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15. (창 21:8-21)
창세기에서 창조와 타락, 그리고 노아홍수와 바벨탑 사건을 보도하는 창 1-11장을 제외한 12-50장은 모두 족장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인 족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에서인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명실상부하게 유대인들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누군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이삭과 이스마엘이지만, 그 이외에도 여러 명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사라가 죽은 뒤에 아브라함은 다시 크투라라고 하는 여자를 얻어서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지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이가 그들입니다.(창 25장) 창세기의 보도만 따른다면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을 낳은 셈입니다. 사라가 죽을 때의 나이는 127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37살인데, 그 나이에 왜 새장가를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아브라함에 관한 서로 다른 구전전승들을 간직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것들 중에서 필요한 대목들을 모아서 아브라함에 관한 전체 이야기를 완성한 것입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사라의 질투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난 이삭이 젖을 뗄 때 잔치를 베풀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고대 시대는 대략 3살 될 때까지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 유아 사망률이 아주 높았던 그 당시에 젖을 뗄 때까지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삭이 어떤 아이인가요?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때 얻은 아기입니다. 그들 부부는 젊어서 아버지 데라를 따라 달을 섬기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먼 곳으로 이민 온 사람들인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포기하고 있던 순간에 아들을 낳은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지만 사라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기뻤겠지요. 고대 시대에 아기가 없다는 것은, 더구나 아들이 없다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여자 책임이었으니까요. 이삭을 얻은 사라는 하나님이 왜 자기를 이렇게 축복해주는지 모르겠다면서, 매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냈겠지요.
사라는 어느 날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노는 걸 보았습니다. 사라는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이스마엘은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낳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앞서 사라는 아기를 낳을 나이가 지나자 자기의 몸종이었던 사라를 남편인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하여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볼 요량이었지요. 사라는 이스마엘이 태어난 뒤로 이스마엘을 자기 아들처럼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막상 자기의 아들이 생기자 이스마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성서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되는 걸 사라가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부모의 유산 문제로 형제들끼리 서로 재판을 벌이는 일이 있는 것처럼, 고대시대에도 이런 문제가 아주 예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구를 듣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합니다.(11절)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스마엘도 자기의 아들이었기에 그랬겠지요. 사라와 아브라함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을 겁니다. 사라는 아들 이삭의 정통성을 지키려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을 것이며, 아브라함은 그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 하는 동정론을 폈을지 모르겠군요. 지난 과거 인류의 역사가 가부장적 질서에서 남자에 의해 주도된 것 같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사람은 바로 아내라는 말이 있듯이 아브라함은 결국 사라의 논리에 설득당한 것 같습니다. 물론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어주라고 조언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사라의 주장이 이긴 것입니다.
하갈을 중간에 놓고 사라와 아브라함이 벌인 논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 내막을 아래와 같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따르면 앞에서 제가 잠시 지적한 것처럼 사라가 하갈을 통해서 남편의 대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하갈이 임신한 뒤에 사라를 업신여기게 되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하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라는 마음 놓고 하갈을 구박하기 시작했고, 하갈은 구박을 견디지 못해 임신한 몸으로 도망친 일이 있습니다. 빈들에서 아브라함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하갈은 돌아와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라와 하갈 두 여자 중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하갈을 남편의 씨받이로 받아들였다가 구박했고,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인정하기 싫어서 내쫓으려한 사라에게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성서기자는 윤리적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기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약속과 그 성취의 역사에서 볼 때 사라가 더 도덕적인지, 하갈이 그런지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성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 길만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런 성서기자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긴 했지만 완전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서기자는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은근히 꼬집고 있습니다. 하갈을 통해서라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라의 주장을 아브라함이 별 말이 없이 그대로 따랐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임신한 하갈이 멸시한다는 호소를 들은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그녀를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한 것도 옳은 처사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잠시 피신했을 때 아브라함은 이집트 사람들이 무서워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도 있습니다.(창 12:10 이하) 성서기자는 결코 사람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걸 숨기지 않습니다.
