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2016년 6월5일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지난 5월29일 제3독서인 눅 7:1-10절 이야기와 오늘 제3독서인 눅 7:11-17절 이야기는 비슷합니다. 앞의 이야기는 백부장의 종을 예수님이 고치신 것이고, 오늘 이야기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예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 다른 점도 있습니다. 백부장의 종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백부장의 믿음이 높이 평가된 반면에 과부의 아들 이야기에서는 과부의 믿음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두 이야기는 똑같이 예수님이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다는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울지 말라.”
예수님 일행이 나인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나인은 갈릴리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도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마을을 빠져나오는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그 장면이 어떤지 머리에 그려집니다. 본문 12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이 장면을 영화처럼 상상해보십시오. 마을에서 빠져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 행렬이 교차되는 장면입니다. 감독이라면 누구에게 카메라 앵글을 맞출까요? 예수님이 주인공이지만 과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이 여자는 상복을 입고 처연한 모습으로 상여를 뒤따르고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의 아들을 둔 여자라면 나이가 마흔 살은 채 안 되었을 겁니다. 이름도 없이 과부로 불리는 이 여자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여자는 오늘만이 아니라 언제인지 모르나 남편의 상여를 따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자금 상여에 누워있는 외아들이 상주 역할을 했을 겁니다. 과부의 몸으로 아들을 키웠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과부로서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구약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을 자주합니다. 본인들 혼자서 생존하기 어려우니 이웃들이 돌봐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여자는 아들에게 희망을 걸고 자신의 운명을 버텼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으로 자기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례가 끝나면 자기도 아들을 따라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상여를 따라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마주 오는 행렬이 눈에 뜨입니다. 상여가 지나갈 수 있도록 그쪽 행렬이 길을 비켜줍니다. 행렬 맨 앞에 섰던 한 남자가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왜 저럴까? 저이는 누굴까? 나를 아는 사람인가? 이 여자는 ‘울지 말라.’는 소리를 그 남자에게서 듣습니다.
지금 이 여자는 누가 봐도 울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슬픔을 억지로 참으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실컷 울라고 하는 게 좋습니다. ‘울지 말라.’는 말을 들은 순간에 이 과부는 말하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을까요? 눈길을 주지 않고 무덤덤하게 지나치려고 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당연히 쳐다보았을 겁니다.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극한 슬픔에 빠진 한 여자를 향한 의례적 위로가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이 여자를 불쌍히 여겼다고 보도했습니다. 앞으로 당신 자신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될 때 영혼이 무너져 내렸을 어머니 마리아를 미리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똑같은 말이라고 해도 누구에게서 듣느냐에 따라서 그 말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때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이 여자도 똑같은 무게의 말을 지금 이 순간에 들은 겁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영혼 전체를 위로하는 말씀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흔한 게 아닙니다.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경험입니다. ‘울지 말라.’
외아들의 상여를 뒤따르던 이 과부의 실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운명에 떨어진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생존의 토대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요즘 뉴스 보기가 불편할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남녀공용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살해당한 20대 젊은 여성이나, 서울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참변을 당한 19세 청년, 하청에 하청이 거듭되는 지하철공사 현장에서 붕괴사고로 숨진 노동자들, 한편에서는 전관예우로 한 건 당 수십억 원의 수임료를 받아 챙기는 변호사들이 있는 반면에 돈이 없어 위생 생리대를 구입하지 못하는 소녀들 등등, 제가 일일이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2년 전 세월호 유족들의 심정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심정과 같지는 않을까요? 그런 사고야 어디서나 다 일어나는 일이니 너무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기 불편한 일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노력은, 즉 ‘울지 말라.’고 진심으로 말을 건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건 단순히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런 불행의 반복을 막거나 줄이는 길이도 합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나치에 관련된 사람들을 색출해서 단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행복한 조건을 두로 갖춘 사람도 근본적으로는 오늘 본문의 과부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괜찮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나 재물을 모두 잃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의 삶은 모두 상실의 과정입니다. 이 엄정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인이 상여의 뒤를 따르는 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기도 곧 상여에 몸을 싣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행복한 것처럼 포즈를 취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것에 속고, 그런 삶을 흉내 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 행복한 삶의 조건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또는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불행을 미리 걱정하면서 사는 건 어리석은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본문에 나오는 과부가 겪고 있는 참척의 고통은 운이 나쁜 이들에게나 일어나지 운이 좋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이미 모든 이들의 현실 삶에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운명이 죽음의 그림자처럼 비밀한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불행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쉽게, 가장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가족이 둘러앉은 밥상, 친구들과의 놀이, 여행, 돈벌이 등등일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공연장에 갔거나 영화관에 갔다고 합시다. 그 순간에는 다른 걸 잊겠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면 자기가 궁극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좀더 예민한 사람들은 그런 즐거운 순간에서 이미 자기가 상여를 따라가는 과부처럼 절대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동창들이나 이런저런 모임에서 겉으로는 웃고 떠들지만 속으로는 모두 울고 있습니다. 이게 피조물로서의 인간 실존입니다. 