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주현 후 여섯째 주일, 2022년 2월13일
전체가 16장으로 구성된 고린도전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을 고르라면 소위 사랑 예찬이라고 불리는 고전 13장을 고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15장을 고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 신앙에 관해서 여기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본문이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 15장은 분량도 많아서 전체가 58절이나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중에 일부인 고전 15:12~20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를 예배 후에 가족이나 교우들끼리 대화해보십시오. 부활 신앙을 자기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부활 신앙
바울은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는 의아할 정도로 비슷한 표현을 반복합니다. 13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이라고 했고, 15절에서도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이라고, 16절에서 다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이라고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이라는 표현은 14절과 17절에 반복됩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을 바꿔 말하면, 죽은 자의 보편적인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립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났기에 우리 신앙의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어떤 적대자와 신학적인 논쟁을 치열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그 적대자들이 누군지를 아는 게 본문을 이해하는 데 첫걸음입니다. 12절에 그들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과 똑같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던 영지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육 이원론에 근거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죽으면 육체는 썩고 영혼은 육체에서 벗어나서 하늘로 올라가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주장입니다. 이단 사상은 모두 그럴듯합니다. 그럴듯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기에 정통 교회는 이런 이단과의 투쟁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영지주의도 결국에는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에서 격퇴되었습니다. 그런 이단과의 투쟁 흔적이 사도신경에도 나옵니다. 예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마리아라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말은 예수를 실체가 아니라 가현(假現)으로 본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바울 역시 고전 15장에서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예수의 죽음은 실체이고, 부활도 역시 실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벌어질 부활 문제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기에 왈가왈부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현대 지성인들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불문하고 대체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있는 동안에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재미있고 행복하게 물론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자신의 궁극적인 미래에 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과연 재미있고 행복한 인생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 삶은 자신이 전생에 왕이었다는 망상에 떨어져서 정신병원에 들어간 사람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요? 온전한 정신으로 사나, 그 온전한 정신도 정확한 게 아닌데 어쨌든지, 정신병자로 사나 모두 죽음으로 완전히 소멸하고 만다면 재미있고 행복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인 부활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당신이 믿는다는 그 부활이 뭔데?”라고 묻고 싶으신가요? 부활을 단순히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일단 벗어나야 합니다. 부활은 죽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새 창조입니다. 새 창조를 이해하려면 우선 처음 창조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창조라는 말이 너무 그리스도교적이어서 마음이 안 들면 ‘빅뱅’을 생각하십시오. 138억 년 전에 한 점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지금과 같은 우주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계속 확장 중이라고 합니다. 빅뱅에서, 즉 첫 창조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도 창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 창조만을 창조라고 하지 않고, 그 창조가 보존되고, 나중에 완성되는 순간까지를 다 포함하여 창조라고 말합니다. 빅뱅으로 인한 우주 탄생 현상을 아무도 예측하거나 계산해낼 수 없듯이, 그 현상이 발생한 뒤에나 추적할 수 있듯이, 창조가 완성되는 새 창조도 실제로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는 우리가 그림으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권으로 일어날 생명의 완성입니다. 그 새 창조가 곧 부활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새롭게 창조하여 완성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바울 버전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교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교의 모든 내용이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14절에서는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고, 17절에서는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고, 18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했으며, 19절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바울이 짚은 내용 중에서 부활과 죄의 관계를 언급한 17절이 흥미롭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인간적 성취를 통해서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경 전통에 따르면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죄 가운데 있다는 말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 설명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십자가 신앙은 죄 용서의 능력을 잃습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가 죽음 이후의 천국이나 부활만 강조한다면서 십자가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자고 말입니다.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옳지 않습니다. 정의보다는 사랑과 생명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더 핵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정의를 실현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을 정의롭게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철저하게 자기를 성찰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정의는 그렇게 자신이 마음먹는다고 해서 실현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실제로 정의로운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설령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현대 세계사에서 공산당 혁명이 한 예입니다. 우리나라의 ‘촛불혁명’이라는 단어에도 그런 위험성이 숨어 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과 로마 정치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기껏해야 선지자의 인생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런 인생은 이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선지자의 삶이 숭고하지만, 선지자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선지자로가 아니라 우리의 운명 전체를 맡길 수 있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뿌리째 흔들린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첫 열매
