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유월절 식사
눅 22:14~23, 사순절 여섯째 주일, 2022년 4월10일
그리스도교 절기 중에서 성탄절은 날짜가 고정이지만 부활절은 유동적입니다. 우리나라의 고유 절기인 설날이 음력을 따르기에 매년 달라지듯이 부활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1월) 14일에 시작하여 일주일간 계속되는 유대교의 유월절과 연동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페사흐, 헬라어로 파스카로 불리는 유월절은 재앙이 지나갔다(passover)는 의미입니다. 출애굽을 모티브로 하는 이 유월절 절기에 유대인들은 출애굽(Exodus) 공동체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유대인 가정은 유월절이 시작하는 저녁에 모여서 일정한 의식을 행했습니다. 양고기와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가 주요 식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많은 유대인이 유월절에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성지순례에 나섰습니다. 갈릴리 어촌인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 오려면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루살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예수의 신상에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 보입니다. 눅 22:2절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제거할 마음을 먹습니다. 거기에 끄나풀로 이용당한 인물은 예수의 제자인 가룟 사람인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준 대가로 돈을 받기로 약속했고, 넘겨줄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오늘 설교 본문인 유월절 만찬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 22:24절 이하를 따르면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당하여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을 때 피의자 예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그를 의심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예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말합니다.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고, 이어서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서도 재판을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십자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유월절 특사 관행에 따라서 그의 목숨을 살리고 싶었으나 폭력범 바라바를 사면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시키라는 예루살렘 대중의 압력에 굴복당합니다. 그렇게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숨이 끊어졌으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가족 묘지에 묻힙니다. 간략하게 스케치한 이런 일련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 눅 22장과 23장에 나온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죽였나?
예수님은 정치범이 아닌데도 왜 반역자에게만 해당하는 로마법에 따라서 십자가형을 받은 것일까요? 예수를 죽게 한 장본인은 누굽니까? 사도신경에 따르면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장본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 누가복음을 비롯한 복음서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에게 오히려 호의적이었습니다. 사도신경과 복음서의 진술이 서로 다릅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민심과 관련해서 빌라도는 예수로 인해서 로마 통치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로마법은 이런 자를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게 로마법의 한계이자 이중성입니다. 로마법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법도 모든 사안을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명백하게 처리할 수 만능기계가 아닙니다. 법원의 1심과 2심과 3심의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체포하여 종교재판을 거친 다음에 빌라도 법정에 넘긴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 죽음의 장본인일까요? 복음서의 진술만 따른다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눅 22:2절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진작 꾸몄습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보면 산헤드린을 장본인으로 여기기는 힘듭니다. 예수 제자들과 동생과 초기 추종자들은 예수 죽음 이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 성전 출입을 계속했습니다. 회당 출입도 상당한 기간 이어졌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산헤드린이 당시에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공식 기구로서의 산헤드린과 비공식 기구로서의 산헤드린입니다. 비공식 기구로서의 산헤드린은 전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로서 예수 당시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조언 그룹입니다. 예수를 심문하고 빌라도에게 넘긴 이들은 비공식 산헤드린이었다고 합니다. 공적인 기구로서의 산헤드린이 유대교를 대표하기에 예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산헤드린에게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민족의 선지자인 예수가 이방인의 실정법인 로마법에 따라서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구명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았다는 책임은 작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 연옥 편 “제7곡”에는 적극적으로 악을 행해야만 죄인이 아니라 필요할 때 행동하지 않은 이들도 연옥에서 정화 과정을 밟아야 할 죄인으로 나옵니다.
