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7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n_stVK_oa5g?si=NP5ZOgMg69O69rmx
▣ 들어가는 말
-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장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아브람 부부(아내 사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자식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아내 사래는 자신의 종인 애굽 여인 하갈을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하여 자손을 얻으려 하지요. 마침내 하갈은 임신하게 되지만, 처신을 잘하지 못해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사래에게 쫓겨나게 됩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6:11)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16:10) 약속을 받고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합니다.
그녀가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엘 로이” 즉,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만남이 이루어진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릅니다. ‘브엘’은 ‘샘’, ‘우물’이라는 의미이고, ‘라해’는 ‘살아 있는’, ‘살아계신 분’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로이’는 ‘보다’ ‘살펴보다’ 의미로, 전체를 직역하면 “나를 보시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 혹은 “살아 계셔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우물”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뜻으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자의 소리를 하나님이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이지요. 이 이름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보고 듣고 기억하신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어쩌면 이 장면은 단지 작은 샘 곁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모든 희망을 잃고 광야를 방황하던 하갈이 지쳐서 죽어가는 순간. 기적적으로 샘을 발견하고 생명을 건지는 순간을 표현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하갈은 신을 경험하고, 그녀가 경험한 신은 ‘나를 살피시는 분’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깨달음과 용기를 얻고 집으로 돌아간 것 아닐까요. 고난을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살펴보시는 신을 의지하며 고난에 맞서기로 한 것이지요. 그 결과 이스마엘이라는 생명이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Call me Ishmael !!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주오”(Call me Ishmael)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허먼 멜빌이 쓴 『모비 딕』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소설을 이끌어가는 내레이터입니다. 소설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한 것은 소설 전체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정식 아내가 아닌, 이방인 계집종에 불과했던 여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 집으로 돌아가 주인에게 복종했으나 사라가 이삭을 출산하자 집에서 쫓겨나고 말지요.
그래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막에서 비참한 방랑자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이름 없는 방랑자, 세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하갈’이라는 이름도 어원적으로 “이방 거주자”, “떠도는 자”, 혹은 “낯선 자”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부초와 같이 정처 없이 세상을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비 딕』에서 주인공 이스마엘은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을 통해 영적인 병에 걸려 바다로 갑니다. 고래잡이배에 오르게 되지요. 바다는 혼돈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가는 사람은 사실 무모한 일에 도전하는 자이며,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자입니다. 이스마엘은 포경선이 “그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대학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 혼돈의 바다에서 고래와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얼굴
- 바다로 가다!
“깊은 바다로 내려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비 딕』 이스마엘의 말입니다.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복잡할 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그는 모든 것을 떠나 바다로 나갑니다. 우리도 종종 ‘바다가 보고 싶다’ ‘바다 보러 가자’하며 바다를 찾기도 하지요. 우리는 일상의 그 무엇을 피하려고, 잊기 위해 바다로 가는 걸까요? 혹은 우리는 바다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걸까요? 소설의 주인공 이스마엘(방황하는 인간의 표상)도 버림을 위함인지, 찾음을 위함이지 모르겠지만 바다로 나갑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요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뒤로하고 반대 방향으로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탑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바다로 갑니다.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고대에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릴 때 뱃삯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리 뱃삯을 준 것을 보면, 요나의 다급함이나 불안감을 나타내는 것인지,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다는 인간의 도피와 방황, 인생의 광야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도망친다고 해서 운명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 수 있을까요? 멜빌은 『모비 딕』에서, 성경은 요나서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 바다로 가는가?” “바다 한가운데서,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누구의 부름에 응답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모비딕』
- 미국의 성경
“미국 문학은 『모비 딕』과 함께 시작했다.” 미국 소설가, E. L. 닥터로가 한 말입니다. “우리 미국의 성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미국의 성경과 가까운 책. 미국 역사와 문화 그리고 서양 문학의 본질이 담겨 있는 책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 애쓰는 개인으로서, 헌법에 명시된 이상에 도달하려 애쓰는 국가의 시민으로서, 우리에게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모비 딕』이 절실히 필요하다.” 미국 역사학자 너새니얼 필브릭의 말이지요. 출판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작가 사후 『모비 딕』은 미국 문학 있어서 최고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됩니다. ‘미국의 성경’이라 엄청난 극찬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겠지요.
멜빌은 요나서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신의 말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지요. 그가 신봉하는 신은 이스라엘을 위한 신인데,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시리아로 가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신의 명령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요나에게 신이란 자기 민족 공동체와 신앙 공동체를 위한 신이지, 모든 민족을 위한 신은 아니지요.
- 선장 아합
모비 딕을 잡으려는 포경선의 선장은 에이해브(Ahab)입니다. 그의 이름은 성경의 북이스라엘 왕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가 신봉하는 바알 종교를 들여와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스라엘을 혼돈에 빠뜨린 대표적인 악한 왕이지요. 그리고 그 아합왕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신판을 받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습니다(열왕기상 16–22장). 그는 신에 대항하는 인간, 교만과 집착, 파멸을 상징하지요. 소설 속에서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어 뜯어간 흰고래 모비 딕을 악의 화신으로 여기며, 끝까지 추격하는 에이해브의 지독스러운 집착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를 향한 오만하고 무모한 도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지옥의 심장에서 너를 찌르노라. 증오의 이름으로 내 마지막 숨을 내뱉노라.” “저 저주받은 흰고래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나는 아합이다! 나는 아합이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거슬러 싸우는 비극적 영웅.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 의지와 반항. 신(모디 딕, 진리)과 운명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증오. 죽음을 앞둔 인간의 오만과 비극을 보여줍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모비 딕을 몰아붙인 끝에 마침내 자신의 작살을 꽂지만, 작살에 연결된 로프에 휘감겨 그대로 바닷속으로 끌려가고 마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선장 아합은 전형적인 비극의 영웅으로, 우리로 연민을 느끼게 하지요.
