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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잠듦과 깨어 있음

24:36~44, 대림절 첫째 주일, 20221127

 

 

예수의 수난 전승

전체 28장인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본 분들은 평탄하게 진행하던 예수님 이야기가 21장부터는 거칠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그 이야기를 수난 전승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의 시작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그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본거지로 하는 당시 유대교 고위 권력자들과 예수님이 거칠게 충돌합니다. 23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 비판했습니다. 24:1, 2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위용 앞에서 경탄해 마지않자 예수님은 성전 붕괴를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신앙과 삶을 모두 집대성한 건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붕괴는 세상 마지막에 관한 조짐입니다. 24:3절 이하에서 세상 마지막에 일어날 대재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19절의 표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일상에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을 정도로 긴박한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벌써 2022년이 한 달밖에 남겨놓지 않은 이 시점에서 이게 무슨 뜻인지를 실감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묵시적 대재난을 상징하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이 인자(人子)’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입니다. 인자가 올 때 일어날 대재난을 마 24:29~31절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모든 족속이 통곡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큰 나팔소리가 나고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삶의 토대로 여기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국가, 대형 건축물, 주식, 은행 계좌, 가족, 정치와 경제 권력 등등이 무의미해집니다. 지금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그 대상이 없어지는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인류 전체가 멸종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온다는 사실과 개인이 죽어 멸절되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전율할 정도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지금 주어진 조건에서 재미있게, 또는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열정적이고 느긋하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 삶의 태도를 오늘 성경 본문은 노아 홍수이야기를 통해서 전합니다. 38, 3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 홍수 이야기는 창 6~9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아주 깁니다. 홍수 심판이 당시 성경 시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는 뜻이겠지요. 홍수 심판은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이나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창세기 기자가 노아 홍수 전승을 끌어와서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은, 인간 문명은 악에 물들어서 언젠가는 심판받아야 하며,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당시 사람이었다면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 가족을 비웃었을 겁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서 무슨 홍수 심판이 임한다는 거냐, 하고 말입니다. 그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월드컵 축구대회와 같은 이벤트에 심취했습니다. 그들이 유독 무식하거나 분별력이 없다거나 유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산 건 아닙니다. 그들도 알 만큼 알고 느낄 만큼 느끼고 소유할 만큼 소유하고 인생을 누릴 만큼 누렸던, 그야말로 똑똑한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홍수라는 대재난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를 왜 외면했을까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결정적인 순간이 어떤 사람의 눈에는 들어오고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세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 철학적인 관점에서, 물고기에게 물이 보일까요?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정답은 물론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물을 보는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 밖으로 나와야만 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차이에 대한 질문과도 닿아있습니다. 왜 꽃과 고양이는 각각 존재하는데, 꽃과 고양이의 중간쯤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 우리는 그 궁극적인 이유를 모릅니다. 그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우리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2) 예술적인 차원에서, 소리와 색깔의 존재론적 깊이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을까요? 선승 불교에서는 기왓장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합니다. 소리의 아득한 깊이를 자기의 삶과 하나로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색깔도 생명이 있는 지구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입니다. 이런 소리와 색깔의 깊이를 느끼는 사람이 있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3) 일상의 차원에서, 우리는 가족을 우주 안에 있는 한 인간으로 이해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일반적으로는 단순히 아내, 남편, 부모, 자식, 형제로만 인식합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이 다정하고 친밀한 대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겠지요.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우주에 둘도 없는 한 인간 존재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가 오히려 낯설어집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족을 낯설게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가 어떻게 와 만났고,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지를 생각하면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장단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가까워질 수 있겠지요. 이런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표면적인 일상만 우리 삶을 지배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당시 사람들이 먹고 마시면서 일상에 몰두하느라 그 엄중한 사태를 깨닫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대림절(Advent)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지구와 우주 전체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가리켜서 오늘 본문은 인자의 임함’(the coming of the Son of man)라고 표현했습니다. ‘임함은 그리스어 παρουσία의 번역입니다. 파루시아는 coming, arrival, presence라는 뜻입니다. 대림절(Advent)에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탄절 전 네 주간을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로 지켰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2천 년 전 유대 베들레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둘째로 세상 마지막 때 생명을 완성하려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셋째로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맞아들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한 마디로 인류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노아 홍수의 방주 이야기처럼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한다는 말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기분 나쁘게, 또는 허황하게 들을 겁니다. 노아 홍수 때도 똑같았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40절과 41절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밭일과 맷돌질은 일상입니다. 겉으로는 우리 모두 똑같이 일상에 충실하게 삽니다. 두 사람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즉 인자가 커밍할 때는 두 사람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한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내버림을 당합니다. 비유적으로, 아이들이 동네에 모여 놀고 있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머니들이 나와서 자기 아이들을 불러들입니다. 한 아이는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다 돌아간 다음에 이 아이는 혼자 거처하는 다리 밑 움막으로 돌아갑니다.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며, 다른 사람은 안식이 없는 세계로 떨어집니다. 한 사람은 예수와 친구가 되나, 다른 한 사람은 외톨이가 됩니다. 한 사람은 죽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과 함께하는 경험을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혼자 막막한 상태에 떨어집니다. 저는 죽을 때 예수가 저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하나만을 원합니다. 그것만이 저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중이라고 믿습니다. 그것 말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이유는 없으니까요.