브엘세바의 빈들에서
아브라함은 하갈을 집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성서기자는 최소의 단어만으로 그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담백한 문장이 독자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시킵니다.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양식 얼마와 물 한 부대를 하갈에게 메어주며 아이를 데리고 나가게 하였다. 하갈은 길을 떠나 얼마쯤 가다가 브엘세바 빈들을 헤매게 되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장면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하갈이 처한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 앞으로 남편 없이 아들 하나만 데리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재산을 넉넉하게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부자였던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준 것은 달랑 양식 얼마와 물 한 부대뿐입니다. 독자들은 이런 장면에서 아브라함이 참으로 비정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우지 못할 겁니다. 거꾸로 하갈을 향한 연민의 정을 느끼겠지요. 하갈은 하루아침에 브엘세바의 빈들로 내침을 당한 것입니다.
성서기자는 하갈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부대의 물이 떨어”졌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빈들에서 물이 없다면 그건 곧 죽음을 가리킵니다. 비록 후처의 처지였지만 대부호 아브라함의 집에서 넉넉하게 살던 하갈이 지금 더 이상 힘들어질 수 없는 그 지경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덤불의 한 구석에 내려놓고 “자식이 죽은 것을 어찌 눈 뜨고 보랴.” 하고 탄식하면서,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펑펑 울었습니다.
하갈이 이런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사라와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삭의 재롱을 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아브라함은 그 지역의 토호인 아비멜렉과의 협상을 성사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소와 양을 주고 우물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제 안전하게 소와 양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우물을 확보한 것입니다.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게 두 사람이 거기에서 서로 맹세했다고 해서 그곳을 브엘세바라고 하였다.” 그 브엘세바는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부대에 물이 떨어져 죽어가고 있던 바로 그 땅입니다. 한쪽은 새로운 협상으로 사업이 번창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다른 한쪽은 죽음 일보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이런 일들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아브라함도 역시 이런 역사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인간들은 역사를 비열하게 끌어가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역사를 세우십니다. 하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본문을 잘 보십시오. 절망적인 상태에서 아들을 멀찍이 바라보면서 울고 있는 하갈에게 하나님이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걱정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를 안아주어라,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갈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옆에 샘이 보였다고 합니다. 하갈은 부대에 물을 채워 가져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해서 죽음 일보 직전에 생명을 건졌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뒷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고, 이스마엘은 자라서 사막에서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는 베드인 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중적 모습
오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은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괴로워하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말을 그대로 따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은 혈통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전통이 유대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침략할 때도 그렇고, 최근 2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틴에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원주민을 쫓아낼 때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전통이 이미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사라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는 말씀에 이미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번은 브엘세바의 빈들에서 죽어가고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하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은 얼핏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이삭에게서 난 자식만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말씀은 분명히 이스마엘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이스마엘도 또 다시 큰 민족이 되게 하신다고 하니,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성서기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 두 말씀이 서로 대립하지만, 각각은 모두 옳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성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리입니다. 동시에 이방민족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역시 진리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그 어느 때라도 유보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 버림받은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교회 밖의 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서로 대립적인 것 같지만 각각 모두 진리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굳이 힘들게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런 분은 예수님과 그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구원받느냐, 아니냐 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상대화합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오직 복음의 명령만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려면 오늘 본문을 조금 더 깊이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구원의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마엘을 이삭 못지않은 큰 민족의 태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후손들은 거친 사막에서 전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여전히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을 잘 몰랐습니다. 반면에 이삭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따랐으며, 그 후손 중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이런 점에서 인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복음 공동체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통한 세계 구원에서 한눈팔지 말고 제 길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바르게 찾아 간다면 우리는 영적인 선민으로 남을 것이며, 바르게 찾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말겠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의 혈통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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