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창조절 첫째 주일, 2014년 9월7일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을 가리킵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온갖 종류의 율법이 유대인들의 삶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이런 유대인들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삶이 별로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율법에 천착하면 천착할수록 오히려 부담감과 죄책감만 늘어났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율법은 원래 선한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설교 본문 롬 13:9절에 나열한 네 가지 항목은 십계명 후반부에 나오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런 율법대로 살면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사회도 건강해집니다. 문제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생각의 중심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로마서 앞부분에서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즉 구원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롬 3:2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위 말씀에 따라서 의와 구원은 우리가 뭔가를 노력해서 얻는 반대급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제 율법은 극복되었습니다. 자기의(義)를 성취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났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기독교인들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수도원 생활을 하면 모를까 시장바닥과 같은 이 세상에서는 믿음만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매일 기도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만나야 하고, 로마 정권과도 부딪쳐야 하고, 불의와 적당하게 타협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는 세상을 만나야만 합니다.
로마 교회의 이런 문제들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복음이 제공하는 놀라운 자유와 기쁨이 우리의 영혼 깊숙이 자리하고 있지만 막상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들어가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군대에 가야하는지 아닌지를 백 프로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을 우리가 무조건 배격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그렇습니다. 보수적인 정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해야 하는지는 같은 기독교 신앙인이라고 해도 서로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생태 마인드가 예민한 사람들은 가능한 소비를 최소화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결혼 금반지 하나 만들 정도의 금을 생산하려면 금이 포함된 광석 20톤을 독성 약물로 걸러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반지를 끼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대인의 필수 기호식품이 된 커피 생산과 유통 및 소비 사이에는 엄청난 구조적 불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커피를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재배 농들은 더 가난해지고 기업은 더 부자가 된다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요.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 삶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본문에서 제시합니다. 그 해결책은 놀랍게도 단순합니다. 그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열심히 지켜야 한다는 말도 아니고 율법을 폐기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즉 율법 수행이나 율법 폐기가 아니라 율법 완성의 길입니다. 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악이라고 해서 늘 폭력적인 거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한 모양으로도 악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합법적으로도 악은 행해집니다. 현대로 올수록 악은 더 교묘해집니다. 악이 뭔지는 겉모양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랑도 단순히 겉모양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전 13:3절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휴머니즘이 아니라 남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존재론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적당히 교양을 쌓아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웃과 경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경쟁을 삶 자체로 받아들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기는 형제끼리도 경쟁심 때문에 결국 살인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이렇듯이 경쟁심은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속성이라서 바뀌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아무리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 없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랑의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자기의 삶을 완전히 이루었다고, 무언가 완전한 것을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빌 3장 참조). 한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다른 문제가 우리 영혼을 뒤덮는 게 우리의 인생살입니다. 이럴 때는 배를 운행하다가 큰 풍랑을 만난 뱃사람들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나침반에 의지해서 한 방향으로 계속 나가는 게 최선입니다. 그러다보면 육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신앙이고 영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나침반을 읽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그런 지혜의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기’를 아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바울이 말하는 시기는 본문에서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자다가 깰 때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온 때입니다. 이런 말은 듣기에 따라서 불편합니다. 어떤 특정한 때에 세상 종말이 오니 자기들 교회에 나와서 구원받으라고 선동하는 사이비 집단들의 주장처럼 들립니다. 로마서가 2천 년 전에 기록되었는데,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은 걸 보면 바울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시간과 역사에 대한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는 시기는 헬라어 카이로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 의미 충만한 시간,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구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성서는 시간을 단순히 사람들이 계산하는 연대기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사건이 모든 시간의 원점입니다.
현대인들은 시간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 년은 365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14년이 지나면 2015년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반드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여기면서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 있는 실체로 생각합니다. 이런 시간 개념에 근거해서 인간의 평균 수명과 돌고래의 평균 수명을 비교하곤 합니다. 90살에 죽은 사람은 60살에 죽은 사람보다 30년을 더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시간 개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 역시 상대적입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른 비행물체를 타고 이동하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단순히 연대기적인 시간에 묶이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인 카이로스, 즉 하나님의 시간을 감촉하면서 삽니다.
이것은 깊은 신학이나 고도의 물리학이나 철학공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을 조금만 진지하게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겁니다. 여기 인생을 바라보는 두 관점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태어나서부터 차례대로 시간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등등이 됩니다. 그때마다 할 일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때가 되면 죽습니다. 이런 삶에는 죽음이 분리되거나 소외되어 있습니다. 시간 계산에 따른 삶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순간을 죽음과의 일치로 여기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십대 때와 육십 때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때에 죽음이 개입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죽음을 생명의 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의 모든 순간이 결국 완성의 시간입니다. 즉 매 순간이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입니다. 영이 충만한 시간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누가 옆에서 말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시간에 속한 사람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것입니다. 그 사실을 13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낯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여기에 기독교인으로서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들이 여섯 개 열거되어 있습니다.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조심해야 할 나쁜 덕목들이 어디 이런 것들뿐이겠습니까. 탐심, 거짓말, 패륜, 폭행 등, 끝이 없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윤리적 지침을 열거하는 게 아닙니다. 이 목록은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이런 악덕한 행위들의 뿌리가 되는 것을 배격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절이 대답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앞에서 열거된 여섯 항목의 악덕이 바로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본문이 말하는 육체의 정욕은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육체라는 단어는 헬라어 사르크스의 번역이고, 정욕은 에피쑤미아스(desire, longing, lust)의 번역입니다. 육체적인 욕망 일체를 가리킵니다. 사람이라면 육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기본적으로는 육체의 에피쑤미아스, 즉 육체의 욕망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먹는 욕망만 해도 그렇습니다. 특히 미국 사람들 중에서 비만이 많다고 합니다. 저처럼 마른 사람들은 살을 빼려고 해도 빼지 못하는 분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들은 식욕을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만 벌면 되지 끝없이 돈을 벌려고 할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돈의 욕망도 제어되기 어렵습니다. 특히 극단의 자본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현대는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됩니다. 프로 운동선수들의 몸값은 천정부지입니다. 돈이라는 게 무한정이 아니기 때문에 한쪽에 돈이 지나치게 많이 쌓이면 다른 쪽은 쪼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돈의 욕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거기서 나쁜 권력도 나오고, 나쁜 교육도 나옵니다. 정욕을 위해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바울의 충고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게 안 된다는 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요받으면 그건 율법주의가 됩니다. 바울은 우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만 육신의 일을 도모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중사우나탕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거기서는 아무도 비싼 옷으로 자기 몸을 치장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사우나탕에 벌거벗은 몸을 맡기듯이 원초적 생명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 대한 갈망, 욕망이 줄어듭니다. 자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자기중심의 모든 생각들로부터 뱀이 허물을 벗듯이 벗어납니다. 그때서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을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세례를 통해서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옷을 입어도 몸은 그대로 자기의 육신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겠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옷을 입어도 끊임없이 에피쑤미아스, 즉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게 삶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새롭게 옷을 갈아입듯이 예수라는 옷으로 매일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예배이고, 신학공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부활에 대해서 변증하면서 ‘나는 매일 죽노라.’(고전 15:31)고 말했습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구도의 과정이 없으면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육신의 욕망에 쉽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환희와 이 현실에 나타나는 육신의 욕망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뿐히 벗어날 묘책은 따로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매일 옷 입는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세례가 매일 반복될 수 있다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고, 더 나가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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