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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성령강림절후 제4주, 6월16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과 십자가’라는 오늘 설교 제목을 주보에서 읽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율법이나 십자가는 신약성경이나 설교에 자주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낯익기는 한데 일상과는 거리가 좀 멀게 느껴질 겁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일상은 아주 절절한데 비해서 성서 언어들은 시들합니다. 간혹 성서 언어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 단어들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매우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이긴 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런 성서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성서 언어와 삶의 일치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도 성서의 세계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어떤 분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요한복음을 공부하다보니 당시 기독교인들의 신앙만이 아니라 그들과 대립관계에 있던 유대교인들의 입장도 이해하게 되어 요한복음의 세계가 더 생생하게 경험되었다는 겁니다. 성서 안에는 수많은 신앙적 투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온실에서 곱게 자란 원예 작물이라기보다는 야생에서 다른 풀들과의 경쟁을 통해서 자란 야생화와 같습니다. 무엇을 놓고 경쟁하고 싸웠는지를 알아야만 성서의 세계를 알 수 있고, 그럴 때 성서가 우리 삶의 현실로 다가옵니다.

 

본래 유대인

오늘 설교 본문이 들어 있는 갈라디아서도 신학 논쟁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점잖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아예 이단논쟁처럼 과격한 싸움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대립해 있던 이들을 가리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갈 1:6-10). 그들은 유대교인들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입니다. 정확하게는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원래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를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과 여러 추종자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지금은 바울이 그들과 신학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처음에는 당연히 이들과 똑같았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무슨 이유로 유대 기독교인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갈 2: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여기서 ‘우리’는 자기를 포함한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원래 유대교 전통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민족이라 할 정도로 율법에 매달렸습니다. 율법은 그들의 숙명이었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예컨대 소가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망가뜨리는 경우나,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도 율법이 대답을 제시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율법의 기본 개념을 간략히 도식화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도식입니다. 이런 도식은 유대인의 율법만이 아니라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이나 이집트, 또는 로마 제국의 법전에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바울은 16a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무슨 말인가요?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믿음을 무조건 틀렸다고 보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옳습니다. 합리적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법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준법정신이라거나 법치주의라는 말이 다 이런 걸 가리킵니다. 법이 세상을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돈을 벌더라도 법을 지켜야 합니다. 불량 식품을 속여 팔면서 돈을 번다면 그는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에 국정원장이 불법을 저질러서 지금 검찰이 그를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고 합니다. 법을 엄정하게 지켜야 세상이 정의로워진다는 말은 옳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다시피 했습니다.


하나의 예가 안식일법입니다. 안식일은 지금의 토요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완전히 안식해야만 합니다. 일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걷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4,5백 미터는 걸어도 됩니다. 회당에 가기 위해서 걷는 것은 예외 규정을 두었겠지요. 그들은 시행규칙을 만들어가면서 안식일 제도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법으로 강제해야만 사람은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쉴 수 있습니다. 특히 노예 신분의 사람들은 안식일 덕분에 하루를 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최저임금제를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놓고 볼 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법이 세상을 정의롭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율법이 정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법은 일시적으로, 또는 표면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정의를 세우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실정법이 대한민국은 정의롭게 만들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세계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은 일종의 율법입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세계를 평가합니다. 세계 다른 나라도 그런 현실을 인정합니다. 영어는 거의 세계 공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한미동맹을 절대가치로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이 세계를 정의롭게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부분적으로, 표면적으로 정의로운 일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나라 이익에만 충실합니다. 미국이 정의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저는 반미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정치적인 발언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신학적인 발언입니다. 바울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개인이나 사회나 정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둘째, 사람은 아무도 율법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율법 앞에서 절망합니다. 율법이 사람을 조금 괜찮은 사람으로 계몽시킬 수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새롭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극단적으로 주장합니다. 롬 6:7절을 루터 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사람은 의로워진 것입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를 어떤 파렴치한 행위나 부도덕한 행동 같은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자기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자기집중, 자기연민, 이기심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예민하게 계산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죽기 전에는 이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겁니다. 죽은 사람은 죄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의롭습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이해하고, 또한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여기까지는 유대 기독교인과 바울의 생각이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유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율법을 실천했지만, 바울이 개척하고 목회하던 이방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포기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복음과 율법의 절충을 추구했다면, 이방 기독교는 오직 복음에만 ‘올인’한 겁니다. 요즘 한국교회 형편과 비교한다면 유대 기독교는 제자훈련을 중요한 신앙의 문제로 간주하는 ‘사랑의교회’라 한다면, 이방 기독교는 그런 것을 거의 배제한 ‘샘터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유대 기독교가 더 옳습니다. 율법 없이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는 실제로 많은 문제들이 벌어졌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남용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자유만 누리려고 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유대 기독교는 바울에게 따져 물은 겁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한 거냐, 값싼 은혜에 떨어져 버린 거냐, 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갈 2:21a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곧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뜻이고, 자기는 그런 비판 앞에서 떳떳하다는 변호입니다.

 

십자가의 절대화

바울은 유대 기독교 측의 비판이 나름으로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 문제로 흔들리고 있던 교우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심각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아무리 복음의 자유가 본질이라고 해도 자기의 입장만 고수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선택이 바람직한가요? 바울은 초심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21b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과감하다 못해 과격한 표현입니다. 교회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보충하는 게 좋겠다는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한 겁니다. 저들의 주장은 결국 예수 십자가의 상대화라고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갈라디아서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대 기독교인들도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똑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본질은 아니지만 신앙생활의 현실에서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바울이 받아들였다면 이방 기독교도 역시 토요일인 안식일을 그대로 지켰을 것이며, 할례도 받았을 것이며, 유대교의 몇몇 절기를 그대로 따르고, 돼지고기도 먹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기독교 교파 중에는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그런 게 종교적으로 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교파의 사람들도 만족스러워합니다. 바울은 거기서 복음의 본질이 훼손될 위험성이 높다는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실제로 역사가 조금 더 흐른 뒤에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복음의 본질에 매달린 바울의 이방 기독교가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그게 오늘의 기독교입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우뚝하게 섰지만 바울 당시에는 아주 위태로운 상태에 직면해 있었고, 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순전히 신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은 늘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교회 공동체는 현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학적인 것은 결국 구체적인 삶과 연결됩니다. 율법을 통한 의는 삶의 완성입니다. 현대인들이 삶의 완성을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또는 행복한 조건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돈도 좀 잘 벌고, 이름도 내고, 착한 일도 하고, 취미활동도 잘 하고, 스펙도 잘 쌓고, 등등 ... 할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저 같은 경우라면 한국교회를 위한 스터디 베스트셀러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다 필요합니다. 모두 좋은 율법들입니다. 모두 열심히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걸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해집니다.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고, 매일 십자가만 묵상하면서 살라는 말인가, 하고 혼란스러우신가요?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육체로 삽니다. 이런 삶은 각각 다 소중합니다. 우리는 땀 흘려야 합니다. 먹고 숨을 쉬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맺어야 합니다. 거기서 당연히 실수도 할 겁니다. 그걸 다 감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20b절에서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그런 육체로서의 삶을 믿음의 차원에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빛에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신앙의 신비가, 즉 존재론적 신앙의 능력이 그 삶에서 현실이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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