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오리라!
(마 24:36-44), 11월28일, 대림절 첫째 주일
오늘 설교 본문에는 특별한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인자’가 그것입니다. 37절은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고, 39절은 홍수로 사람들이 모두 멸망당하기까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는데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다고 했으며, 44절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자(人子)는 헬라어로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의 아들’(son of men)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성경을 철저하게 읽지 않는 증거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사람의 아들이 아닌데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왜 인자를 자기와 구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당신 자신이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하듯이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36절의 보도에 따르면 그 날과 그 때를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마지막 때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고유한 영적 경험과 동시에 고유한 신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파루시아
그 중의 하나가 묵시문학입니다. 묵시사상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많은 내용이 이런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약성서에도 한 가지 사상만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전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과 거기에 반응하는 방식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는 학파도 있었고,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학파도 있었습니다. 예언자 전통도 있고, 제사장 전통도 있습니다. 이런 전통들이 각자 하나님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인식과 경험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묵시사상은 구약의 역사에서 비교적 후기에 나타난 독특한 사상입니다. 그들의 핵심사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 심판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36절이 말하는 ‘그 날과 그 때’를 가리킵니다. 계 1:10절은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날과 그 때에 전권을 쥐고 세상을 심판할 이가 바로 ‘인자’입니다.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37절과 39절은 ‘인자의 임함’이 노아 홍수 사건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임함’은 헬라어 ‘파루시아’의 번역입니다. 파루시아는 coming, arrival, presence라는 뜻입니다. 파루시아는 곧 하나님의 임재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파루시아는 구원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임재, 구원의 실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묵시사상은, 그리고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은 여러 성서구절들은 왜 파루시아를 말했을까요? 파루시아를 말하는 것보다는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 경제인, 사회운동가들이 세상을 바꿔보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도 그런 일에 힘을 쏟습니다. 서울 강남을 대표하는 어떤 교회는 ‘정감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정직과 감사 운동이라고 합니다. 파루시아는 그것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사람들이 정직해지고, 문화 활동이 풍부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 방식입니다. 왜 이런 사상을 말하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묵시사상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와 신구약 중간인 암흑시대의 경험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악의 지배 밑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총체적으로 부패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에게는 세상을 바꿀 능력도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치 시한부 암 선고를 받은 사람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낡은 세상(올드 에온)은 가고 새 세상(뉴 에온)이 와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실행할 이가 바로 인자라는 겁니다. 그 인자의 오심을 ‘파루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파루시아가 이뤄지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늬가 바뀌는 게 아니라 실체가 바뀝니다. 이런 묵시적인 희망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님이 바로 인자라는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이 바로 오늘 본문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루시아 개념을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거나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월적인 인자의 파루시아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개량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역사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자의 파루시아를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역사적 책임을 유기하면 곤란합니다. 이 역사에 두 발을 탄탄하게 딛고 사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명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총체적인 절망으로 떨어집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늙고 곧 죽습니다. 이걸 늦추거나 막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늙고 죽지 않으면 생명이 아닙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에 인간이 살지 못하게 될 날이 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인간 종 자체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변하든가요? 옛날에 비해서 인간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었나요? 지금의 제국은 옛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로마 제국보다는 더 신사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인생살이는 비루하고 잔인하고 구질구질하고 이기적이고 전투적입니다. 이 세상을 뿌리째 바꿀 인자의 파루시아를 우리도 고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인자의 힘으로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를 비롯해서 모든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신앙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그 날과 그 때
인자의 파루시아는 언제 실행될까요? 본문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하나님만 압니다. 노아홍수 때도 사람들이 홍수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38절) 모든 것이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파루시아가 얼마나 갑작스러운지,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지 그 순간까지 사람들이 밭을 매고(40절) 맷돌질을 하게(41절) 될 것이라는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혹시 인자가 데려가지 않는 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일상이 여전할 것처럼 생각되는 어느 순간에 마치 도둑이 예고 없이 침범하듯이 인자의 파루시아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른다면 오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말입니다. 또는 이런 표현을 만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흥미가 있긴 하지만 실제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 오해에 일리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외쳤지만 아직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재림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우리의 일상은 아무 변함없이 계속되는 걸까요?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2천년이 긴 시간이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지구 전체의 나이를 24시간으로 계산하면 2천년은 몇 초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숫자로 우리의 삶을 희화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에 토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 58년 가까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각각 나름의 세월이 있습니다. 그 세월은 그야말로 한 순간입니다. 각각의 세월이 득달같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순간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죽음의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고 있는데 그 순간이 왔습니다.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는 말은 모든 순간이 그 날이요 그 때라는 뜻입니다. 3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있는 시간이 한 순간이듯이 파루시아가 일어나면 모든 시간이 바로 그것에 융해되어 한 순간이 됩니다.
위의 설명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저걸 모르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한가요? 파루시아는 우리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용입니다. 마태가 전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깨어 있으라.”(42절)고 하며, “준비하고 있으라.”(44절)고 말합니다. 영적 각성과 준비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파루시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여기 사형수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깨어 있음과 죽음에 대한 준비로 충일합니다. 여기 마약과 도박, 또는 주식투자와 부동산 투기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일상은 몽롱한 정신과 돈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깨어 있다는 것과 준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모든 일상을 팽개치고 수도원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 대답은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수도원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 삶은 세속에서 이뤄집니다. 예수님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지지고 볶듯이 살고 있는 시장 바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세속에서 살되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걸까요? 예, 그게 일단 대답입니다. 교회생활은 개인 신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생활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기복주의는 한국교회의 영원한 로망입니다. 매일 새벽에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듯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이 모두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에 집중됩니다. 서울 강남지역의 요지에 2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의 신자들이 인자의 파루시아를 간절히 원할까요? 인자의 파루시아는 이런 모든 것들을 상대화하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선정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일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아무도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따지고보면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예, 그건 옳은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사과나무를 심는 일인지를 뒤돌아보면 됩니다. 현대인들은 사과나무가 아니라 돈나무를 심는 데만 열을 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이 어떤 것이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제 3자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최소한의 기준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지금 당장 손 놓아도 아쉬울 게 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면서도 거기에 내가 천년만년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놓쳐도 아쉬운 게 없어야 합니다. 목사가 큰 교회로 부흥시킨 다음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건 단지 교양이나 인격이 아닙니다. 영성입니다. 표면적인 삶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궁극적인 현실에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인자의 파루시아에 영혼이 민감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속임수가 아닙니다. 민중의 아편이 아닙니다. 이런 영적 각성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늘 팽팽하기 유지되지도 않습니다. 세속의 일들이 우리를 둔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인자가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분은 곧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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