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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2005.1.30          
미가 6:1-8
일상의 영성 안에서

하나님의 논고
미가는 기원전 7세기 사람이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남유다도 많은 시달림을 당할 때 서민 출신인 미가가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설교한 내용이 바로 미가서입니다. 미가서가 산문이 아니라 운율을 갖춘 시의 형태로 기록된 걸 보면 미가의 문학적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그의 설교가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아름다운 문학적 형식을 갖추게 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지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미가와 그를 중심으로 한 예언 전승자들이 국가적 누란의 시기에 무엇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미가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야훼 하나님의 책망을 독특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이 자연을 증인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지적한다고 말합니다. “일어나 산악을 향해 변명해 보아라. 할 말이 있거든 언덕들에게 말해보아라. 산악은 야훼의 논고를 들어라. 땅의 주춧돌들은 귀를 기울여라.”(1,2a). 미가는 야훼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에 근거해서 “네 죄를 알렸다!” 하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흡사 검사가 피고의 죄를 논리적으로 증명해내듯이 접근한다고 설명합니다. 성서는 무조건 믿거나 순종해야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다만 그 논리성과 합리성이라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실증적 차원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혼란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신비라는 것도 역시 매우 합리적인 주장입니다. 물리의 세계 자체가 신비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신비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게 합리적이지 않은 발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시각을 우리가 포착하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성서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광신에 빠지거나 아니면 그것의 영적인 합리성을 놓치는 냉소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산악, 언덕, 땅의 주춧돌을 증인으로 삼아 논고를 펴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매우 문학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말은 ‘역사’가 진리의 증거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100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지만, 또한 한 나라도 역시 잠시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지지만 산악, 언덕, 땅의 주춧돌은 늘 그렇게 있습니다. 역사에 의해서 쉽게 망가지지 않고 그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지금 역사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정당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부당성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당성
미가는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이런 절체절명의 시련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가 하는 점을 따지고 듭니다. “내 백성이라는 것들아, 대답해 보아라. 내가 너희를 어떻게 했으며, 너희에게 무슨 못할 일을 했느냐?”(3절). 5절 끝자락에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이 야훼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하나님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그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집트에서 이끌어 냈습니다(4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온갖 수난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해결되었습니다(5절). 미가의 역사 인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런대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시련을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따져보려고 미가는 지금 하나님 야훼의 편에서 재판을 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미가의 변론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무조건 좋으신 분이라는 전제를 깔아놓으니까 그런 말이 나온다고 말입니다. 이런 주장은 아마 무죄한 자의 고난, 자연재해 같은 것들이 우리 인간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겠지요. 맞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당하지 못한 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풀을 때가 있긴 합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이유 없이 죽어간 어린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을 보면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좀 무색하게 들립니다. 선천적으로 장애인인 사람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정의로움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는 설교 시간에 이러한 ‘신정론’ 문제까지 논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재앙이나 무죄한 자의 고통을 인간의 죄로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문제를 완전하게 이해하기에는 우리 인류가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습니다. 다만 전체 역사의 과정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이끌어 가시는 반면에, 우리는 그분의 뜻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약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작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간혹 동물의 세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연의 신비한 생명 운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물소들이 풀을 찾아 대이동을 하다가 중간에서 처절하게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맹수들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강을 건너다가 악어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그림을 보면서 애처로운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 죽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맹수들이 생존할 수 있고, 더구나 물소 떼가 무사히 목초지까지 도착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처참한 싸움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그것 자체가 생명 운동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형식
역사가 하나님의 정당성을 확증한다는 미가의 변론 앞에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에 야훼 하나님의 잘못이 없다면 결국 자기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6,7절 말씀이 바로 그들의 대답이며, 동시에 질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여기에 거론된 제사 방식은 구약 시대에 가장 전형적인 것들입니다. 번제, 송아지, 수양, 맏아들, 자식을 바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절절하다는 것이겠지요.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역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단서입니다.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이런 구약의 제사 행위가 완료되었다고 믿는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무엇을 바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질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얼마 전부터인가 솔로몬의 제사행위를 본 딴 ‘일천 번제’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거의 무의미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연민이 느껴질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런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무언가를 바침으로써 참된 것을 얻으려는 태도가 만연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중에 자기 자식을 바치고, 송아지와 수양을 바치면서 살아갑니다. 능력이 없는 자식에게 과도한 공부를 시키는 것도 그렇고,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서 권모술수를 쓰거나, 대학교를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기업 운영하듯이 대학교를 끌어가는 것들은 무언가를 바침으로써 궁극적인 것을 얻으려는 태도입니다.

신앙의 내용
미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8a). 송아지, 수양, 자식을 바치는 것은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종교적 형식에 매달림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 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미가는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 야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정의, 은덕에 보답,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이 세 가지는 비록 각각 다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나요? 거꾸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서 정의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별로 상관없이 정의를 실천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기의 이익 때문에 정의로운 것처럼 포즈를 취하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반드시 이런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기를 초월하고 궁극적인 실재에 의존하는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덕에 보답한다는 말은 자비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착하다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미움과 적개심이 아니라 자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비가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의, 자비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가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좀 의외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에게 많은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화려하게 제사를 드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가는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무 시시한 이야기를 하는지 모릅니다. 정의, 자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우리를 뜨겁게 하거나 사명감을 독려하는 것과는 좀 별개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영성
미가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우리가 갑자기 정의의 투사가 되거나 부처나 공자처럼 갑자기 도사가 되거나, 바울처럼 신학적이고 영적인 대가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도 힘들뿐더러 반드시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여기서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을 충실하게 의식하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9절 이하에서 부도덕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남을 등쳐 치부한 것들아, 거짓말만 내뱉은 도시 놈들아, 말끝마다 사기를 하는 것들아, 들어라. 천벌 받을 것들, 부정한 되로 부정 축재한 것들을 나 어지 용서하겠느냐?” 그 뒤에도 계속 이런 문제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고 그럴듯한 제사행위에 목숨을 걸고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미가가 단순히 도덕성만을 외치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당히 많은 경우에 서로에게 그 도덕적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형제도가 필요한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뚜렷한 기준을 내세우기 힘듭니다.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서 지율이라는 여승께서 90일 이상 단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산을 뚫고 고속철을 놓아야 하는지,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 이런 투쟁에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의 차원에서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은 일상의 어떤 규범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 생명의 영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직면하는 모든 삶의 순간마다 생명 지향적으로 결단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미가 시대처럼 국가적 재앙의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혼란한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상의 영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의 왕도는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읽고, 이 세상의 징조를 잘 살피고, 이웃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생명의 영과 깊은 관계를 나누어야만 합니다.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진리의 영이 찾아오시어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미가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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