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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은총의 깊이로!

(사 63:7-14), 12월26일, 성탄절후 첫째 주일

 

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2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4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오늘 설교의 본문인 사 63:7-14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른 일종의 예배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과 형식은 시편과 비슷합니다. 이 노래가 불리기 시작한 때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한 기원전 587년이 약간 지났을 때입니다. 민족적으로 어둠의 시절이었던 이 시기에 많은 문서들이 기록되었고, 그런 문서들이 구약에 포함되었습니다. 사람은 원래 고통의 시절에 근본적인 것을 질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파멸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가?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큰 불행이 닥칩니다. 사업에 실패도 하고, 실연을 당하기도 하고, 큰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도저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 앞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민족적인 구렁텅이 앞에서 부른 찬송입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이를 탄식 시(詩)로 분류합니다.

 

    고난과 은총

     이사야는 고난의 시절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사 63:7) 지금 유대 민족이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느냐 아니냐 하는 위기상황에서 여호와의 자비, 사랑, 은총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것이 아무리 문학적인 수사가 곁들여진 시라고 하더라도 한가해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영적인 능력입니다. 고난이 심할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더 절실하게 노래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그들의 영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총에 매달렸습니다. 그런 저력으로 지난 수천 년 동안 계속된 고난의 역사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8절부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셨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반복된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영적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하나님이 다른 민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스라엘만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그 증거는 제 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연인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특별한 일이 없는 것 같지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합니다. ‘내 사람’이라고 느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름으로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다른 사람에게는 시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두 사람에게는 절대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들의 고유한 영적 통찰력이 거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는 8b절과 9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과 가까운 또 다른 표현은 시편에 흔하게 나오는 ‘나의 양’입니다. 이스라엘을 백성이라고 할 때 여호와는 왕이시고, 양이라고 할 때는 목자이십니다. 왕은 백성의 생명을 보장하며, 목자는 양의 생명을 지킵니다. 왕은 백성의 구원자이고, 목자는 양의 구원자입니다.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에(9절) 동참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바로 환난의 순간에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하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동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술도 모든 사람에게 실증적으로 확인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함께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그렇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유한 영적 통찰력이 작용합니다. 마치 일반 사람들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그런 장면에서도 시인은 특별한 시적 감수성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난 가운데 동참했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경험이 있을까요?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은총의 깊이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환난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은총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면 경험될 수 없습니다. 은총에 대한 경험은 사물을 확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돈벌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목회와도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깊이만큼 보입니다. 이는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다의 파도만 봅니다. 그것이 바다의 모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발만 담급니다. 그것으로 바다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스쿠버다이빙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다 밑으로 내려가서 많은 걸 볼 수 있겠지요. 해변에서 파도만 보고 그것이 바다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바다 속의 세계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영적인 바다 밑을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는 고난도 실력을 갖춘 스쿠버와 같습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은총의 깊이를 좀더 따라가겠습니다.

 

    갈라지는 물

     이사야는 11절부터 모세 전승을 거론합니다. 모세 시절은 고난의 대행군과 같은 때였습니다. 그의 출생부터가 그렇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 태어난 아이가 남자면 모두 나일강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도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갈대로 작은 배를 만들어 세 달된 모세를 그 배에 태워 나일 강에 띄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그 아이를 발견해서 살렸습니다. 모세는 기적적으로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80년 후 홍해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애굽을 탈출한 모세는 홍해 앞에서 길이 막혔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홍해 전승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 전승을 이사야가 그대로 받아 쓴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이사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사 63:13)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밑으로 땅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해변에서 홍해 밑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양쪽으로는 여전히 바닷물로 된 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만약 물이 다시 땅을 덮친다면 그들은 모두 수장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다는 확신으로 기쁨으로 행진하듯이 홍해 안으로 들어갔을까요? 그게 과연 신나는 일이었을까요? 적지 않은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비록 두렵지만 그들은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원래 그 깊은 곳은 악한 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깊음은 위험한 곳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입니다. 깊이로 내려왔지만 어쩌면 밖으로 나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아차 하는 순간이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멸절할 수밖에 없는 장소였습니다. 죽음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 전승을 리얼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지금 물리학적 사실이나 고고학적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하나님 경험을 말하는 겁니다. 그들은 홍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홀로코스트가, 즉 유대인 대학살이 발생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홍해의 깊은 곳을 경험했을 겁니다. 순식간에 바닷물이 땅을 집어삼킬 것과 같은 경험 말입니다.

홍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광야에서 말이 잘 달리듯이 그들도 홍해 깊은 땅을 넘어지지 않고 걸어서 건넜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신 이가 누군가요? 그가 어디 있나요? 이사야는 지금 탄식하듯 바로 그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외칩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홍해의 깊은 곳을 편안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문학적인 수사력을 발휘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아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사 63:14a) 골짜기도 깊은 곳이긴 합니다만 홍해의 깊은 곳과는 다릅니다. 골짜기는 가축이 편안히 물을 마시고 풀을 뜯을 수 있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처럼 홍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이사야는 지금 홍해의 깊은 곳에서 골짜기의 평화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깊은 곳에서 생명의 평화를 내다봅니다. 인간의 눈에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말이 될까요? 혹시 망상이 아닌가요? 그것을 현실로 살아가는 태도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런 신앙의 눈이 열리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총을 깊이로 경험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것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가 잘 풀리는 것에서만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잘 풀린다면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홍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날이 옵니다. 모든 희망이 끊기는 것과 같은 순간이 옵니다. 아무리 인생이 잘 풀려도 죽는 날이 올 겁니다. 여러분이 홍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평소에 그런 깊은 곳을 외면한 채 재미있는 인생만 생각했다면 죽음은 말 그대로 절망으로 다가올 겁니다. 살아있는 동안 절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처럼 편히 쉴 것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홍해의 깊은 곳에 내려가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수를 살다가 죽은 분이 아닙니다. 사고를 만나거나 병으로 죽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한탄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처럼 그분의 십자가 죽음 이후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더 이상 혼자 고독하게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성탄절 후 첫째 주일입니다. 어제는 성탄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해야 할 이유가 아주 분명합니다. 오늘 이사야에게서 전해들은 은총의 놀라운 깊이를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홍해의 깊은 곳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영적 시선을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리십시오. 그분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십시오. 그 은총을 실제로 살아내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로, 삶으로 전하십시오.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은 죽음보다 깊습니다.

이사야 6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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