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22년 10월2일
바울과 디모데는 스승과 제자 관계입니다. 요즘 식으로는 멘토와 멘티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후서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는 디모데에게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관해서 조언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지금 우리 눈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로 바나바와의 생각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갈라선 다음 루스드라에 들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어서 그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할례를 받게 한 다음 선교 여행단에 합류시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보존되다가 신약성경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로부터 2천 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이 편지로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과 고난
바울은 딤후 1:8 후반절에서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이 고난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짚은 겁니다. 바울 자신도 실제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육체적인 고난은 접어두고,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자기가 속했던 유대교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같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서도 사도적 권위가 없는 ‘자칭’ 사도라는 조롱도 받았으며, 자기가 개척한 교회로부터도 율법을 부정하는 극단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전체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시작 자체가 고난이자 대재난입니다. 몰트만은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책 67쪽 이하에서 “골고다의 대재난과 기독교의 시작”이라는 소제목으로 그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이런 전통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복음을 단순히 종교적 교양이나 감수성에서만, 즉 낭만적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고난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철저하지 못하거나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복음과 고난이 병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영적인 노숙자’라는 말로 종종 표현했습니다. 조금 세련된 단어로 바꾸면 ‘순례자 영성’, 또는 ‘수도원 영성’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난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 즉 일종의 마조히즘이 아닙니다. 고난을 위한 고난은 없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바울의 말은 고난에 맞서라는 뜻입니다. 처세술로 맞서는 게 아닙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심리적인 자기 암시로 맞서는 게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알아야만 고난에 맞설 수 있습니다. 영적 멘토인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9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 문장에서 두 가지 관점이 대비됩니다. 하나는 우리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KJV에서 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not according to our work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입니다. 학생들이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나오는 ‘not, but’ 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9절을 압축하면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구원은 ‘공짜’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니까 자기가 뭔가를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애를 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갑니다. 힘이 들어갈수록 복음의 능력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수영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물에 자기 몸을 맡기지 못하고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주는 경우와 같습니다. 힘이 들어가면 결국 짜증과 분노와 남 탓과 자기 의와 위선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슬픔과 자포자기와 자기연민에 떨어집니다. 그런 행태를 복음서에도 보고 오늘날 교회에서도 보고, 우리 자신에게서도 봅니다.
인정욕구
자기 행위를 따른다는 게 무엇인지는, 그리고 그게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 겁니다. 그보다는 왜 인간은 자기 행위에 그토록 집착하는지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인정욕구가 그 대답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학생들은 선생에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또는 대통령에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인정받으려면 그만한 업적을 보여야만 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자기와 다른 이들을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데에는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행위와 업적이 절대 기준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는 분노가 쉽게 표출되고, 순식간에 안색이 변합니다. 현대인들은 화를 휴화산처럼 안고 사는 듯합니다. 싸움을 본질로 삼는 듯이 보이는 행태가 자주 드러납니다. 그게 국가 단위에서는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말씀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KJV은 ‘영원 전부터’를 “before the world bega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말하자면 ‘빅뱅’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라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단순히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우주의 차원에서 봅니다. 이게 실제로 이게 말이 될까요?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라는 요 1:1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께서 어떻게 140억 년 전에 일어난 ‘빅뱅’ 순간에 존재했다는 말인가요. 이런 표현을 우리가 경험하는 연대기 방식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생명의 시간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에게서 생명이 완성되었기에 우주 전체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은 빅뱅을 포함한 우주 전체와 연결되었습니다. 그 우주 전체는 아득한 시간입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행하셨기에 은혜이며, 그 은혜는 빅뱅 이전 시간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시원적 깊이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빅뱅 이전의 시원적 시간과 연결되기에 정말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빅뱅, 바로 그 순간에 닿아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즉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의 실질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물을 차례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문장을 압축하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죽음의 세력이 폐기되었다.’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고속도로 속도 제한이라는 도로교통법이 폐기된 것입니다. 폐기된 법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곧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인데, 믿음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신약성경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죽음의 세력이 폐기되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라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이를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죽음의 폐기처분입니다. 이 사실보다 더 복된 복음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5, 6년 전 이야기입니다. 대구 샘터교회 어느 교우가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토로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정 목사 설교에 죽음이 너무 자주 나와서 듣기 불편하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늙는다는 사실로 인해서 우울해질 때가 많으니, 설교 시간만이라도 밝고 즐거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죄와 죽음 문제로 여러분의 마음을 일부러 불편하게 하거나, 더구나 심리적으로 위협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죽음과 부활을 말하니까 저도 말하는 겁니다.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다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지 않습니까. 죽음의 두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음이 폐기되었다는 복음을 전하는 중입니다.
