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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 5:38-48)

원수사랑, 가능한가?

5:38-48, 주현절 일곱째 주일, 2014년 223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원수사랑, 가능한가?’라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보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가능하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는 거야, 하고 헷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해보면, 원수사랑은커녕 이웃사랑도 힘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원수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보통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설령 개인의 높은 영성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그게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반인륜적인 범죄자들을 원수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용서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 세상 윤리에서는 원수사랑이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을 정도로 원수사랑은 비현실적인 개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본문 43, 4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먼저 43절에서 원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통을 짚었습니다. 그 전통은 이웃 사랑, 원수 미움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각주에 따르면 이 구절은 레 19:18절의 인용입니다. 레위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고 그 의미를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 레위기에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직접적인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갚지 말며...’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감안하면 레 19:18절을 원수에 대한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긴 합니다. 시편에는 원수에 대한 분노가 자주 나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전쟁 이야기를 전하는 출애굽기에는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민족을 이끌고 있던 여호수아는 노약자와 어린아이와 짐승까지 모두 박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어떤 유대 문헌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만드신 이유가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항상 증오심에 불탔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전통도 그들에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원수, 또는 악을 가능한 멀리하고, 분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만은 옳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전통을 짚으신 뒤에 44절에서 이와 반대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원수 미움에서 원수사랑으로 관점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이런 전환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반()명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마 5:21-48절 사이에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해서 나옵니다. 원수사랑도 이런 반명제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앞 단락에 속하는 마 5:38-42절에 거론된 내용을 살펴보는 게 원수사랑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출 21:24절 등을 인용해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먼저 짚으셨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와 같은 전통, 또는 명제는 구약성경만이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처럼 다른 고대 문헌에도 나옵니다. 남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그 사람의 눈도 뽑아야 하고, 이를 상하게 했으면 그 사람의 이도 뽑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눈은 눈, 이는 이라는 표현이 겉으로는 야만적으로 보입니다. 인권 개념이 없던 고대시대에나 해당되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 법의 취지는 남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끔찍한 징벌을 가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보호하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남의 이를 하나 다치게 했다고 합시다. 그렇게 당한 사람은 몇 배로 갚으려고 할 겁니다. 그걸 법으로 막아서 당한 것만큼만 갚으라는 의미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 법은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다루려고 한 일종의 사회 안전장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의 근본 취지가 흐려지면서 오히려 원수를 미워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에 대한 반명제를 네 가지의 경우로 말씀하셨습니다.

 

 

1) 39절에서 예수님은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 뺨을 치려면 손등으로 쳐야합니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모멸적인 행위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우리의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희사하거나, 오지에 나가서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친 이들도 오른 뺨을 맞으면 왜 그러냐, 그만 해라, 하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왼 뺨까지 들이대지는 못할 겁니다.

2) 40절에서 예수님은 속옷을 가지고 싶어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라는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옷을 한 벌 마련한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율법도 어떤 가난한 사람이 옷을 저당 잡혔을 때 밤이 오기 전에 돌려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겉옷까지 주라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도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벌거벗고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3) 41절은 이렇습니다. ‘너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말은 군사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로마 군대는 피식민지 사람들인 유대인을 강제해서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물건을 나르게 하거나 지리를 탐문하게 하는 겁니다. 유대의 혁명 지하운동 단체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일을 거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일은 매국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로마 군대의 요구보다 더 많은 걸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42절에서 예수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삽니다. 그 관계는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진행됩니다. 받을 건 가능한 많이 받고, 줄 거는 가능한 적게 주면서 살아가는 게 지혜롭다고 말들을 합니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경제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거꾸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의 필요를 거절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것도 그렇게 만만한 과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신 걸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인용하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율법의 가르침이 더 현실적입니다. 그게 세상의 작동원리입니다. 개인들도 그렇고 사회와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지난 21일 새벽에 소치 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서 김연아 선수가 은메달을 땄습니다. 한번 은퇴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걸 감안하면 그것도 대단한 성적입니다. 근데 금메달을 기대했던 탓에, 그리고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인 탓에 국민들의 실망이 큰 것 같습니다. 금메달을 도적맞았다고도 말합니다. 해외 언론들도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편파적이었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자기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딴 러시아 사람들은 또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이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에 충실한 겁니다. 속옷을 원하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김연아 선수 사태로 인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적 상처는 치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현실적이지 않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는 몽상가인가요?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도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가르치는 도덕 선생, 윤리 교사, 극단의 휴머니스트인가요?

 

예수님이 무엇을 뚫어 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또는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만을 사랑하는 세상의 이치는 결국 인간 삶을 파괴합니다. 겉으로는 그게 정의처럼 보이긴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이익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내편인지, 누가 원수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치에 길들여지면 결국 내편이 한 일은 그게 국가의 기강을 허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다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이런 게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아주 강합니다. 좋게 보면 온정주의이고, 나쁘게 보면 패거리주의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우리 편이면 무조건 잘한 거로 밀어붙입니다. 일반적으로 조폭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사회에 편 가르기 문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겁니다. 저 사람은 진보야 보수야, 저 사람은 종북 좌파야 아니야, 하는 눈으로 사람을 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그게 그 나라의 철학이 되고 세계관이 됩니다. 이렇게 내편과 네 편을 가르는 방식으로 사회가 작동되면 양쪽의 모든 사람들은 영혼의 손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는 슬로건을 떠벌리는 사람의 영혼까지 손상시키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 이런 세상원리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힘들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의심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씀을 진리로 믿고 그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저는 지금 그 깊이의 한 자락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원수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45b절에서 이렇게 생생하게 와 닿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태양빛을 보십시오.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내리비춥니다. 비를 보십시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립니다. 이런 걸 보고 불평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물론 속으로는 저런 나쁜 놈들에게는 빛도 비추지 말고 비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똑같이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기독교신자냐 아니냐 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에 필요한 조건들을 모든 이들에게 제공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창조능력이자, 창조은혜이고, 창조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대로 따라야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고,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46절에서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절에서는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말씀하면서, 결론적으로 48절에서 엄청난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제1독서의 한 구절인 레 19:2와 제2독서의 한 구절인 고전 3:17, 그리고 신 18:13절 내용과 비슷합니다. 온전, 거룩, 완전은 다 같은 말입니다. 실제로는 온전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신처럼 완벽한 의를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요구인가요? 억지로라도 원수사랑을 실행하라는 명령인가요?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완전하심처럼 완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 답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그 답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의 섭리와 완전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쯤으로 받아들이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의 상투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에 자신을 비쳐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확인됩니다. 6:31-34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은 생존의 최소 조건이며, 또한 최대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이런 것으로 염려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나 깨나 늘 그것에 대한 염려뿐입니다. 물론 이런 염려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생존의 최소 조건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우리 사회에 위험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구비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생존 조건에 만족하지 말라고, 더 많은 게 필요하다고 세상이 강요합니다. 거기서 벗어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세상의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미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런 자유를 알 때만, 즉 그 자유 안에 거할 때만 이웃과의 관계가 새롭게 열립니다. 그 새로운 관계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처럼 원수사랑은 가능할까요? 원수사랑이라는 말 자체에 겁먹지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것을 허황된 것으로 백안시하지도 마십시오. 원수사랑은 가능성 여부의 차원이 아니라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시는 방식으로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여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로 그 하나님을 참되게 인식하고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분명하다면 이웃과 세상은 새로운 빛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분별심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이 원수사랑의 본질입니다.

마태복음 5:38-48
https://youtu.be/Nc8lalnGP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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