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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주현절 후 둘째 주일, 2019120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영과 바람

성경 읽기에서 진도를 내기 힘든 이유는 성경에 낯선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성경이 원자 물리학 저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낯선 단어 중에 대표적인 것이 성령’, 또는 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2 독서로 읽은 고전 12:1-11절에도 성령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1절의 신령한 것을 비롯해서 2, 4, 7, 9, 11절에 이 단어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런 단어가 나오면 이게 뭐지? 알 듯 말듯하다.’는 느낌이 들 겁니다. 거꾸로 어떤 분들은 성령, 또는 영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성령을 받아라.’거나 성령이 오셨다.’고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소외받는 기분이 듭니다. 자신들에게는 성령이 현실로 경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뭘까요?

, 또는 성령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는 영만이 아니라 바람, , 기운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고대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영과 바람을 같은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이걸 동양식으로 말하면 도()나 기()입니다. 바람은 우리가 잘 압니다. 실제 일상에서 경험하기도 하고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기가 이동할 때 나타나는 물리현상입니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공기 입자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공기 입자의 밀도가 높으면 바람이 강하고, 낮으면 바람도 약합니다. 달의 공기 밀도는 낮기 때문에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실제로의 느낌은 약합니다. 고대인들에게 바람은 신비로운 현상이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는 없으나 큰 힘으로 나타납니다. 없다가도 순식간에 생기고, 다시 사라집니다. 봄이 되어 따뜻한 바람이 불면 대지에서 온갖 생명체가 솟아나고 나뭇가지에 잎이 돋습니다. 가을이 되어 바람이 차가워지면 지상의 생명체들이 사라집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숨을 쉬기 시작하고, 사람이 죽으면 숨이 끊어집니다. 고대인들에게 바람은 생명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을 가리켜 헬라 사람들은 프뉴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바람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실제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하거나 희망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이 그런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이런 경험이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작곡가들과 화가들과 사진작가들과 건축가들은 예술적인 영감(inspiration)을 받아서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펼칩니다. 영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준비가 된 예술가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찾아온 영감을 붙듭니다. 사이비 예술가들은 이런 영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남의 것을 흉내 낼 뿐입니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곧 영입니다. 보이지는 않으나 실제로 예술적인 창조력을 발휘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을 고대 헬라사람들은 프뉴마라고 불렀습니다.

 

은사와 성령

성경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주어지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이 곧 성령입니다. 예술가들이 뛰어난 작품을 통해서 자신들이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듯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은사(카리스마)야말로 성령을 받은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전 12:1절에 나오는 신령한 것들’(프뉴마티콘)이 바로 성령의 은사, 즉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보통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대단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카리스마의 어원으로 본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은사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 현상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런 현상이 배타적인 은사주의가 되어서 복음을 훼손할 수 있다는 위험성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점을 짚고 바른 길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고린도전서를 쓴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8-10절 사이에 여러 종류의 은사가 나열됩니다. 오늘 우리가 알만한 것들도 있고, 거리가 먼 것들도 나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이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방언입니다.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방언만 따로 언급할 걸 보면 방언이 은사 문제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통해서 드리는 기도 형태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노래 장르인 랩(rap)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랩도 정도에 따라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긴 합니다. 방언을 외국어로 된 랩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으니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까지 나왔습니다.

방언을 하거나 그걸 통역하는 사람들은 뭔가 자신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신자들보다도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간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방언은 황홀경을 수반합니다. 일상에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는 특별한 것입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다녀온 느낌과 비슷하기에 자신의 경험을 유별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예배 중에도 방언 기도를 드렸고, 방언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방언이라는 은사의 위험성에 대해서 따끔하게 질책합니다. 방언만이 아니라 다른 은사들도 신자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자기를 그렇게 인정해주지 않으면 불만스러워집니다. 그게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현상이라서 어쩔 수 없는 거 같습니다.

은사 문제는 교회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수능 만점 받은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아주 뛰어난 암기력과 분석력과 성실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 요소들이 다 은사입니다. 세상은 그런 은사를 자랑스러워하고 인정합니다. 노래 잘 부르는 것도 은사이고, 축구 잘하는 것도 은사이며, 춤 잘 추는 것도 은사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카리스마를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은사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살면 좋습니다. 문제는 그걸 자기에 대한 자랑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의 은사와 다른 은사를 무시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졌던 은사주의가 오늘 이 세상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은사의 출처