실제로는 예수 믿어도 우리가 죽는 건 여전히 분명합니다. 병들고 늙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종종 가정생활이나 자식 교육에서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교회 생활에서도 오류를 자주 범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죽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지구의 원소로 해체됩니다. 누군가 우리 이름을 기억하고, 우리와 공유한 삶의 경험을 기억하겠으나,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아무도 우리를 기억조차 못 합니다. 이런 마당에 예수께서 죽음을 폐기했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당장은 죽어도 나중에 다시 살아난다. 2) 육체는 파멸되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 3) 예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삶이 죽음의 극복이다. 4)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다. 5) 개인은 파멸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영원히 산다. 6)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대답을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만 아무도 딱 떨어지는 하나의 실증적인 대답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근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가르침이 본래 종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려면 성경이 생명의 본질을 어떻게 보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초보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창조 생명
신구약 성경이 생명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은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요즘 인간이 자랑하는 자연과학과는 다릅니다. 과학은 기존에 있는 것을 활용하는 기술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지구 충돌 가능성이 큰 소행성에 우주선을 발사해서 궤도를 조금 비껴가게 하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과학 성과입니다. 그런 과학 성과도 창조는 아닙니다. 기존의 것의 재활용이나 성능 향상 정도입니다. 창조는 무로부터의(ex nihilo) 창조입니다. 이런 창조 능력만이 생명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은 우리가 건강하고 풍요롭게 생명을 누리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으나 거꾸로 생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전쟁 무기가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현대 과학의 도움으로 이룬 풍요가 기후 위기를 불러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세상이 더 평화로워지리라는 기대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자율주행을 비롯하여 인간 노동이 로봇으로 대체되는 미래가 완벽한 세상이 되리라는 생각은 값싼 로망이자 추상입니다. 과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확신이 지난 인류 역사를 파멸의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앗시리아, 애굽, 바벨론, 로마, 영국,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의 제국은 나름 첨단의 과학기술과 문명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즉 창조자가 되려는 시도입니다. 그럴 때마다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파괴했습니다.
이 문제를 개인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인생을 완성해보려고 전력 질주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우리 삶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엄중한 실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피조물이면서 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단적으로 100년 전 사람들보다 오늘 우리가 더 선한지 아닌지를 물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생명 완성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런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계신다는 걸까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데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행위와 그의 운명 전체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관통하는 사건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이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사망이 폐기 처분되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온 세상에 외쳤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제시하는 교양과 유대교가 제시하는 율법 준수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생명 구원을 여전히 실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설득할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라면서 하나의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삶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외로움입니다. 여러분이 다 경험했듯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외로움이 근본에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잠시 외로움을 잊을 뿐입니다. 외로움의 뿌리가 자기 소멸이라는 죽음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죽는 순간에 우리와 동행할 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자식과 배우자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하심)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예수님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을 믿고, 죽음을 우회하지 않고 평화롭고 용감하게 정면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이 폐기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생명을 얻었다는 의미이자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놀랍고 신비로워서 세상이 시작하기 전부터, 즉 아득하고 시원적인 깊이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오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런 은혜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알고 믿는 사람의 영혼은 생명감으로 충만하게 되겠지요.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바울이 부럽습니다. 최소한 그를 흉내라도 내면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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