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성령강림후 여섯째 주일, 2015년 7월5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바울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이합니다. 태생적으로 유대인이고, 로마 시민권자이며, 박학다식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뒤늦게 기독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외모는 시원치 않고, 말은 좀 서툴렀지만 글은 잘 썼습니다. 영성가, 사상가, 문필가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의 편지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10권 내외로 보면 됩니다. 그의 편지가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지금처럼 깊이 있게 발전되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날과 달리 바울이 당시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볼 때 바울은 굴러온 돌이기 때문에 사도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는 신학이나 성질에서 까칠했습니다. 복음의 순수성을 배타적으로 지켜내려고 했고, 다를 이들과 대충 어울리는 걸 못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평생 고생하다가 어딘가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생전에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그 편지에 자신의 신앙을 정확하게 진술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비애와 고통에 대해서도 조금씩 적어놓았습니다.
그런 흔적을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가 떠난 뒤에 다른 교회 지도자들이 와서 바울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적대자들로 인해서 바울이 처음 전했던 복음이 변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는 마치 정통교회에 신천지 교도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흔드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바울에 대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보다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울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상황을 바울은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고후 11:4절에서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습니다. 예수를 잘못 전하는데도 당신들이 그것을 그대로 용납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보다는 적대자들의 말에 더 솔깃해한 이유는 바울의 영적인 권위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들에 비해서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다 적대자들의 선동에 의한 결과입니다. 고후 10:10절에 따르면 그들은 바울이 편지에서만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직접 대면하면 시원치 않은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울 스스로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고후 11:6)라고 고백하는 걸 보면 이게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큰 약점은 앞에서 짚은 것처럼 바울이 열두 제자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은 열두 제자 출신의 사도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고후 11:13,14절에서 그들을 거짓 사도라 비난하면서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랑거리를 쏟아냈습니다. 그런 자랑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허풍이라고 하더라도 그럴듯한 이야기에 영향을 받곤 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건 뭔가 크게 왜곡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어쩔 수 없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해서 적대자들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자신을 변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자기를 자랑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분별력이 떨어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고후 1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데 나를 용납하라.’ 자랑을 할 테니, 좀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자랑 중의 하나가 고후 12:1절에 나오는 ‘환상과 계시입니다.
14년 전 경험
바울은 고후 12:2절 이하에서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한 한 사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사람은 14년 전에, 즉 기원후 40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자기의 경험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글쓰기 기법입니다. 그가 이끌려갔다는 셋째 하늘은 고대인들의 우주관에서 나온 겁니다. 그들은 하늘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게 우스꽝스러운 게 아닙니다. 현대 물리학도 4차원, 5차원, 또는 10차원까지 말합니다. 4절은 그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다시 풀어서 말합니다. 거기서의 경험을 4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런 글을 읽으면 여러분들은 생각이 복잡할 겁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셋째 하늘, 즉 낙원이 도대체 뭐야, 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낙원은 죽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낙원에 갔다가 돌아온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비록 낙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자기도 고린도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비한 어떤 일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적대자들과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바울을 향해서 신비를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유대와 헬라의 신비 현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인지는 로마서를 읽으면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도 이런 신비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고전 14장에서는 신비한 언어 현상인 방언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도, 그는 스스로 방언 경험이 깊다는 사실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셋째 하늘과 낙원으로 묘사된, 또는 방언으로 묘사된 현상은 일종의 종교적 엑스타시(황홀경)입니다. 지금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경험입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셋째 하늘과 낙원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토를 달았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똑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이게 뭘까요? 저는 설교하고 있는 2015년 7월5일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아득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합니다. 때로는 2천년 전으로 가기도 하고, 또는 2천년 후로도 갑니다. 제가 몸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모르기도 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산신령처럼 도술을 부리거나, 시간 여행을 할 줄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의 모든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빛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 빛이 강렬할 때도 있고, 흐릿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이 낙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절대적인 세계는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 이것은 곧 부활 경험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을 남에게 들은 정보로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 실존에서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이 14년 전에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 만남의 리얼리티가 명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게 셋째 하늘이며, 바로 낙원입니다.
바울은 지금 적대자들의 선동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자신에게도 환상과 계시에 대한 분명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종의 자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랑하면서도 그는 자기의 자랑이 불러올 위험성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볼 사람들이 바울을 과대 포장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자랑은 그만 둔다고 했습니다(6후). 오히려 그는 지금 역설적으로 자신이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까발리는 겁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7절)
바울은 황홀경에 빠져서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의 삶입니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황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일상을 외면할 수 없고, 외면서도 안 됩니다. 그는 일상에서 육체의 가시를 갖고 있습니다. 그 가시는 난치병입니다. 그는 환상과 계시 경험으로 교만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병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낫기 위해서 바울은 세 번 간구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에게서 놀라운 대답을 듣습니다. 9절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런 표현도 낯설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몸이 고달픈 마당에 무슨 은혜가 충분하다는 말이냐, 온전한 정신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런 걸 보면 광신자 같아, 하고 말입니다. 그런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합리화에 빠지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몸이 아픈 거 자체가 좋은 게 아닙니다. 가난 자체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요소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학이 아니고, 냉소주의도 아닙니다. 가난 예찬도 아니고, 고통 미학도 아닙니다. 다 극복되어야 할 요소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생명의 능력과 풍요로움에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능력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과 명예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목표를 거기에 둡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합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채찍과 당근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사람이 정말 강해질 수 있을까요? 그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향한 뱀의 유혹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선악과를 취하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지만, 결과는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입니다. 눈이 밝아졌지만 하나님을 직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삶의 중심이 점점 공허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다 알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이런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리얼리티
도대체 주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은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제 삶을 풍요롭게 살도록 선물을 주셨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14년 전 바울이 경험한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황홀하게 경험된 그것이 부활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은 하나님만이 고유한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생명의 완성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풍요롭게, 그리고 강력하게 세상을 살게 될 겁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충분하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 경험이 확실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손에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대개는 그걸 막연하게만 놓아둔 채 다른 열정으로 교회생활을 합니다. 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부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야 하는 질문과 같아서 단번에 완전한 대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저는 바울의 진술에 기대서 부활과 연루된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여러분이 부활 경험에 가까이 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은혜가 족하다는 말을 한 뒤에 자신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9절). 이어서 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약한 걸 자랑하고, 고난을 기뻐하는 이유는 그럴 때만 주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난 게 많고, 가진 게 많으면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 심취하는 겁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모든 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그럴 듯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호수에 비친 자기 용모에 반해서 호수에 빠져들어 죽었다는 헬라 신화의 나르시스처럼 자기에게 사로잡혀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연민, 자기집중을 성경은 하마르티아, 즉 죄라고 말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살아있다 하나 실제로는 죽은 겁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말했을까요? 옳고 그른 것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거꾸로 약한 사람들, 궁핍과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기대할 게 없으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복에서 가난한 자,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단순히 종교적으로 값싼 위로가 아니라 실제 삶의 능력이 무언지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인생 실패를 가리키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넉넉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사실을 영영 경험할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겁니다. 부정한다는 것은 관심을 축소시킨다는 뜻입니다. 자기와 관련된 것에 대한 관심을 축소시키며 사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요체입니다.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자기로 인해서 가려졌던 부활생명을 황홀경처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며, 그때야 비로소 여러분은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는 바울의 고백을 이해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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