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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mms://wm-001.cafe24.com/dbia/071021.mp3이 사람의 믿음
2007.10.21. 눅 17:11-19

오늘 분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는 중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보도합니다. 사마리아는 북쪽의 갈릴리와 남쪽의 유대를 이어주는 중간 지역인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뒤로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이 그 지역으로 이주해온 이방사람들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건에 놓여 있습니다. 순수혈통주의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같은 하나님의 후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유대로 내려오거나 유대에서 갈릴리로 올라갈 때 그 중간 지역인 사마리아 땅에 발을 딛기 싫어서 멀리 우회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지금 바로 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 돌아온 사람
그 마을에 들어서자 나병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 당시의 나병환자들은 외딴 곳에 격리되어서 지냈고,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들어와야 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은 이미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행위 중에서 이번 사건은 약간 특이합니다. 누가복음 5:12-16절에 보도된 나병환자 치유사건에서는 예수님이 고쳐달라는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면서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환자들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또한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도 없이 무조건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능력보다는 환자들의 신앙적 태도를 강조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제사장들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동안에 자기 몸이 이미 깨끗이 치료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문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 열 명이 모두 한 제사장에게 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출신지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제사장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겠지요. 여기까지는 이들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일어난 일과 그들의 행동은 똑같았지만, 이후로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열 명 중에서 아홉 명은 모두 제 각각 자기가 살아야 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간 반면에 한 사람은 다시 예수님에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의 예를 표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상종조차 하기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9절)
예수님이 이렇게 믿음을 인정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의 믿음이 무엇일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고백이 기독교의 가장 일반적인 믿음의 내용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른 아홉 명의 나병환자 친구들과 함께 예수님을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외침은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동냥을 얻는 사람들도 행인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일반적인 행동만 보고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병이 치료된 후에 그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의 예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행동을 우리는 당연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병이 치료된 것을 확인했을 바로 그 순간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십시오. 그의 모든 삶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떨어졌던 가족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손을 놓아야했던 직업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쁨에 들떠 있는 사람은 나병환자였을 때의 일을 한시바삐 잊고 싶을 뿐입니다. 그가 다시 예수님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입니다. 나병이 나으면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나병이 치료된 것이 반드시 예수 덕분이라는 증거도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이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의 예를 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닐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돌아온 이 사람의 행동은 특별한 게 분명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행동 자체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 중요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예수님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힘들며, 예수님이 그의 믿음을 칭찬ㅌ한 이유도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마리아 사람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 사람에게 있는 그 특별한 믿음을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은 세 군데에서 사마리아를 강조합니다. 1)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2)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람이 이 이방인 밖에 없는가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또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이 본문을 관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다시 돌아와서 발 앞에 엎드린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암시합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통적 유대인의 혈통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앞에 설 때마다 자신들의 모습이 아주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를 보면 이런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성 우물가에서 어떤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마리아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 4:9)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유대인이 자신에게 물을 달라는 게 너무 이상해서 그렇게 반문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처한 입장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율법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몸속에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 조상의 책임입니다. 자신들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 때문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억울한 일입니다. 흡사 지난날 미국에서 흑인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슬픔과 분노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숙명 속에서 평생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에서는 여자로 산다는 게 불편한 일이 많을 겁니다. 여기 여자분들 중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까요?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어려움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특히 그들의 자녀들 문제는 더 그렇습니다. 그 아이들이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로 태어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겠지요. 북한에 태어나서 가난하게 사는 어린이도 많습니다. 그 아이들이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닙니다. 이렇게 숙명적으로 삶의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요즘도 많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무조건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많습니다.
본문이 설명에 따르면 나병이 치료된 열 명 중에서 그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의 예를 드렸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무식하고, 가난하고, 율법을 모르는, 하나님 앞에서 뻔뻔한, 뭔가 열등한 계층의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 지금 하나님에게 찬양을 드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있다는 겁니다. “이웃이 누구인가?”에 관한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쓰러져 있었는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지나치고 말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나서서 그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고 합니다.(눅 10: 29-37) 복음서는 왜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에게 호의적인가요?
물론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칭찬을 들어야 할 사람은 아니겠지요. 그들 중에서도 몰염치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사회적인 신분이 높다고 해서 교만하기만 하다거나 신분이 낮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큼 사랑이 많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극복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풍성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팔복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우는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며,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배부를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낮은 자리입니다. 억울한 고통을 당한 자리입니다. 배고픈 자리이며, 슬픔의 자리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기만 하지 하나님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궁핍하고 초라하게 살기는 싫다고 생각하겠지요. 예수님을 믿더라도 세련되고 멋지게 믿는 게 좋다고 생각하겠지요. 지금 기독교인들의 모든 관심이 온통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판사, 검사가 무더기로 나오게 해달라고, 십일조 1억 바치는 사람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설교하더군요.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과 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하나님의 은총인 믿음
이런 문제에 조금 혼란을 느끼고 있는 분들에게 저는 두 가지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세상이 주는 만족과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의 분명한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만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생수의 맛을 모르고 사이다나 콜라 맛에만 길들여진 사람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둘째, 조금 더 솔직하게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반해서 우리가 그걸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몇몇 교리를 공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과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율법신앙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하는 순간에 그 일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자기를 온전히 낮추는 그곳입니다. 이게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이렇게 낮은 자리에 들어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낮은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어디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한없이 낮추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위로를, 그의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들을 섬길 줄 알며, 감사할 줄도 알고, 사랑할 줄도 압니다. 다른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도 챙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아홉 명과는 달리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의 예를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남의 말을 그만 하고 당신은 어떤지 말해보라 하고 다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정말 그런 경험이 있냐고 말입니다. 그게 목사로서 딜레마입니다. 저는 여전히 완전히 낮은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럴 자신도 별로 없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길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힐 수 없다는 사실만알 뿐입니다. 저는 제가 참된 믿음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런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길을 함께 가자는 뜻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를 살린, 그를 구원한 그 믿음은 무엇인가요?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참된 믿음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예수님에게 참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도 역시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 은총이 임하는 한 가지 조건은 우리가 낮은 곳에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여러분의 삶에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낮은 자리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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