 

깨어 있으라.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외면당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데려감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 올지를 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본문 36절은 그 순간은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안다고 했습니다. 43절에는 도둑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올 줄 알면 집을 지킬 수 있습니다. 도둑은 몰래 옵니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도둑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4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 있으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잠들었다는 걸 전제하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겉으로는 깨어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잠든 상태일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26:36절 이하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지금 당신이 아주 힘든 상태이니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기도하다가 제자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잠에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께서 다시 기도하다가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잠들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아주 이상한 광경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실행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제자들이 몰랐을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몰랐다면 예수 제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깨어 있고 싶어도 육신이 피곤하면 어쩔 수 없긴 합니다. 육신의 피곤도 이유가 되긴 하겠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그 상황을 제자들이 절박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닐는지요. 아니, 그보다도 다음과 같은 다른 한 측면이 그 사태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가리킬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그 상황을 회피한 것입니다.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거지요. 그게 잠으로 나타난 겁니다. 정신병 치료에서 일차적인 방법은 환자를 약으로 잠들게 하는 것입니다. 망상에 떨어져서 정신이 과민해지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Coram Deo

현대인들도 이런 점에서 잠에 떨어졌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부조리한 실존을 직면하기가 두려우니까 외면하는 겁니다. 티브이 드라마에 취하거나 홈쇼핑에 취합니다. 어떤 이는 돈벌이에 취합니다. 유튜브에 취하거나 SNS로 모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각각의 상황이 다르기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현대인들은 전반적으로 일상에 과몰입하는 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정치 과잉이 특징적입니다. 극단적으로 선동하는 정치 유튜브를 통해서 일종의 진통 효과를 얻을 수 있겠으나 삶의 실체를 직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도 비슷한 현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잠든 사람일까요?

잠들었다거나 깨어 있다는 말이 모호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할지도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자기는 정말 정신이 말짱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 많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수준에서 살고 있으니까 깨어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꿈이 아무리 리얼해도, 즉 현재 우리의 실제 삶이 아무리 리얼해도 그게 모두 참된 삶은 아닙니다. 잠에서 깨어야만 그게 꿈인 걸 압니다. 저는 잠든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는 삶에 관해서만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는 것입니다. Coram Deo!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입니다.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듯한 태도로 사는 겁니다. 로마 아포리즘으로 바꾸면 “Carpe diem!”(순간을 포착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출가 수도승이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많습니다. 그들의 삶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 단순한 삶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수도원이 아니라 시장바닥에서 사는 우리는 수도승처럼 살지는 못하나 삶의 태도만은 그들과 다를 게 없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교사, 간호사, 요리사, 목수, 전업주부, 각각 자기 삶에서 수행하는 겁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의 수행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지를, 영혼이 풍요로워지는지를 보면 됩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그런 순간이 정말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그것 외에 더 기다리고 갈망해야 할 일이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요?

오늘 교회력에 따른 신약 서신은 롬 13:11~14절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그렇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이미 문 앞에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장면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마태복음 24:36~44
https://youtu.be/pr-DkdiRD6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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