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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절망에 저항하다 (겔 37 : 1 - 10)

2024년 11월 24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3a0u_RFQ_Qo?si=zQNHh4_BCsPcPE-C

 

▣ 들어가는 말

- 절망의 시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평안하신지요? 바람은 시원한지요? 몸과 마음은 건강하신지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교육, 의료, 외교, 경제, 정치, 환경… 무엇하나 걱정스럽지 않은 곳 없습니다. 잠시 가졌던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이 이리도 짧은 시간 동안 무참히 짓밟힐 줄 몰랐지요. 절망.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본질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 변화의 동인은 충격적인 폭력의 경험입니다. 요시아의 때 이른 죽음 뒤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 기원전 604~562년 재위)가 이 지역의 주인이 되는데, 그 후 20년 동안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가나안을 두고 이집트와 경쟁합니다. 유다는 두 강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명맥을 유지하지요. 유다가 기회를 틈타 바빌로니아 통치에 저항할 때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다 왕국을 정벌하는데, 이런 원정이 세 번 있었지요.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젊은 왕 여호야긴은 바빌로니아에 항복, 백성 8천 명과 함께 자기 땅에서 추방당합니다. 여기에는 왕족, 귀족, 군인, 뛰어난 장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바빌로니아에서 임명한 시드키야(여호야긴의 삼촌)를 왕위에 앉히고 10년을 더 버팁니다. 그러나 기원전 587년 시드키야가 반란을 꾀하자, 네부카드네자르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고 맙니다. 시드키야는 아들들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본 뒤에 눈이 뽑히고 5천 명의 포로와 함께 바빌로니아로 끌려가지요. 유다는 제국의 행정 구조에 통합됩니다. 그리고 그 후 기원전 581년에 세 번째 집단이 또 끌려가지요.

약 75%의 주민이 남았지만, 예루살렘과 성전은 황량한 폐허가 됩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 텅 빈 광장, 무너진 담, 부서진 문을 묘사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전에는 번영의 도시가 이제 들짐승들이 살고,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어머니는 아기를 삶아 먹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절망과 공허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너무나 끔찍한 비극과 슬픔, 어떠한 빛도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어둠, 어떤 것도 꿈꿀 수 없는 절망, 기존의 모든 가치관과 신에 대한 믿음과 민족 정체성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걸 잃었기에 몇몇 사람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깊은 절망의 시대를 살펴보고 성경은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 예레미야

- 소명

예레미야의 고향은 “베냐민 땅 아나돗”인데, 예루살렘 근처 조그만 도시지만, 솔로몬 시대 때 제사장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제사장 힐기야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오랜 전통을 지닌 제사장 가문의 출신인 것이지요. 그는 유다 왕국 말기 요시야 시대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조국의 멸망을 지켜보고 마지막에는 강제로 이집트에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비극적 운명을 함께 한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여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하며, 아시리아가 약화하는 틈을 노려 나라의 독립을 꿈꾸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지만, 609년에 이집트의 왕 느고의 군대에 의해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말지요. 이후 나라는 급속도로 무너져내리게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1:4) 하나님 체험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생의 대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그에게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왔고, 이로 인해 그의 삶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삶의 목적과 방향이 졸지에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지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1:5) 예레미야가 자신의 하나님 체험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사명을 깨닫는다는 것,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인식의 변화가 아닐까요. 어느 순간 말씀이 내 심장을 뚫고 들어와 내 모든 몸과 정신을 전율하게 만들고, 비로소 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삶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며, 거대한 우주 주권의 섭리, 계획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보라…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하였으니라.”(1:10) 예레미야의 중심된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그에게 주시며, 그가 해야 할 일들을 밝힙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일지도 모릅니다.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온전치 못한 것들은 무너뜨리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심어야 합니다. 새로운 신앙을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거짓된 사회적 및 종교적 관행은 쓸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 왕조, 국가에 내리는 엄중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살아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신다는 선언입니다.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예언자 예레미야는 세 차례에 걸친 바빌로니아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일관되게 바빌로니아를 지지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행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여호와가 도시를 파괴할 것이라 외칩니다. 이것은 대역입니다. 그는 왕과 귀족, 백성들에게 조롱받고 배척당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회피하고 무시합니다. 그를 반역자 취급합니다. 성전에서 유다가 심판받을 것을 설교하다가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투옥됩니다. 또한, 고관들은 그를 진흙이 가득한 우물 속에 던져 넣기도 합니다. 후에 왕의 명령으로 구출되기는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과 갈등을 빚습니다. 결혼하지 못했고 자녀를 둘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집트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하지요. 지독한 외로움과 고립을 경험합니다. 그에게 사명은 참으로 지독한 형벌과 같이 보입니다.

자신도 예언자 노릇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어쩔 수 없이 “파멸과 멸망”을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을 닫으려 하면 심장과 뼈에 불이 붙는 듯하여 다시 예언할 수밖에 없었지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9) 자신의 사지를 비트는 고통은 바로 여호와의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 또한 수모를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낍니다. 그는 자기 시대의 공포, 분노, 슬픔에 마음을 열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구석구석을 침범하는 것을 받아들이지요.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기에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도 유다 백성 중 한 사람이므로 동족에게 임하는 재앙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4:19에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다.” 울부짖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메아이 메아이”로 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나의 배, 나의 배”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심장을 지성의 장소이고, 배를 감정의 장소로 보았기에, “나의 배, 나의 배”라는 표현은 강력한 감정의 발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애2:11) 눈물의 선지자, 슬픔의 예언자.

