부수고, 인간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 위버멘시(초인)는 자기 존재를 긍정하며 앞에 있는 모든 우상을 깨뜨리며 살아가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 우상이란 무엇인가?
-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라
오늘 본문 출애굽기 32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시내산 아래에 머물러있는 상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십계명)를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갔지만, 40일간 내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불확실성과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백성은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요구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물이 피가 되며, 마른하늘에 우박이 쏟아지는… 눈앞에서 그 놀라운 신의 기적들을 경험한 자들이 불과 40일을 견디지 못하고 ‘신을 만들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인간은 불안정, 불확실, 불안을 견디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일지 모릅니다. 인간은 지독스럽게 연약하고 겁많은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백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신을 요구합니다. 결국, 우상은 하나님의 부재에서 오는 공포와 불안을 메우려는 인간의 시도인 것이지요.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여기서 우상이 단지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지요.
우상은 인간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자기 손의 산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부재(또는 침묵)에 견디지 못하고, 대체물을 만들어 그것에 절대성을 부여합니다. 우상은 단지 물리적 형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인간의 욕망, 성공, 안전, 자식, 심지어 종교 자체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야말로 가장 무서운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목적을 위하여 내가 이용하는 신이나, 나의 체험 혹은 나의 이해의 범주에 편안히 잘 맞는 신은 나보다 더 크지도 않고, 나를 죄에서부터 구원하거나, 나의 삶, 나의 예배에 영감을 불어넣거나, 가슴 벅찬 삶을 살게 하거나, 자신의 한계 너머로 성장, 성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나의 프레임, 나의 형상, 내 입맛에 맞는 어떤 신도 결코 나를 초월하지 못하고 진정한 하나님이 되지도 못합니다. 나의 인식, 나의 경험이라는 감옥 창살을 걷어차고 나가지 않는 신은 하찮은 신, 우상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의 역할을 한다.” 존 칼빈의 말입니다. 우상은 단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속 깊은 욕망과 결핍이 만들어낸 투사 물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인식과 경험을 완전히 압도하고, 우리의 존재를 두렵고 떨리게 하며, 그저 침묵하게 하고, 경탄하게 하며,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하며, 경외하게 하는, 전 존재를 내맡기게 하는, 무릎 꿇게 하는 분만이 진정한 신이 아닐까요.
- 강도의 소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전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의, 우상 숭배,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성전 자체를 우상화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지만, 하나님 없는 성전은 하나님의 껍데기일 뿐입니다. 반복되는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은, 마치 주문처럼 신성한 건물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미신적 태도를 나타냅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렘 7:5~6) 하나님은 공의, 약자 보호, 무죄한 자의 피 흘림 금지, 우상 숭배 금지를 요구하십니다. 진정한 예배와 제사, 종교적 형식은 그 형식에 걸맞은 내용, 도덕적 삶과 정의로운 공동체를 동반해야 합니다. 형식을 형식되게 하는 것은 내용입니다. 삶의 내용이 빠진 형식은 아무리 거룩하게 보이더라도 우상에 불과합니다. 위의 내용은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하나님 없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담보하지 못하는 삶이, 예배라는 형식 안에 신의 존재를 담을 수는 없지요.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렘 7:9~10) 성전을 자기 죄를 정당화하는 피난처, 즉 ‘면죄부’처럼 여긴 백성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예수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에,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마 21:13) 통렬히 비판하셨지요.
형식은 있으나 본질이 없는 신앙, 거룩함 없는 예배, 회개 없는 제사는 우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상은 단지 목상(나무 우상), 금상(金像)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성전조차도 하나님 없는 곳이 될 수 있으며, 종교는 언제든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말합니다. “우상은 궁극적이지 않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는 행위다.” 즉, 하나님만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다른 것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낱말 속에는 밥이며, 신발, 양말, 옷, 이불, 잠자리, 납부금, 담배, 우산… 그런 물건이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물건에서 그것들 모두를 빼버리고 남는 게 자기였다. 모든 것을 드러낸 다음까지, 덩그렇게 남는 의심할 수 없는 마지막 것.”(최인훈, 『광장』) 이것이야말로 허상 아닐까요? 밥과 신발, 잠자리…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기’가 존재할까요? 일상에서 신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이 없는, 일상의 삶과는 완전히 분리된 ‘저 먼 곳’ 천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영혼, 신앙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추한 이생의 삶을 너머 고결한 저생의 삶이 존재할까요.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깨뜨려야 할 우상 아닐까요.
▣ 왜 우상을 섬기는가?
