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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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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8.31. (롬 13:8-14)

저는 성경을 읽거나 강의할 때, 그리고 지금처럼 설교할 때마다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제가 성경 내용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신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공부로 그런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도 거의 2천 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은 한민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고대에 기록된 성경 이야기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이웃사랑과 율법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로마서 13:8-14절도 바로 우리가 쉽게 따라가기 힘든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어려울 게 없어 보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사랑의 의무는 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9절에서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전반부의 결론은 10b절이겠지요.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8-10절의 각 구절마다 사랑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의 말씀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이 본문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앞부분에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아주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롬 3:27b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율법과 대립적인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롬 4:1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본문에서 확인한 것처럼 로마서 후반부로 넘어오면서 바울은 율법을 다시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롬 13:8절에서 ‘사랑의 의무’를 다 하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9절에서 그는 십계명의 두 번째 판에 나온 항목을 열거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우리의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도대체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인가요? 바울이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왜 여기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십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13절의 말씀에서도 바울의 이런 요구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14b절에서도 그는 그것을 결론적으로 강조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런 진술은 분명히 도덕적이고 경건한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범적이었던 바리새인의 율법적인 삶과 비슷해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기울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구절에 근거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이웃 사랑과 봉사와 실천을 강조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말도 따뜻하게 해야 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거야 나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남을 사랑할 능력이 근본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시늉을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신문과 티브이에는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소개됩니다. 돈이 없어서 병을 치료하지도 못하고, 최소한의 문명생활도 보장되지 못한 쪽방에서 살아야 하고, 심지어는 굶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그들과 나눠야 할 겁니다. 개인에 따라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이 적지 않지만, 부끄럽지 않게 남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은 가족을 사랑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앞부분에서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무슨 근거로 다시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바울이 앞에서 경계했던 율법주의와 지금 여기서 강조하는 이웃 사랑은 다른 뜻인가요? 다르다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이웃을 향한 헌신과 사랑
일단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이웃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예찬이라고 알려진 고전 13장을 보십시오. 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눠주는 자선행위와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드는 희생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간혹 매스컴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 재산을 대학에 희사해서 등록금 없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사용하게 한다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일에 평생을 바친 이들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누구나 본받고 높이 기려야 할 귀한 삶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런 것을 이웃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것을 상대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웃을 향한 극한의 헌신도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바울이 고전 13:4절 이하에서 진술한 사랑의 정체를 들어보면 그 사태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걸 노랫말로 하는 복음 찬송도 있습니다. 이런 찬송을 부르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헌신과 봉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뤄야 할 삶의 목표도 아닙니다. 바울이 노래하는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고전 13장은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묘사된 사랑의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했던 능력입니다.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런 인간의 행위는 곧 허위의식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허위의식이 얼마나 집요하게 작용하는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롬 7:21) 이런 바울의 실존적인 고백일 겁니다. 남을 위해서 선을 행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기심이 작동한다고 말입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사상가가 그럴 정도라고 한다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교회공동체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자기만 고생한다거나, 속으로 남에게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익과 손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합니다.
허위의식이라 하더라도, 또는 위선이라고 하더라도 남을 위한 봉사활동과 섬김의 삶은 분명히 필요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비록 100% 완전하게 순수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희생하는 섬김이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바울도 고전 13장에서 그런 봉사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영적 시야를 고정시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말입니다. 이런 영적 태도가 없으면 우리의 선한 행위는 모두 자기의(義)를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였고, 지금도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헌신적인 삶과 사랑에 의존하는 삶을 구별했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그 차이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깊이 아시는 성령밖에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간단히 율법과 도덕주의에 만족하기도 하고, 또는 그것에 닦달당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그것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그런 구별이 무조건 신학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가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신학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성령의 경험입니다. 그 성령은 생명과 진리와 창조의 영이어서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아서 아무래도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가장 좋겠군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거의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의존적입니다. 조금 크면 사무적인 관계로 들어갑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조건 반항적으로 행동하는데, 그게 바로 율법적인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의무적으로만 행동합니다. 그런데 완전히 철이 들면 깊은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가겠지요. 이렇게 되면 의무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부모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건 친구, 사제, 부부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될 겁니다. 의무와 법의 차원인지, 아니면 사랑의 차원인지는 분명히 다른 겁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차이를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 19:18) 하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이 십계명과 이웃 사랑이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건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십계명의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웃)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마세요. 우리는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율법의 완성을 향해서 나갈 수 있고, 율법을 완성했다고 인정받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랑하는 척 흉내를 내다가 아주 쉽게 실망하고 지치거나, 자기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부활생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허무하고 무상한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만약 이런 사실을 단순히 정보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부활 생명에 들어갔다는 기쁨과 환희로 세상을 살아가겠지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웃과 전혀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들어갈 겁니다.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 생명의 힘이 곧 사랑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롬 13:10a) 생명에 참여한 사람이 어떻게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만 참된 이웃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롬 13:14) 여기서 두 가지 삶이 대비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삶입니다. 여기서 육체의 정욕을 인간의 본능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무언가를 먹어야만 합니다. 남녀가 만나서 아기도 낳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생명이 불가능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라는 말은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 치우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생명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거나 죽은 다음에 썩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는 생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라고 했습니다. 개역과 루터 역은 이 문장을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생명 사건 안으로 침잠하라는 뜻입니다. 그것과 일치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 사랑의 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야말로 참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영적 세계가 보이시나요?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율법을 완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통해서 이웃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로마서 1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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