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성령강림후 넷째 주일, 2016년 6월12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여러분은 오늘 설교 제목 ‘율법과 십자가’를 확인하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분이 있을 거고, 저런 정도는 다 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별 감동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요.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면 기독교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오늘 얼마나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긴 하지만, 설교자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차원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여러분을 ‘율법과 십자가’가 가리키는 신앙의 세계로 안내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 여정에서 오늘이 일종의 터닝 포인트로 기억되는 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2독서인 갈라디아서 2:15-21절에서 바울은 율법 중심의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강한 어조로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만 간추려서 읽어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세 번, 19절에 두 번, 21절에 한 번 나옵니다. 그게 다 율법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행해야 할 삶의 규범들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은 구약성경 중에서 주로 모세오경에 나옵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압축입니다. 율법은 기본적으로 다 좋은 겁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율법 자체라기보다는 율법을 절대화하는 율법주의, 또는 율법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 신앙이 개인과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오늘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갈 2:11-14절에서 구체적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안디옥 교회에서 벌어진 겁니다. 안디옥 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거기서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게바, 즉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 머무는 동안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아무런 문제없이 잘 어울려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 교회(대표자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밥을 먹던 베드로가 자리를 피했습니다. 이유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이방인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서 그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인 것입니다. 어느 장로가 술 담배를 하다가 목사가 들어오자 자리를 피한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이런 행동을 가식적인 것이라고 보고, 베드로를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일종의 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을 언급한 뒤에 바울은 율법주의 신앙의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세하게 피력했습니다.
율법의 길
이런 논쟁적인 문서를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논쟁의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대상이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되 토라, 즉 율법도 지켰습니다. 더 나가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토라와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 잘못된 거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안전할 뿐만 아니라 율법 자체가 교회의 질서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신앙성장에 현실적인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십일조와 성수주일을 절대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거와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대 기독교인들은 현실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너무 과격하게 전함으로써 유대교와 충돌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들과 달리 바울은 과격한 쪽을 선택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복음의 본질에 천착한 겁니다. 16절이 중요합니다. 다시 읽을 테니 잘 들어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고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서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사실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인생의 목표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옳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훨씬 포괄적인 뜻입니다. 자유, 행복, 성공, 기쁨, 구원 등등이 여기에 다 포함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영웅들을 살펴보십시오. 아브라함, 요셉, 모세,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은 모두 율법을 성실하게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잘하고, 사회 규범을 잘 지키고, 모범생으로 사는 사람들은 누가 봐도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사회가 그런 사람들을 인정합니다. 그런 인정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평생 율법의 행위에 매달립니다. 바울은 그걸 부정합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b).
근거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도 이미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시 143:2절은 이렇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롬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이 볼 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에 빠지고,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죄에 빠집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바꿔 말하면, 법을 잘 아는 법조인들은 법과 함께 죄에 빠지고,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법 없이 죄에 빠진다는 겁니다.
둘째, 율법은 사람을 상대적인 우월감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경건생활을 더 많이 했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도덕으로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치우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당연히 죄인으로 여겼고, 더 나가서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는 유대인들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자신들만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도 이상한 사람으로 비쳤습니다. 예수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마 6:1-18절에는 유대인들의 세 가지 경건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이 나옵니다. 구제, 기도, 금식이 그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 세 가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표시가 나도록 열정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 표시 나지 말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 그들은 구제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도할 때도 거리서 서서 자랑하듯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표시 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라면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 중의 어떤 분이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 그분은 평생 교사생활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자신이 기도생활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다는 겁니다. 교사생활에 충실하니 교회의 기도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던 겁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옳습니다.
믿음의 길
바울은 의로움을 얻는 데에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실천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장이 허황된 것으로 들릴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다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그런 비판을 들을만한 구석이 우리에게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도덕재무장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 나쁜 건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런 운동을 펼친다고 해도 기독교인의 삶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본질만 왜곡시킬 위험성이 큽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신앙의 토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의 토대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분들 중에서도 바울의 이 말에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더 나가서 뭔가 어색하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설명에 좀더 귀를 기울이십시오. 바울은 삶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모르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자기의 영적 실존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처형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말고도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은 로마 시대에 많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일반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은 율법을 절대화하는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법을 절대화하는 로마의 정치 권력자들입니다. 종교와 정치를 대표하는 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종교법과 정치법이 악이라는 증거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율법의 무효화 선언입니다. 즉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바울의 표현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 더 이상 율법은 의로움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의 당연한 선택입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면 밤에만 필요했던 손전등을 손에서 내려놓는 거와 같습니다.
삶의 혁명전 전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혁명적으로 달라진 겁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는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 들리지요? 시인이나 예술가는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시와 예술이 자기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겁니다. 바울은 이제 종교적인 업적을 쌓는 방식으로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목사인 저의 입장에 비추어서 바울의 주장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목회에 성공해야 한다거나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거나, 내 이름을 떨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여기서만 내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목사나 신학자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저와 똑같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이런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이 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중심의 삶에 완전히 길들여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율법에 매몰되면 예수 사건, 즉 예수 세계에 들어올 수 없고, 예수 세계가 또렷하지 않으면 율법에 매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완전히 기울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존재지향적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 대목에서 혹시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오직 교회생활에만 전념하라는 말이냐, 하고 저의 설교를 오해할 분들은 없겠지요. 우리는 여전히 ‘육체’(사르크스)로 살아야 하기에 세상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삶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 모든 것들은 ‘믿음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을 이해하기 좋게 ‘해방’이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해방되었습니까? 그 해방을 향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까? 아니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율법의 강요에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까? 말이 해방이지 실제로는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아주 거대하고 매력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도 역시 많은 경우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울 혼자 이에 저항했습니다. 그 저항의 단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율법주의자들과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일종의 업적주의, 성공주의라 할 율법주의를 극복하고, 거기서 해방 받게 하는 힘입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믿으십니까? 믿기 어렵습니까? 아예 아무런 생각이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시기를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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