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7. 딤전 6:11-16
우리가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실제적인 삶의 문제가 모두 순식간에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 이전에는 쉽게 지나갈 수 있었던 문제들이 더 심각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돈 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갈등을 느낄 수도 있고, 옛날에는 남에게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삶을 자신이 올곧게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당혹스러워질 때도 많습니다. 설교하는 저에게도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도 많습니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가족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할 때도 흔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한계가 많습니다. 이런 시행착오의 과정은 여러분이나 저나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했을까요?
믿음의 싸움
‘믿음의 싸움’이라는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데 거기에 무슨 싸울 일이 있냐고 말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싸우라거나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싸움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술가들의 예술행위와 비슷합니다.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은 바이올린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꾸준한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서 그는 예술의 깊은 세계로 들어갑니다. 믿음도 예술처럼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서 영생을 얻습니다. 그 영생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도달하는 예술의 경지처럼 하나님의 참된 생명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특히 아마추어가 아니라 전문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더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듯이 교회의 전문적인 지도자인 디모데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한 훈련과 싸움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왜 싸움인지 아무래도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 ‘믿음의 싸움’이라는 말은 믿음이 한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과정이며 우리의 공부가 과정이듯이 믿음도 역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성실하게 거쳐야만 우리의 믿음은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믿음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인생을 과정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처럼 믿음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대개는 그냥 한 순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렇게 한 순간에 충실하다보면 그게 과정이 되긴 합니다만, 전체를 과정으로 인식하는 믿음생활과 그렇지 않은 믿음생활은 크게 다릅니다. 믿음을 실제적인 삶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믿음의 싸움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옵니다.
2) 이것은 또한 믿음이 자라나야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자라야만 합니다. 믿음은 씨앗이나 모종과 같아서 물을 주고 햇볕을 받게 해야만 자라납니다. 모종을 심었는데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자라지 않은 모종은 결국 죽는 것처럼 자라지 않는 믿음은 죽게 됩니다. 그게 바로 생명의 속성입니다. 생명은 자라며 성숙해야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라야만 합니다. 그게 곧 믿음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게 분명하다면 이렇게 고단한 싸움의 과정 없이 지금 당장 영생을 주시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생명의 신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씨앗을 땅에 심은 다음에 하룻밤 만에 싹을 볼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이에 물을 흡수하고 햇볕을 받아서 씨앗은 싹을 틔웁니다. 그 사이에 그 씨앗이 죽을 수도 있겠지요. 하여튼 생명이 진행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고 이 세상 전체도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명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예수님이 재림할 때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재림 때까지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거기에 우리의 모든 신앙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곧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부활이 곧 참된 생명의 발현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했듯이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물론 생명 창조자이시며 완성자이십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이 초림 때처럼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 그 순간이 부활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저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바로 그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어야 저는 이렇게 희미하게 보이는 이 세상의 실체를 얼굴로 직접 대면하듯이 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제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너무나 부분적이며, 너무나 순간적이래서 전체적으로, 총체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건 다른 철학자들도 이미 말한 것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깊은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개구리와 비슷합니다. 그 개구리에게 하늘은 동전처럼 보일 뿐입니다. 우물 밖에는 폭풍이 불어도 우물 안에서는 그것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우물 밖 언덕에는 봄에 진달래가 피고, 가을에 단풍이 들지만 우물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만 들어올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는 개구리처럼 세상을 그렇게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머니 자궁 속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와 같습니다. 그 태아는 지금 살아있기는 하지만 이 세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심장소리와 위장 운동소리는 들을 겁니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면 아주 흐릿하게 어떤 소리를 듣기는 하겠지요. 어머니가 커피를 마신다고해서 그가 커피 향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대면하는 세상은 단지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아주 부분적으로만 세상을 접하고 있으며, 아주 간접적으로만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태아가 세상에 나오는 날부터 그는 전혀 다른 세상과 접하게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이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모든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그때가 되어야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나의 정체를 잘 모릅니다. 피상적으로만 압니다. 누구의 남편이며, 아내이고, 누구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이며, 누구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것은 피상적인 정체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라는 사실도 역시 피상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나의 실질적인 정체는 될 수 없습니다. 목사를 하다가 목사를 그만 둘 수도 있구요, 교수를 하다가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변적인 것을 내 정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C.S. 루이스의 책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Till We Have Faces)이 말하듯이 지금 우리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바로 그 때가 되면 우리는 가면을 모두 벗어버리고 실질적인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설명이 허황하거나 꾸민 이야기 같아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의 세상 경험을 절대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물 안에서만 평생을 산 개구리는 하늘이 무한하게 크고 넓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늘이 동전 크기의 무엇으로만 보입니다. 이럴 때 한 가지 가능성은 우물 밖을 경험한 친구 개구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겠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바로 그런 친구들이 있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우물 밖의 세계를 경험한 이들입니다. 그런 경험의 원천을 계시라고 하는데,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바울,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그런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재림 시기의 비밀
이제 우리의 질문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는가에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따른다면 “하느님께서 친히 정하신 때”입니다. 성질이 급하신 분들은 그 때를 속 시원하게 말해달라고 조를 수도 있겠군요. 태아가 세상에 나올 날은 물론 정해져 있지만 그 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해산의 고통이 와야만 태아가 나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출산일을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하지만 태아는 그 날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그 재림의 순간은 오직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에 속했다는 뜻입니다.
재림의 때가 하나님의 배타적 권한이라는 사실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에 대해서 복음서는 많은 이야기를 제공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눅 12:40)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 24:36)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과 미련한 처녀 다섯 명의 비유에서 신랑은 아무 예고도 없이 졸지에 들이닥쳤습니다.(마 25:1 이하) 몇 년 전 인도네시아 남부 해안에 들이닥친 쓰나미처럼 재림의 때를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도,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자연현상은 과학이 발달하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때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재림의 때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바로 절대적입니다. 그 하나님을 본문 15b절은 그 당시의 언어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한분, 주권자, 왕 중의 왕, 군주 중의 군주입니다. 하나님을 그 당시 정치적인 용어로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16절은 그 절대성을 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분은 홀로 불멸하시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사람이 일찍이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은 모두 죽거나 사라지는데 반해서 하나님은 불멸하십니다. 태양빛은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빛 가운데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하늘을 전체로 볼 수 없듯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그를 보게 되는 날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이시고 우리는 그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작은 존재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무력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먼지처럼 작은 존재로 살다가 죽을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기까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는 궁극적인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모래가 황금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아직 황금으로 변하지는 못했고, 단지 그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완성하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이미 참여했다는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체험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확실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산다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바울의 가장 핵심적인 영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약속에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말에 이루어질 참된 생명인 부활에 이미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아직 그런 능력에 사로잡히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이미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런 삶의 과정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믿음의 싸움입니다. 정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추구하는 믿음의 싸움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그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가 맡은 사명을 나무랄 데 없이 온전히 수행하시오.”라고 바꿔서 말했습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 기독교인들의 일상이 종말론적 차원으로 높아집니다. 우리의 일상은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예수님의 재림, 즉 종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사명입니다. 그 사명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일상이 영원한 게 아니라 재림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것이 아무리 절실하고 소중하다고 하더라도 잠정적입니다. 우리가 죽음으로 일상에서 놓여나 영원한 안식을 취하듯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인류는 일상의 수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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