여기 예수 십자가 죽음에 연루된 또 하나의 집단이 있습니다. 이 집단에는 우리도 포함될 겁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체형을 내리겠다는 빌라도의 생각을 다수의 힘으로 뒤엎었습니다. 눅 23:21절이 이렇게 보도합니다.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시위를 벌인 이유에 관해서 우리는 지금 소상하게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복음서 기자들이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마녀사냥
예루살렘 주민과 예수 처형 문제는 단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일반 주민들, 말하자면 민중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속성을 말하는 겁니다. 민중, 또는 대중은, 또는 시민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들은 권력자들에 대항하여 세상을 개혁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반(反)개혁에 이용당하는 무리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세상을 퇴보시키기도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쉽게 선동당하기도 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중신학’은 민중을 이상화함으로써 한계를 보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이 아니라면 우중(愚衆)으로 떨어지고, 깨어 있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사이비 이단 추종자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민중, 또는 시민은 그대로의 실체를 봐야 합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볼 때 그들에게 가장 나쁜 현상은 마녀사냥으로 나타납니다. 일정한 대상을 마녀로 몰아감으로써 일반 대중들이 심리적인 만족을 느끼는 현상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속이는 마녀였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대한민국의 일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슬람교도들은 마녀와 같습니다. 동성애자들도 마녀입니다. 공산주의자들도 마녀입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며칠 전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인 조민 씨의 고려대학교 입학과 부산대학교 의전원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 정경심 씨가 대법원에서 받은 4년 유죄 선고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듯이 보입니다. 유죄 항목은 주로 자녀들의 진학 문제와 관련된 스펙이 가짜라는 겁니다. 표창장 위조나 미자격 인턴 증명서 등등입니다. 정경심 씨는 자녀 교육에 과도한 열정을 보이는, 소위 ‘강남 엄마’들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갔나 봅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법 전문가인 대법원 판사들과 최고의 지성인들인 대학교 교수들이 내린 결정이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겠지요. 법 조항과 문구 자체가 진리는 아닙니다. 법 문구에 집착하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서기관이고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결국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책임을 떠넘긴 산헤드린 의원들이었습니다. 20대 인생 전체를 부정당한 조민이라는 젊은 여성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 진행을 볼 때 마녀사냥과 다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세기 유럽과 북미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마녀 화형 현장에서 마녀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대중들은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해소했을 겁니다. 자신의 무의식에 자리한 죄책감을 털어냈다는 뜻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영혼이 평화를 얻었을까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아니 작은 악을 열배 백배 더 큰 악으로 갚는다면 영혼의 평화는 없습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위선에 구역질을 느꼈을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부분에서 위선자 아닙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저는 지금 예수라는 삼십 대 초중반인 유대인 남자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다가 말도 되지 않는 십자가 처형에 이르게 된 그 과정에 한두 개인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빌라도라는 로마 고위 정치인은 물론이고, 유대교의 고위 성직자들인 산헤드린 의원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평범한 주민들이 다 연루되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매개로 대제사장들과 얄궂게 거래했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에 걸쳐서 뻔뻔스럽게 부인했고, 나머지 제자들도 몇 명만 제외하고 예수가 절체절명의 운명에 떨어진 순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 몇 명도 예수가 당한 운명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예수는 모든 인간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심정이 되었다고(막 15:34) 말했습니다. 그 예수는 도대체 누굽니까?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모독당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저는 예수가 누군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누군지, 그의 실제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여전히 궁금합니다. 그 실제 삶의 한 장면의 하나가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유월절 마지막 만찬입니다.
내 몸이다
이번 유월절 만찬이 예수에게는 마지막 식사 자리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에게나 마지막 식사 순간은 옵니다. 마지막 호흡도 옵니다. 봄꽃을 마지막으로 볼 순간이 옵니다. 중력을 두 다리로 느끼면서 걷는 마지막 순간도 누구에게나 옵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드리는 순간도 옵니다. 보통은 유월절 메뉴를 밥상에 차려놓고 연장자가 기도한 후에 시편 찬송을 부르고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번 유월절 의식은 색달랐습니다. 19절 말씀이 그 핵심을 이렇게 전합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Τοῦτό ἐστιν τὸ σῶμά μου)
20절에서 예수는 포도주를 “내 피”라는 말씀하셨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말은 성찬식 때 우리가 듣던 멘트입니다.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행해진 의식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겁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그렇게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부자가 된다거나 모든 어려움 없이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극단적으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그런 소박한 신앙으로 사는 게 무조건 나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를 맛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지금 마지막 식사를 앞둔 예수의 운명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음과 혐오와 저주에서 부활의 첫 열매로 건져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비록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세상 완성자이시며, 부활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저주의 운명에 떨어진들 무슨 걱정이나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말이 그렇지 실제 삶에서는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에서 벗어나기는 정말 힘듭니다. 이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수행하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로 조금씩이나마 깊이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예배도 일종의 수행이고, 예배 안에서 행하는 성찬 예식도 수행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면서 주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라는 말씀을 조금씩이나마 더 명료하게 느낀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즉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사실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안식과 평화와 해방감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가깝게 느끼는 분이 있고 멀게 느끼는 분이 있습니다. 가깝게 느끼려면 일단 삶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세속사회에서 활기차게 사는 분들은 수도원 생활을 밋밋하게 여길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도승들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충만하게 살아갑니다. 친구들과 맛난 음식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은 혼자 책이나 읽으면서 사는 사람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모두가 수도승이 되자거나 외로운 독서광이 되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확신하거나 몰두하는 삶이 너무 협소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게 아닌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 잘났다고 여기면서, 거꾸로 못났다고 여기면서 축제로서의 삶을 삿대질하는 싸움판으로 만드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대목은 놓치고 허상을 좇고 있는 게 아닌지 말입니다. 체스터턴은 『정통』에서 미치광이에 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미치광이는 자기의 이성을 잃은 사람이 아니다. 이성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다.”(56쪽) 이런 점에서 볼 때 현대인을 미쳤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설교를 마치면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에 가까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삶의 한 가지 구체적인 태도, 또는 능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앞에 암시되었습니다. 밥 한 끼를 여러분의 인생에서 주어진 마지막 식사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능력이 그것입니다. 그런 태도와 능력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것(밥)은 나의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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