- 존재의 결핍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 자체(Itself of Being), 즉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존재의 근거, 존재 자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의 은총으로 존재하는 자”이고, 따라서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실현하고 유지할 수 있는 자이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재 자체’를 향한 근원적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당신을 향해 창조하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갈망이 쾌락, 권력, 소유를 향하는 것 같아도 그 뿌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곧 존재 자체에 대한 갈망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을 잘못된 대상에 투사할 때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를 잊어버리고 살 때,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면, “존재 망각”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틸리히식으로 표현하면 “비존재의 위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비존재의 위협은 “불안” “무의미” “죽음의식” “죄책감” 등으로 드러납니다. 즉, 인간은 어느 순간 이렇게 느낍니다. “나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 “삶은 왜 이리도 쓸쓸하고 고독한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나는 왜 살아야 할까?”… 이러한 자각이 바로 비존재성(죄성)을 직감하는 순간입니다. 존재 자체가 아니라, 비존재에 터하고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각을 끝까지 밀어붙여 진실에 도달하기보다는, 온갖 우상을 만들어 불안에서 도피하고,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 우상은 인간을 왜곡하고 파괴한다
우상은 단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이거나, 신의 존엄을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은 무엇보다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5편 8절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이 비인격적이듯, 우상을 섬기는 자도 점점 비인격적이 됩니다.
우상을 만든 인간은 마음대로 우상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그 우상이 인간을 지배하게 됩니다. 돈을 우상화한 사람은 돈이 그 사람의 가치와 존재 이유가 되지요. 돈이 사라지면 자신마저 무너지고 맙니다. 우상은 무엇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듭니다.
또한, 우상은 ‘진정한 자아’를 가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참된 자아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상은 ‘너는 너의 성공, 외모, 성취가 곧 너다’라고 속이며 인간을 왜곡된 정체성에 묶어둡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 깊은 불안, 열등감, 공허감에 시달리게 되지요. 아울러, 우상은 ‘끝없는 결핍과 탐욕’을 낳습니다. 우상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우상은 마치 터진 항아리처럼 인간을 끝없는 결핍 상태에 두고 영혼을 소모 시키고 고갈시킵니다.
현대인에게 우상은 종교적 형식보다는, 성공, SNS상의 인정, 외모, 소비, 국가주의, 심지어 ‘나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런 우상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우상은 신의 자리를 차지하여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근원(하나님)을 잊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본질을 잃고 스스로 소진하며, 참된 자유와 존재의 기쁨에서 멀어지게 되지요.
▣ 나가는 말
- 우상의 세계 속에서 산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우상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돈, 성공, 기술, 명성, 이념, 외모, 전통…, 과학, 기술, 첨단기술, 자연… 심지어 자존감이나, 내면적 평화, 종교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우상의 핵심 개념은 인간을 종속시킨다는 것, 인간을 왜곡하고, 진정한 삶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여러 신 가운데, 오직 여호와라는 신만을 섬기고, 다른 신들은 모두 멀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존재 자체로서의 신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 ‘죽은 신의 개념’ ‘우상’을 깨뜨리리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그는 반기독교적 전사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와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우상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고, 예레미야 7장은 ‘하나님을 입에 올리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위선’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두 본문은 모두 말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반드시 우상을 만든다.” 하지만 그 우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우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상을 깨뜨릴 수 있는 망치가 없습니다. 그럴 힘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와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 하나님만 섬긴다.
우상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이란 인간 실존의 전 존재를 궁극적인 것에 맡기는 행위이다.” 성서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하나님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우상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비존재를 거부하고 오로지 존재를 향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지요. 믿음의 망치를 들고서 단호하게 우리 앞에 있는 헛된 우상을 깨뜨리며 위버멘시가 되어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우리 삶의 의미의 근원을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께 두고, 나의 존재를 그분 앞에 드러내며, 다시 말해 나의 삶을 끊임없이 ‘존재’에 비추어보며, 이 우상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비존재, 우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에 기대지 말고, 존재에 기대며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라.”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란 나 자신의 무(無)를 직면하면서도, 존재 자체의 은총 안에서 내가 받아들여졌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면서도 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이며,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응답입니다. 우리가 비존재의 힘, 허무와 절망과 무의미와 온갖 헛된 우상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믿음의 용기입니다.
주님, 나의 존재는 흔들리고, 나의 마음은 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우상을 만들고, 존재가 아닌 것들에 나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존재 자체이신 당신 앞에 나아갑니다.
말씀이신 예수여, 내 안에 빛이 되어 주소서.
죽음이 아닌 생명을, 허무가 아닌 진리를, 비존재가 아닌 참된 존재를 주옵소서.
나를 회복하소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오직 주 안에서 존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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