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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창조절 열번째 주일, 11월3일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설교 제목을 미리 보신 분들은 어딘가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런 표현은 신약성경에만도 세 군데에 나옵니다. 롬 1:17, 갈 3:11, 히 10:38절이 그것입니다. 복음서에도 표현이 다르지만 비슷한 개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믿음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마치 만병통치 비술처럼 언급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믿음을 이해와 대립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어떤 대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앙적 태도가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대표적으로는 안셀름의 다음과 같은 경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 이해보다 믿음을 우선적 가치로 놓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더구나 하나님을 뜻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경구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입장을 오해하거나 극단적으로 적용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믿음’과 결부시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교회의 결정에 반대 의견을 내면 믿음이 없다고 몰아붙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정당한 질문을 해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남편에게 습관적으로 구타당하는 여자들에게 믿음으로 무조건 참으라고 말합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당시 교회는 자연과학 까지 종교적인 믿음으로 재단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요즘도 일어납니다. 믿음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영성이지만 자칫하면 퇴행적 광신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도대체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문장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는 세 단어가 나옵니다. 의인, 믿음, 산다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간단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 고백에 이르는 과정은 복잡합니다. 우리는 지금 돈이 있어야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려면 물론 돈이 필요합니다. 생활환경도 쾌적해야 합니다. 혼자 살면 외로우니까 가족도 필요하고, 친구도 필요합니다. 사회로부터 받는 존경도 우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요소입니다. 이런 식의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어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교적 건전하고 상식적인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것이 좋은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위에서 제가 믿음으로 산다는 문장이 신약성서에 세 군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구절들은 모두 구약 하박국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2: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가 이런 말을 갑자기 내던진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하박국 1장과 2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과 하나님의 대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3장은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시편과 비슷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합 1:1-4절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이고, 5-11절은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12-17절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이 다시 나오고 이어서 합 2장에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이 대답 중의 하나가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의 탄원 끝에 나온 내용입니다.


하박국의 탄원은 아주 분명합니다. 몇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합 1:2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어지는 구절도 이와 비슷합니다.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두 번째 탄원도 이와 비슷합니다. 13b절은 이렇습니다.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두 가지 문제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준동하는 악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도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합 1:3절에서도 분명하게 그 사실이 드러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은 악이 의를 박해하고, 악인은 무죄한 이를 괴롭히고, 불의가 판을 친다는 사실을 보고 그냥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문제라는 걸 사람들은 인식하지만 대개는 귀찮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또는 공연히 나섰다가나는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걸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하고 호소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합 1:2절에서 그는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라고 했고, 1:13절에서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버려진 느낌입니다.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걸었던 선지자에게 이런 상황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탄원하고 호소합니다.


하박국의 이런 탄원과 호소는 구체적으로 유대의 역사에서 나왔습니다. 하박국이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여호야김 재위 기간(기원전 608-598)과 거의 일치합니다. 당시는 유대를 개혁해보려고 애를 썼던 요시야가 죽고(기원전 609년) 유대가 1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기원전 598년) 그 시절입니다. 신흥제국 바벨론이 아시리아를 굴복시키고 인근 지역을 정복해나갔습니다. 그들의 폭력 앞에서 유대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한 나라가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를 핍박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불의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왜 그런 불의를 방관하시냐고 탄식하고 탄원을 올립니다.


합 1:5-11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하나님 당신이 일으키셨다는 겁니다. 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제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폭력적인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논리를 하박국 선지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의인이 나서서 악을 심판하면 모르겠지만 더 나쁜 악인이 나타나서 덜 악한, 또는 의인을 심판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12-17절에서 검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듯이 다시 이렇게 따지고 듭니다.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말을 한 뒤에 그는 2:1절에서 하나님이 무슨 대답을 하실지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따져보십시오. 그것이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합 2:2절 이하에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 당신의 생각을 전해주실 것이고, 하박국은 그것을 판에 새겨서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성전에 걸어놓으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을 본문은 묵시라고 표현했습니다. 묵시는 선지자들의 신탁을 가리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 묵시를 통해서 대답을 찾았습니다. 묵시, 또는 신탁, 즉 하나님의 뜻은 다 하나님의 고유한 ‘때’가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선지자는 썩어빠진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영혼이 피곤하였으며, 그런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능력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지자는 묵시를 전해 듣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즉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거짓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영성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정의로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소위 ‘갑을’ 관계는 더 강화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대기업 밑에 1차 하청, 2차 하청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관급 공사를 수주한 기업이 실제 공사는 하청 업체에 다 맡기고 자신들은 그 차액을 수입으로 잡습니다. 거의 불로소득에 가깝습니다. 얼마 전에 삼성 서비스 하청업체에 근무하는 분이 실제적인 경제적 어려움과 인격 모독적인 대우로 인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겁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계속해서 불법 선거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국정원을 비롯해서 기무사와 보훈처 등등, 법적으로 국내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관련 기관이 인터넷 선거 운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앞으로 법원의 판결이 나와야 전반적인 정황을 알겠으나 그동안 매스컴에 나온 보도와 국정감사, 그리고 검찰의 기소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것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는지 개인적인 것이었는지는 불문에 붙인다 하더라도 국기를 흔드는 불법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경제 수준에서는 세계 선두 그룹과 함께 하는 대한민국이 빈부격차 문제와 복지,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점에서는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로 더 이상 국론이 분열되고 삶이 파괴되지 않는 때가 오긴 올까요? 하박국 선지자에 의하면 그런 때가 반드시 옵니다. 다만 우리가 예상하는 때와는 다르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런 말씀만으로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탄원을 올리곤 했습니다. 저의 경우라면 한국교회의 분열과 미몽과 개교회 이기주의, 성장우선주의, 기도 만능중의 같은 현상으로 마음이 답답해서 영혼이 궁핍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박국의 묵시를 전합니다. 앞에서 한번 인용한 합 2:4절입니다. 루터 번역으로 잃겠습니다.

 

보라. 목이 곧은 자는 그 마음에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비교됩니다. 목이 곧은 자, 즉 교만한 자와 의인입니다. 교만한 자는 마음에 안식과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마음의 안식보다는 몸의 안식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불의한 방식으로 얻은 어떤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불의한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발을 뻗고 잘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은 원론적인 것이지 실제 세상살이에서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총체적으로 악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반복되기는 합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런 교만한 생각과 행동은 잠간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깨우침이자 외침입니다.


교만한 자와 달리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미 전달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패배주의,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영적 촉수를 맞추고 살기에 비참한 현실 앞에서도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이미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승리가 성취되기 전까지는 어둠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느냐가 문제이겠지요.


현실적으로 본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의 기대에 조금만 빗나가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고, 거꾸로 조금만 좋아져도 하늘을 날 것처럼 우쭐해합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삶을 경험합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박국은 아예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일을 당했으나 믿음을 잃지 않았던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청중들에게 말씀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병 든 자를 고치셨고, 죄의 용서를 과감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분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억울하고 불의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즉 믿음의 능력이 없습니다. 믿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일치입니다. 그분의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하박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예수님에게서 완성된 그 믿음에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입니다.

하박국 1:1-4,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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