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나병환자의 믿음
눅 17:11-19, 창조절 일곱째 주일, 10월13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성경에는 구약 신약 가릴 것 없이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인류 역사에서 나병이 아주 오래된 병이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은 한센병이라고 부릅니다.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그게 짙어지면서 피부가 곪고 썩게 됩니다.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없어지고 코도 뭉개집니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성서시대에는 나병과 다른 피부병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병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피부병을 나병으로 간주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병환자들 중에는 요즘이라면 쉽게 치료될 수 있는 피부병 환자들도 많았을 겁니다. 나병으로 불린 병의 증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기도 하고, 또 전염성이 있어서 그들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만이 아니라 종족 전체의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7:11-19절에 나오는 나병환자들도 평소에는 마을에 들어와서 살지 못했습니다. 먹을 게 필요할 때만 어쩔 수 없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마을에 들어와서도 사람들과 접촉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멀찍이서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 내용이 레 13장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외쳤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혹시나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예수님에게 왔으나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멀찍이서 소리를 지른 겁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나병환자가 완치되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이미 나병이 치료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 명 중에 한 사람만 예수님에게서 와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이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본문의 대체적인 줄거리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내용이 간단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의 시빗거리도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소한 질문은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왜 나병환자들을 직접 안수하거나 기도해주지도 않고 그냥 제사장에게 보냈을까요? 평소에 환자를 치료하시던 모습과는 달라 보입니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 제사장에게 갔을까요? 왜 한 명만 예수님에게 돌아온 것일까요? 나머지 아홉은 어디론 간 것일까요? 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과 이방인이라는 말은 똑같은 것일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원래 유대인들입니다.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처럼 무시했을 뿐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있는 지역감정이나 남북의 대립감정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을 좋지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눅 10:25-37절에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강도 만나서 쓰러져 있던 사람 곁을 세 종류의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은 그 장면을 보고 못 본 척했습니다. 다른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인간성이 좋지 못해서라거나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에서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 지나간 사마리아 사람만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오늘 본문도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는 이야기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따라가 볼까요.
예수님은 돌아와서 감사의 예를 표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고 17절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정말 아홉 명이 어디로 간 것일까요? 본문에 따르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처음 말씀에 따라서 제사장에게 가다가 중간에 병이 나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열 명 중의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은 그길로 제사장에게 갔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 한 사람을 포함해서 열 명이 다 일단 제사장에게 가서 완치된 걸 확인한 뒤에 한 사람은 예수님께 왔고 나머지는 각자 흩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정을 우리가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홉 명이 크게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제사장에게 갔다면 그건 잘한 거구요. 가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도 가지 않은 거니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병이 낫고 제사장의 확인을 받은 뒤에 다시 자기에게 오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마당에 아홉은 어디 갔냐고 나무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거나 좀 심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찾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잘못을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고맙다는 공치사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의 믿음을 말하기 위해서 나머지를 짚은 것뿐입니다. 이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꼭 집어서 그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앞에서 잠간 언급한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을 낮춰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호와 신앙을 바르게 지키지 못하고 이방 종교를 받아들여서 결국 종교혼합주의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이비 이단들을 대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홉 명 유대인들이 아니라 한 명 사마리아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겁니다. 이 사실 앞에서 유대인들은 당황했겠지요. 이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이 그것을 정확하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나은 걸 발견하고 우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영광을 돌렸다는 말은 공동번역과 루터번역의 번역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거꾸로 말해도 됩니다.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요 10:30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장 깊은 차원이 하나님 찬양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찬양은 감사의 다른 표현입니다. 영광과 감사는, 즉 찬양과 감사는 똑같이 믿음의 토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겉으로 멋있는 찬송을 부르면서 영광을 돌린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감사의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경건에 떨어지고 맙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본문 15, 16절에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통해 이 사실을 정확하게 짚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이 사람의 태도가 머리에 그려지지요? 완전히 예배드리는 사람의 그것과 같습니다. 나병이 치료되었으니 이럴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찬송하고 감사를 드린다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해도 실제로는 감사의 마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말은 하겠지요.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은 하겠지요. 그것은 그렇게 보여야겠다는 일종의 종교적 교양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이 못마땅하게 보일 겁니다. 자신만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불평과 불만이 쌓이면서 자기 자신마저 못마땅하게 보일 겁니다. 현대인들은, 특히 문명사회에 사는 현대인일수록 삶의 불만이 큽니다. 그 내면에 감사의 마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게 너무 뻔한 이야기일까요?
그 이유는 현대인들이 감사의 조건을 채워나가는 것에만 몰두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런 조건을 채우는 것만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속으로 계산해보십시오. 그런 조건들이 채워지면 행복한지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것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조건에 불과한 겁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상대적인 것으로 대처해야만 합니다. 거기에다가 영혼을 거니까, 즉 그것이 구원해줄 것처럼 매달리니까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혹시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나병이 치료되는 정도로 큰 사건이 일어난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잠간은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감사할지 모르나 도로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제가 보기에 열 명 중에 한 사람만 실제로 감사의 존재론적 차원에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
감사의 삶이라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모두 세상일에 완전히 초월한 도사가 되어야 할까요? 무소유로도 기쁨을 누리는 경지에 들어가야 할까요?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할까요? 은혜를 받으면 해결될까요?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를 통해서 그것의 본질과 근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걸 하찮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엎드릴 수 있는 대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절대적 순종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경험에서만 가능합니다.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 말입니다. 현대인들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걸 부정하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자기가 생명의 주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외의 대상을 모두 상대화시켜버립니다. 현대인들은 신마저도 이용하려고 듭니다.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런 점에서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발언은 옳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신을 죽인 겁니다. 그 신의 자리에 자기를 올려놓았습니다. 혹은 교회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결과는 허무입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바닥에 낮출 수 있는 대상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럴 때만 참된 의미에서 찬양과 감사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 많은 한 여자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 흘리고 향유를 부었다는 이야기가 눅 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와 예수님을 한데 묶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받은 게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이 여자에게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사라미아 사람과 죄 많은 한 여자의 믿음은 단순히 감사를 드렸다거나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한없이 낮출 수 있는 절대 대상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이고, 거기서 참된 감사의 마음이 가능하고 참된 찬양이 가능합니다. 삶이 절대자와의 관계에 올라서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디오게네스의 일화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목을 거처로 삼고 살던 디오게네스를 찾아가서 무엇을 원하느냐, 원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해결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당신 그림자 때문에 햇빛을 받을 수 없으니 자리를 비켜주는 게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에게는 자기가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대학이나 노후를 편안하게 지낼 집이나 돈이 절대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햇빛이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알렉산더가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절대적인 생명으로 경험하고 있을까요?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혹은 나름으로 그렇게 경험한다고 대답하겠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으니 이젠 된 거 아니냐,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절대적인 생명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난 어떤 순간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그런 경험은 매너리즘에 빠져버리고, 복닥거리며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 일상으로 자리를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한 말씀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믿음은 한 순간의 경험과 결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붙들어야 할 수행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심화과정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신을 벗은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고백 한처럼 말입니다. 발아래 엎드린다는 것은 절대 순종의 깊이로 들어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토대이고 믿음의 결과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구원은 단순히 나병이 치료된다는 정도라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사마리아 사람과 동일한 믿음의 경험이, 그리고 믿음의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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