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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마 14:22-33)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14:22-33,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 202089

 

 

예수님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던 3년 동안 요즘 우리의 눈에 마술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병을 고친다거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입니다. 아주 특이하게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마 14:22-33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소위 오병이어사건(14:13-21)이 끝난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 하시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돌풍이 몰아쳤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크게 요동쳤습니다. 제자들은 사투를 벌였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간 뒤에 예수님은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왔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의심하는가?

그 긴박한 장면에서 베드로는 엉뚱한 말을 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라.”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휘몰아치는 바람을 무섭게 느끼면서 베드로는 물속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붙들어주시고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당시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팩트가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런 초능력쯤은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수 없지는 않겠으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물 위를 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범주 안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은 많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갈릴리 호수의 돌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밤새도록 바람과 파도와 싸우느라 지쳤습니다. 제자 중에서 많은 이가 어부들이었다고 해도 파도와 바람이 그치지 않으니 정신 차리기 힘든 상황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탄 배는 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언덕에서 내려와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기다리면서 물가를 걷다가 제자들이 탄 배가 가까이 오자 배에 오르려고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바람과 파도, 이로 인한 물보라가 여전히 세찼기에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 이야기를 잘 아는 분들은 이와 비슷한 다른 사건을 기억할 겁니다. 8:23절 이하를 따르면,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는 예수님의 활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기에 배를 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자 호숫물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위태로운 그 순간에 예수님은 배 앞머리에 누워서 잠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나온 말씀과 거의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어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벌어진 이 두 사건은 동영상 카메라에 담긴 게 아닙니다. 제자들의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입니다. 기억은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이야기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전승되었기에 그 과정에서 약간씩 변형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에는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마가복음(6:45-52)이나 요한복음(6:16-21)에 나오지 않는 베드로 이야기가 보충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전하려고 그 이야기를 첨부한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사건을 순전히 팩트의 차원에서 전하려 했다면 마가복음에 베드로 이야기가 들어가든지, 아니면 마태복음에 베드로 이야기가 빠져야 합니다.

이 전승이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다음입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에 겁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왜 무서워하느냐, 또는 왜 의심하느냐, 하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부족, 또는 작은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이 복음서를 받아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우리도 똑같아.”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믿음이 작은지, 믿음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물어야 합니다.

복음서는 모두 믿음에 관한 한 가지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5:21절 이하에 가나안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의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에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매우 모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복음서에 지천입니다. 한 군데만 더 보겠습니다. 17:14절 이하에 따르면 어떤 여자가 간질에 걸린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이 아이의 간질을 고치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왜 자신들은 고치지 못했는가,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서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만 있으면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할 수 있고, 호수 위를 걸을 수 있고,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난치병도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런 질문 앞에서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그런 크고 작은 능력을 행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간절하게 원하는 반응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그런 특별한 일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믿음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반응입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반응 사이의 적당한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하실 겁니다. 저도 그중의 한 사람이겠지요. 제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여러분에게 설명할 테니 참고하십시오.

 

믿음이 작은 자

믿음이 작은 자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크게 책망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작았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아예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걸 포기했을 겁니다. 제자로서의 믿음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걱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걱정을 쉽게 극복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당한 걱정은 바람과 파도입니다. 배가 난파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제자들은 한편으로 예수를 향한 믿음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장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는 생존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의심입니다. 예수님을 의심한다는 게 아니라 믿음과 걱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속으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의심에 떨어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완전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현실의 걱정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최선의 길은 믿음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복음서의 모든 내용이 믿음을 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서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그것 한 가지를 말합니다. 아니 신구약 전체가 믿음을 말합니다. 이게 간단한 문제라면 성경이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하지 않았을 겁니다. “믿습니다.”라는 말을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하고 외치고 기도해도 잠시는 하나님을 신뢰할지 모르겠으나 그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살다 보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해집니다. 세상의 걱정거리는 더 크게 느껴지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촉수는 점점 무뎌집니다.

믿음의 깊이는 심오한 신학과 영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여러 번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친구 사이도 가까워질 때 우정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예술도 그렇습니다. 예술의 깊이는 예술 안으로 들어갈 때 경험됩니다. 생물학과 물리학도 비슷합니다. 생명 현상에 가까이 갈 때 생물학의 깊이가 열리고, 사물 현상에 가까이 갈 때 물리학의 깊이가 열립니다. 요즘 저는 빌 브라이슨의 바디(THE BODY- A Guide for Occupants)라는 책을 읽는 중입니다. 몰랐거나 어렴풋이 알던 몸 현상을 깊이 알아가면서 몸에 가까이 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에게 문제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려는 생각 자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깊이를 어떻게 맛볼 수 있겠습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려는 생각 자체가 없다기보다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게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또는 오해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기도 열심히 하면 응답을 받는다거나 십일조 헌금을 바르게 드려야만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모범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강조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의 열매는 자기 의()입니다. 비교적 건전하고 교양 있는 기독교인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영혼의 만족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다는 말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최고로 아름답고 선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실질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설명이라서 실망하셨을까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저는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제가 풀어서 설명할 테니, 여러분의 생각과 같은지 아닌지를 살펴보십시오.

1) 우리의 삶은 몽땅 하나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하나,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것이 아니니 어딘가 부족해 보여도 크게 불평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서 텃밭에서 소출한 채소를 가져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걸 선물로 받은 교우들은 오이나 호박에 흠집이 났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 그리고 현재 인생도 하나님이 하늘나라 텃밭에서 재배한 거룩한 채소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선물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실감이 갑니까?

2) 하나님의 선물인 우리의 삶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과 같습니다. 비유적으로 우리는 모두 연봉 100억 원을 받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를 알면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1천만 원을 더 받는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지금 두 발로 걷습니다. 대단한 사건입니다. 지구에 사는 영장류 250종 가운데서 인간만이 자유롭고 화려하게 두 발로 걷고 뜁니다. 초기의 인류 조상은 6백만 전부터 두 발로 걷기 시작했으나 지금처럼 완성된 직립 보행까지는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진화의 역사는 돈으로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100억 원으로도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걸 우리가 지금 공짜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 주변에 무수하게 많은 생명체와 사물이 있습니다. , 나무, 구름, , 연필 등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걸 돈으로 계산한다면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이런 설명이 궤변처럼 들리십니까?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도 역시 돈으로 계산이 안 될 정도로 특별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절정에 들어와 있습니다. 모두 왕자이고, 공주이며, 최고 부자이기에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어떤 일에도 약올라 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설명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에 관해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바람 불고 파도가 치는 갈릴리 호수를 항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붙들어주시리라 생각하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이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의심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과 파도가 갈릴리 호수를 뒤집어놓기에 우리가 탄 인생이라는 배는 계속 흔들립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함께 기도해달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받고서도 잠들었던 세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26:41).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고 싶으나 종종 의심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요?

다시 오늘 성경 본문 마지막 단락으로 돌아가십시오.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배에 오르셨는지가 관건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함께하면 풍랑이 잦아든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하여 그들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33절에서 예수께 절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이 짧은 문장에 초기 기독교의 모든 신앙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즉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현실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배에 있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에게 절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이르고 싶지 않으신가요?

마태복음 14:22-33
https://youtu.be/L8JBTrKk9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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