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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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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4. 합 1:1-4, 2:1-4

하박국은 기원전 7세기 초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예언자였습니다. 기원전 7세기 초는 형제 나라인 북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이미 오래 전에 멸망당했고, 지금 하박국이 예언을 선포하는 남 유다는 그 앗시리아에 정치적으로 속국 신세를 면치 못하던 때입니다. 이제 앗시리아의 힘이 점차 약해지면서 바벨론이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는 흡사 조선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던 20세기 초나 지금의 우리와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대치하는 분단국가입니다. 남한에는 60년 가까이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입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우리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 있습니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은 나름으로 경제적인 발전과 정치적인 민주화는 달성했지만 경제의 양극화, 지역감정, 과도한 사교육열, 세대 간의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 있습니다. 2천6백 년 전 하박국의 탄식이 남의 소리가 아닙니다.

못 본 척 하는 하나님
하박국의 탄식을 들어보세요. “야훼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1:2) 그들은 원래 야훼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하게 선택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셨다고 믿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그 역사적 사건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당한 형편은 앞이 깜깜할 정도로 어둡습니다. 오랫동안 식민통치를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국의 등장으로 그 미래가 더 불투명합니다. 이제는 야훼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야훼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3a절에서 하박국은 조금 더 노골적으로 야훼 하나님에게 하소연합니다.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못 본 체하시는 증거는 세상 삶의 근본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3b,4절)
하박국은 왜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하나의 대답은 하박국의 시대가 실제로 오늘 우리에 비해서 훨씬 나빴을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피곤하기는 하지만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받지는 않습니다. 건강하기만 하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실업률 문제도 직업에 대한 그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기 때문이지 실제로 일거리가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극빈층 문제는 물론 심각합니다. 결식노인들과 아동들도 있고, 노동권을 확보 받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들도 있으며, 이 사회에서 완전히 따돌림 당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어느 사회에나 없을 수 없습니다. 소위 선진국과 복지국가에도 그런 이들은 나옵니다. 오늘 한국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생존의 위협은 이미 지났습니다. 하박국 시대는 우리와 전혀 달랐습니다. 하박국 1,2장 전체를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특히 힘이 없는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일상으로 경험했습니다. 다른 열강에 의해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박국이 탄식하는 다른 하나의 대답은 그가 지나치게 비관론자였을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문제를 훨씬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것을 비관론이라고 한다면 하박국의 한탄은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태를 일부러 나쁘게 보려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세계를 뚫어보고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당하게 될 그 고통스러운 미래를 미리 뚫어보고 탄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박국은 지금 그 어디에서도 탈출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 왜 이런 험악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 앞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의 사정을 못 본 체하십니까? 그는 이 사태를 하나님이 외면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다른 예언자들과 시편기자들도 이런 하나님의 외면을 종종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사랑이 충만하고 능력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함께 하는 곳에는 당연히 정의와 사랑이 가득해야 하지만 세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게 아닌가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해서 그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치고, 민중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경험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것을 극복한 하나님의 부활사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일종의 신앙 만능론, 기도 만능론입니다.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대박을 터뜨린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은 바로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 책은 불가능한 일이 앞에 놓였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기도하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 이전에는 브루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가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도 결국 기도를 통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대중 설교자들은 모두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출세 이데올로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에 대한 관심일 뿐입니다.
지금 하박국 예언자의 영적인 상황은 야훼 하나님이 자신과 예루살렘 주민을 못 본 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담합니다. 그 어디에도 법과 정의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대개의 사람들은 나 몰라라 하거나 대충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 일신상에 큰 어려움만 없다면 법과 정의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런 절망 중에서 하나님과 싸웁니다. 2:1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던진 질문에 무슨 말로 대답하실지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 기다려보리라.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기다려보리라.” 하박국이 던진 질문은 하나님의 선민인 예루살렘 주민을 하나님이 왜 외면하는가, 하는 겁니다. 아마 주변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예루살렘 주민을 비웃으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당신들의 꼴을 보니 당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야훼 하나님이 당신들을 외면하는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은 졸고 있든지 어디 여행을 떠났든지 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지금 하박국의 질문은 단지 하박국 자신의 탄식일 뿐만 아니라 주변의 조롱까지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탄식을 내뱉을 때가 있을 것이며, 주변에서 그런 질문을 듣기도 할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왜 그 모양이냐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거 아니냐 하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면 믿음생활을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이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에게 대든 하박국은 무슨 대답을 들었을까요? 이것은 바로 오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대답입니다.

믿음으로 산다.
야훼 하나님은 하박국 예언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2:4b) 개역성서는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의 ‘신실함’이나 개역의 ‘믿음’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성서적으로 신실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며, 믿음은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바른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게 바른 대답일까요? 엉뚱한 대답인가요? 지금 하박국은 이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따졌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의 삶이 왜 이렇게 허물어졌냐고 한탄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냐 하고 따지듯이 호소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그가 들은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답은 별로 타당한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제가 대답을 했다면, 너희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든지, 아니면 너희를 더 강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훈련 중이라고 했겠지요. 또는 조금만 참으면 모든 일들이 잘 될 거라는 대답을 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대답들이 구약성서에 간혹 나오기는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박국이 들은 대답은 조금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대답이 틀린 게 아닙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대답은 옳습니다. 이 대답은 문제 해결의 차원을 가장 궁극적인 곳으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우리의 삶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이며, 완성자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지금 세상을 끌어가십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국가적 위기를 만날 때마다 야훼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외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모든 위기 극복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너무 교리적으로만 듣지 마세요. 교회에 잘 나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곧 야훼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추종하던 삶에서 그 삶의 근원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첫째,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이 세상의 것으로는 온전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건 너무 상투적인 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세상의 것들이 많아야 우리가 풍족하게 먹고 사는 게 아니냐 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세상의 경험이 여러분에게 준 큰 착각입니다. 동네 친구들과 딱지나 구슬치기를 하면서 지낼 때는 딱지와 구슬이 많아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른이 되면 그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제가 지금 세상의 물질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먹고 사는데 필요한 수단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충분하게 확보된다고 해서 우리가 생명을 무조건 얻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풍족한 삶 가운데서도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잘 아시지요? 아무리 많은 것을 채워도 사람의 영혼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했고, 루터도 비슷하게 말했듯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둘째,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삶의 조건들은 늘 굴곡이 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한탄을 다시 보십시오. 그는 지금 못 견딜 정도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 지경으로 타락하고, 이 지경으로 험악해졌냐고 한탄합니다. 예루살렘에 법과 정의를 바르게 세워달라고 호소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다는 대답을 하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법과 정의는 당연히 바르게 세워야 할 것들이지만 그것은 늘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시대에 법과 정의가 늘 바르게 세워졌나요? 그것은 세우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세울 수 없습니다. 언덕은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내려가는 길이 있듯이 이 세상의 법과 정의는 어떤 사람에게는 올라가는 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려오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편하게 하는 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의 균형을 조금 맞추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법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최선으로 투쟁해야 합니다. 하박국도 역시 그런 세상을 위해서 싸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법과 정의가 완전한 세상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세상, 즉 유토피아에만 매달린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고 말겠지요. 의인은 비록 이 세상에서 법과 정의가 땅에 떨어져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생명의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는 것 같은 삶의 조건에서도 우리는 완전히 절망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안일한 삶에만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리의 모든 삶을 걸어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유기를 경험한 예수님을, 그러나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시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는 다른 게 아니라 이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아멘.
하박국 1:1-4,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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