- 요나의 길
바다로 간 요나는 배가 좌초될 상황에서 배의 가장 밑으로 내려가 ‘깊은 잠’에 빠집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잠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잠을 자다’와 ‘신과 대면하기 위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는 배의 맨 아래로 들어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깊은 잠’을 자게 되지요.
선장은 요나를 깨우며, “자는 자여,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라. 혹시 당신 신이 우리를 생각하사 죽지 않게 할 수 있다.” 이 무명 선장의 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이 이방인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것이지요. 이것은 이방의 성읍 니느웨를 구원하실 것이란 암시이기도 합니다. “깊은 잠”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 모습에서 선장은 요나가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임을 직감한 것이지요.
그리고 제비를 뽑아 문제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냅니다. 고대에서 제비뽑기는 신의 뜻을 가늠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이것은 사제들만의 특권이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이었지요. 신약에서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구할 때도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제자로 임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욘 1:10) 고난의 이유와 원인을 밝힙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해야 할 사명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회피하면 불행이 초래되는 것 같습니다. 그 불행은 한 개인을 넘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배와 같습니다. 각자가 맡은 일을 책임 있게 행할 때 인생이라는 항해를 안전하게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망치지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 요나의 분노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냅니다. 3일을 지냈다는 것은 상징입니다. 심리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큰 물고기의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합니다. 그곳은 자연이며, 밤이고, 죽음이지요. 여기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야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고대인들은 사람은 죽은 뒤에 모두 스올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이 스올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곳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 깊은 심연, 깊음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관과 우주관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과 고통, 고뇌와 방황의 시간이 깊은 깨달음과 성숙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너에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는 신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리고 니느웨의 멸망을 선언하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의 선포에 불가능한 일이 일어납니다. 니느웨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지요. 신은 그들이 나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보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서 재앙을 거두어들입니다.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잘 마무리된 것 같은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신은 요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니느웨가 무너지길 바라며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위해 그늘을 드리우게 하는 박 넝쿨을 마련하지요. 박넝쿨이 자라 머리 위에 그늘이 지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집니다. “크게 기뻐하였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겠다던 요나는 그늘 하나로 기쁨을 찾은 것이지요. 그러나 다음 날 신은 벌레 한 마리를 마련해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해서 박넝쿨은 시들고 맙니다. 해가 뜨고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이 불어옵니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자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박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니느웨의 12만 명이 회개하고 구원받을 때, 요나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싫어하며 성을 냅니다. 왜 그럴까요? 신의 형상을 지녔다는 인간, 천사보다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이 어찌 이리도 사악할까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교회의 모습이 이다지도 추할 수 있을까요.
요나는, 우리는 여전히 나만의 정의와 나만의 사랑, 나만의 고집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더 중요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모비 딕』의 아합 선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흰고래를 미워한다. 내 심장을 물어뜯은 그를 반드시 파괴하리라.” 아합은 흰고래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선원을 파멸시키고 말았습니다. 요나의 분노와 아합의 집착은 뿌리가 같습니다. “나만 옳다”라는 자기 중심성, 그것은 타인을 향한 존재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인간의 본성적 저항입니다. 이러한 요나의 분노는 스스로 신임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겠다는 오만은 세계와 삶이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나가는 말
- 타인을 향한 존재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니느웨의 구원입니다. 요나의 존재 이유, 그가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일 수 있는 이유는 니느웨의 구원입니다.
“이 큰 성 니느웨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요나를 향한 질문이자,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너는 왜 존재하는가? 너의 삶이 타인과 세계를 살리고 있는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말합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책임을 요청한다.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할 때 진정한 나가 된다.” 요나는 타인의 구원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자리로 부름 받았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살릴 때 비로소 자신도 살게 됩니다. 마르틴 부버는 “나는 너를 통해서만 내가 된다.” 했습니다. 사랑과 연대 속에서만 참된 자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 세계가 내 뜻,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4) “너는 왜 존재하느냐? 너의 존재는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우리는 종종 아합처럼, 요나처럼, 자기 집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은 나를 넘어 타인을 향하게 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합니다. 타인을 살리는 삶은 내 존재의 이유를 완성합니다. 사랑과 섬김의 자리에 설 때, 나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아니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섬긴다, 나는 이웃과 세계를 살린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는 세상의 운영자, 경영자, 신이 아닙니다. 그 세계 속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 다른 모든 피조물과 어울려 살아가는 피조물, 우리가 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세계에 질문을 던지며 감나라 배나라 하는 것이 아닌, 신의 질문/역사의 질문/세계의 질문 앞에 응답/대답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키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품는다. 고래의 뱃속에서 요나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아합의 집착은 파멸을 낳았지만, 요나의 순종은 생명을 낳았다. 주님, 우리가 아합의 길이 아닌 요나의 길을 걷게 하소서. 타인을 살릴 때, 우리도 참된 ‘나’를 만남을 알게 하소서.”
“주님,
우리 안의 요나 같은 분노와 아합 같은 집착을 내려놓게 하소서.
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소서.
타인을 살리는 사랑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서 참된 ‘나’를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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