바울은 은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오남용을 경계합니다. 은사의 오남용은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은사의 원천은 성령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은사와 성령과 교회가 어떻게 연관되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직분도 다양합니다. 은사의 종류는 앞에서 짚었듯이 8,9절에 나옵니다. 직분도 역시 은사에 속하는데, 그 종류가 28절에 나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성대가원, 교회 청소와 반찬 준비 등등이 다 포함됩니다. 모든 것이 성령의 선물, 즉 은사입니다. 어느 한 은사가 다른 은사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고전 12:12절 이하에서 은사의 유기적 관련성을 설명합니다. 교회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 , , , 코 등등, 몸의 지체는 각각의 기능을 통해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이 지체들이 서로 자기주장만 한다면 몸이 성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약한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에는 많이 배운 사람도 있고, 배움이 짧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어눌한 사람도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지체는 다양하지만 모두가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으니 서로 반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단순히 신앙적인 훈계나 덕담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교양을 갖추라는 말도 아닙니다. 은사의 원천에 대한 신학적인 인식이자 고백입니다. 각각의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고전 12:11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한 성령이 성령의 뜻대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은사라고 말했습니다. 방언을 주는 성령이 따로 있고, 설교를 하게 하는 성령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은사를 주는 성령은 한 성령으로서 동일합니다. 은사의 출처를 바르게 따라가면 성령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성령 안에서 모든 다양한 은사는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은사가 한 성령에서 온 것이라면 우리의 모든 은사는 당연히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합니다. 예를 들어서 대통령 비서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 비서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서관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근거는 대통령에 의해서 임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가 맡은 분야만을 절대화하고 다른 부서의 일을 무시한다면 비서실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저는 목사직이라는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은사가 성령의 선물이기에 저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 업무와 결과를 성령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설교를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성령과 친밀해지느냐가 중요합니다. 대구샘터교회가 주변에 좋게 소문이 나서 부흥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성령과 친밀해지지 못한다면 목사로서의 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이 은사 문제를 제 삶의 모든 것에 관계된다고 봅니다. 가족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이나 아버지라는 직분 역시 은사입니다. 남편 역할을 아무리 잘하고 아버지의 역할을 아무리 잘해도 나에게 성령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자기 역할을 잘한다는 것도 착각일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없으나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성령과 친밀해진다는 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거기서 많은 혼란이 발생합니다.

 

은사와 교회 일치

자신의 은사와 직분이 성령으로부터 주어졌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바울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7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은사를 개인이익이 아니라 공동이익을 위한 것으로 사용하느냐 않느냐 하는 게 핵심입니다. 공동이익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의 덕입니다. 교회에서 의견이 서로 나뉜다고 합시다. 자신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틀릴 수도 있고, 서로 옳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분명히 다른 신자가 잘못한 건데 왜 내 주장을 거둬들여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근본 진리가 허물어지는데도 공동체의 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조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야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합니다. 다만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너무 강해서, 즉 자칫 은사와 직분의 출처를 모르고 오남용함으로써 교회가 분열되고 신자들 사이의 친교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고,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은사와 직분이 모든 신자들의 공동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좀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여러 지체들이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하다고 말한 바로 뒤에 즉시 이 말을 했습니다. 고전 12: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결국 은사의 본질은 교회 안에 있는 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카리스마에 도취되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마음이 쏠린다면 그의 은사는 성령의 통치를 받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면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과 악령의 차이는 종이 한 장입니다. 악령에게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나타나기에 실제로 성령의 일인지 악령의 일인지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 목록을 열거하면서 영 분별도(10) 포함시켰습니다.

저는 앞에서 은사가 교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서의 은사도 결국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합니다. 다른 이들을 돌아보고 섬김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공동이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 은사에 매몰되어서 잘난 척하기 바쁜 세상에서 서로 돌보는 게 쉽지 않겠지만 은사의 본질을 알고 믿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혹시 그렇게 사는 건 손해 보는 거라든지, 그렇게 살고 싶으나 세상 현실이 그걸 용납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까요? 그건 오해입니다. 성경은 신앙적인 모범생이 되는 게 중요하기에 인생살이가 고달프게 되는 것 까지 다 감수해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시는 불편할 수 있으나 결국은 성경이 말하는 삶이 실제 삶에서도 생명을 얻는 가장 바른 길입니다. 여러분의 은사와 직분이 빛을 얻는 길이고, 더 나아가서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가르치는 일은 귀한 은사입니다. 가르침을 통해서 서로 같이 돌본다.’는 사실을 실제로 안다면 그 교사는 가르치는 행위 자체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빵집을 운영하는 사람도 빵을 통해서 고객들을 돌본다고 생각할 만 있다면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의사나 목사나 기업가나 노동자도 다 같습니다. 그런 기쁨을 알고 거기에 천착하기에 세상의 비열한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수단인 은사는 다양하나 은사의 출처인 성령은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12:1-11
https://youtu.be/bO-fQeVCE2A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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