바울은 2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첫 열매’입니다. 20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앞의 진술이 더 선명해집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말 성경이 ‘첫 열매’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아파르케’(ἀπαρχὴ)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firstfruits라고 표기합니다. 유대인들은 농사를 짓고 첫 소출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 첫 소출이 바로 이 아파르케입니다. 이 단어 아파르케는 헬라어 ‘아르케’라는 단어를 조합한 단어입니다. 아르케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라는 요한복음 1:1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라는 말은 그에게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새 창조는 첫 창조의 완성이라서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를 첫 창조 당시에 이미 예수가 말씀으로, 즉 로고스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냥 단순하게 첫 열매라고 말하지 않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잠자는 자들’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죽은 자 가운데서’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 잠은 죽음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인간의 죽을 운명이 극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예수 사건은 한 개인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모든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고전 15:21~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바울과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어떤 특별하고 절대적인 생명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은 전체 인류에게 미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입니다. 큰 나라의 공격을 받아서 모든 사람이 전멸당할지도 모릅니다. 아주 위태롭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청해서 큰 나라에 사신으로 갔습니다. 자칫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신은 큰 나라 왕을 설득했습니다. 그 설득이 주효했습니다. 이 사신 덕분에 작은 나라 백성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고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가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인류가 죽을 운명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죽음이 시작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놀라운 발상입니다.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 경험과 세상 지식을 근거로 이런 그리스도교 교리를 부정하거나 무시합니다. 우리는 억지로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귀를 막으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장을 외면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듣거나 무서워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들어있는 생명의 보화를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의 소리에만 기웃거린다면 얼마나 불쌍한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예수 제자들은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경험했기에 죽어야 할 인류의 운명이 예수로 인해서 삶을 얻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일까요?
살아있는 자
복음서와 바울의 편지에서 말하는 부활의 핵심은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살아있는 자”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다는 사실을 언제 경험하십니까? 숨 쉬고 음식을 먹고 걷고 대화하는 현상을 살아있음, 즉 생명으로 경험할 겁니다. 의학이 말하는 생명 현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늙으면 모든 생명 현상이 약해집니다. 사고를 당하면 당장 생명의 위기에 떨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생명 현상은 모두 시한부입니다. 그뿐만 이 아니라 미움, 분노, 절망, 자기 연민, 욕심 등으로 우리의 삶이 반복해서 파괴됩니다. 축제로 승화되어야 할 대통령 선거가 격투기처럼 벌어집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나요? 이렇게 산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산소호흡기를 연결해서 생명만 연장하거나 놀음판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다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나름으로 세련되고 교양있게 산다고, 모든 사람이 원하는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기준이거나 자기의 기분에 따른 판단이겠지요. 그런 방식으로 얻은 즐거움과 행복이 얼마나 확실한가요? 그것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생명을 얻는 데에 훨씬 지혜로운 길입니다.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절대적이어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고, 종말에 심판주로 오실 인자(Son of Man)이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었고, 예수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무덤에 묻혔던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는 진술이 무슨 뜻인가요? 부활의 예수를 아무도 사진을 찍듯이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에 나온 부활 전승에 따르면 부활의 예수를 만난 이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놀라워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외계인을 만났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익숙하게 만났던 존재가 아니기에 두려워하고 놀라워할 겁니다. 부활은 앞에서 짚었듯이 새 창조입니다. 마치 땅에서 잠자던 씨앗이 때가 되어 싹이 나고 꽃을 피우듯이 완전히 다른 생명체입니다. 씨앗만 아는 사람에게 꽃은 정말 이상하고 낯선 존재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마지막 때 일어날 그 새 창조가 예수에게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부활했노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만이 하나님을 알았고, 보았으며, 신뢰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만이 하나님과 일치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과 사도신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해 무덤에 묻혔던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로 인해서 잠자는 운명에 떨어질 우리 모두 새롭게 창조되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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