저도 이 엄정한 사실 앞에 설 때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롬 8:23)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의 상여를 뒤따르고 있는 과부를 향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실제로 울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그 말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 자만이 우리를 근원에서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만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상투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고독과 절망의 끝자락입니다. 그것을 경험했던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울지 말라.’는 말씀의 능력과 하나 될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울지 말라.’는 말씀을 생명의 화염처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일어나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별로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마디입니다. 한 번은 과부에게 한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죽어 상여에 누워있는 그녀의 아들에게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아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아들이 몇 살인지, 그리고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다가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혼자 남을 어머니를 생각했을 겁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상여에 누웠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닙니다. 뇌파를 검색할 수 있는 기계장치가 없던 고대 사회에서는 심장이 멈추고 숨이 멈추면 죽은 걸로 알았습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까지 무덤에 묻히곤 했습니다. 관에 들어가 상여에 올라타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이 청년, 또는 소년은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걸까? 일어나서 어머니를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가위 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래 전 아버지가 타고 가던 그 상여에 자신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이렇게 내 삶이 끝나는 건가?’ 그때 그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청년 이야기도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 같습니다. 할 일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습니다.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많은 일에 매달립니다. 스마트폰 시대는 어느 한 순간도 한눈을 팔지 못할 정도로 많은 세상살이의 정보들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게 실제로 살아있는 것일까요? 혹시 가위 눌려 있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들도 가위 눌린 경험이 몇 번씩은 다 있을 겁니다. 무서운 대상이 앞에 버티고 있는데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깨어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헛소리를 지르고, 식은땀을 흘립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모두 가위 눌린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데 헛소리만 나올 뿐입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더 어렵습니다. 이 상황을 누가 깨워줄 수 있을까요? 누가 ‘일어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아프니까 청춘이다.’ 하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말씀이 어디 있을까요?
과부의 아들을 살린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는 오늘 제1독서인 왕상 17:8-24절에도 나옵니다.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한창 가뭄이 들었을 때 엘리야는 사르밧 마을에 사는 한 과부의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얻습니다. 얼마 후에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아이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비슷한 이야기가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에게도 있습니다. 왕하 4:17-37절에 나옵니다. 엘리사는 수넴에 사는 한 부부의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얻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아이를 원한다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죽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를 살립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나인 성의 과부 이야기를 하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독자들도 다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보다 훨씬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를 바침으로써 죽은 아이의 생명을 불러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로 ‘일어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권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16절을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저는 앞에서 울지 말라,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울지 않고 일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건 비현실적이야, 하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위에서 인용한 16절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두려움, 영광, 선지자의 오심,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경험 말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 경험입니다. 우리는 늘 천편일률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삽니다. 거룩한 두려움과 영광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보다 좀더 나은 생활조건을 얻는 것에만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그걸 얻어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반복해서 경험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릴 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 믿고 그 사람 복 받았데, 하는 풍문에만 민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두려움과 영광을 경험한 사람만이 ‘울지 말라.’와 ‘일어나라.’는 그 말씀을 영혼의 깊이에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울지 말라와 일어나라는 말씀을 영혼의 공명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한 두려움과 영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구샘터교회 설립 13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종교 친목 단체가 아니라 구원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듣고 있는지를, 그래서 그 말씀에서 궁극적인 위로를 얻고 있는지를, 가위 눌림과 비슷한 이 세상살이에서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그래서 매순간 생명을 풍요롭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실질적으로(리얼하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저는 대구샘터교우들이 오직 여기에만 매진했으면 합니다. 저도 담임 목사로서 오직 이 사실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반걸음만 더 나가서, 여러분 주변에 예수님의 이 두 마디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눅 7:13,14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여러분이 앞으로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 편안할 때나 불안할 때,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과 죽는 순간에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 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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