 

▣ 에스겔

- 에스겔

에스겔은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그발(체바르) 운하 근처 텔아비브(봄의 언덕) 마을에 정착합니다. 추방을 당하고 나서 5년 뒤인 기원전 593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아직 서 있던 시기에 에스겔은 그발 강둑에서 혼란스러운 환상을 봅니다. 강한 바람이 불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천둥이 치고,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머리가 넷 달린 생물 네 마리가 전차를 끕니다. 전차 위에는 보좌의 형상이 있고, 그 위에 사람 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그 팔다리에서는 불을 뿜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영광처럼 보였다. 두루마리를 쥔 손이 뻗어 나왔는데, 두루마리에는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엮어대는 상여소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은 성스러운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기 전에 억지로 그 두루마리를 먹어야 했습니다. 자기 시대의 폭력과 슬픔을 고통스럽게 소화해야 했던 것이지요.

에스겔의 환상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초월적인 것,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입니다. 추방의 트라우마는 《신명기》 저자들이 그린 단정하고 합리적인 하나님을 모습을 부수어버렸습니다. 그에게 건네진 두루마리에는 어떤 지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고 정리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의 외침뿐입니다. 에스겔은 텔아비브로 가서 ‘얼빠진 사람이 되어’ 일주일을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충격과 놀라움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고 그 엄청난 슬픔과 공포를 받아들이자, “인자야,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내가 먹으니 내 입에서 꿀 같이 달았다.” 여호와가 어떤 위로도 주지 않았지만 추방당한 자기 백성을 찾아왔다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성전은 저 먼 고향 땅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여호와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떠나 추방당한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유다 사람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 때문에 자신의 도시에서 쫓겨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의 임무는 기원전 597년에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바빌로니아에서 제대로 질서 잡힌 생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의 무게를 온전히 경험하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 기인한 퍼포먼스

에스겔의 이상하고 왜곡된 행동은 마치 행위예술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여호와는 그에게 애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번은 에스겔에게 390일 동안 왼쪽으로 눕고 40일 동안 오른쪽으로 모로 누워 있게 합니다. 여호와는 그를 묶어 집안에 가두고, 에스겔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말을 할 수 없게 합니다. 한번은 짐을 싸서 피난민처럼 텔아비브 주위를 걷게 하기도 했다. 에스겔은 심한 불안을 느끼는 바람에 계속 몸을 떨면서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계속 안절부절못하면서 돌아다녀야 했다. 그는 이것이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동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세계가 뒤집혔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도 긴장을 풀거나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추방당한 사람들이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밝은 면을 보거나 곧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 미망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뒤집힌 세계, 뒤집힌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여호와의 전차가 유다를 떠나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얼마 전에 에스겔은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떠난 이유를 알려주는 환상을 봅니다. 그는 안내를 받아 성전을 돌아다니다가 유다 백성이 파국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호와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보고 경악합니다. 성전 벽에는 몸부림치는 뱀과 역겨운 짐승들이 그려져 있고 더러운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들은 은밀하고 추악한 성행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에서는 여자들이 식물의 신 탐무즈(담무스)를 섬기며 울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호와가 사는 지성소에 등을 돌린 채 태양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9:10) 그들의 세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참담한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의 끝에 여호와의 전차가 감람산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10:18) 여호와께서 신성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거룩한 성전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분의 영광을 거두어 가고 있습니다.

 

▣ 나가는 말

- 하나님의 파토스(감성)

예언자의 고통과 절규는 사실상 고통하시고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추상적 개념들의 연속으로 구성된 신이 아니라, 살과 피를 지닌 인간적 언어들을 통해 되살아나는 ‘살과 피’를 소유한 살아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파토스로 이끌어 줍니다. 인간사 안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살과 피를 지닌 채 우리의 웃음과 울음, 즐거움과 슬픔, 환희와 비통, 분노와 좌절 속에 계시는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중심부에는 하나님의 파토스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파토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세상과 이웃을 향한 연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타는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질 때, 우리는 존재가 생명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지 압니다. 눈물의 선지자는 바로 눈물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고통과 고독과 외로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고통과 외로움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그분의 파토스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두루마리를 삼키다

추방은 단지 주소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혼돈, 삶의 표류, 길을 잃음, 영혼의 혼란입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문화의 붕괴, 정체성과 뿌리와 단절, 삶의 목적과 방향의 상실, 하찮은 존재, 쓸모없는 존재로 시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노예입니다. 우리 역시 삶의 상황의 노예가 아닐까요. 그들 중 일부는 이제 여호와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가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두크에게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며 견딘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봅니다. 추함과 거짓과 깊고 깊은 어둠을 마주합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삼킵니다. “배에 넣고 창자에 채웁니다.” 심연을 마주 대한 이는 울 수밖에, 고통과 재앙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영원한 지옥 불에 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얼이 빠진 듯 깊은 침묵 속에서 지내고 나니, 그 고난의 잔이 입에 꿀과 같이 달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 임마누엘

이제 약속의 땅,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성전은 사라졌지만, 여호와의 영광은 그곳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난받고 있는 백성들에게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이 새 계약은 돌판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성전은 사라졌지만, 이젠 고난받는 백성 하나하나가 곧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에 한정된 여호와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곳이 거룩한 장소요, 여호와를 가슴 속에 품은 우리 하나하나가 곧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제는 존재의 핵심에서 현존하는 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은 몹시 괴로워 겉으로는 정신병자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그의 눈앞에 사람 뼈가 가득한 들판이 보입니다. 이 들판은 추방당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이지요. 추방당한 사람들은 계속 말합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겔37:11) 그러나 에스겔이 뼈에 대해 대언하자 생기가 들어옵니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10) 언젠가 그들이 온전히 회개하면 여호와가 추방당한 자들을 고향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복귀가 아닙니다. 여호와는 약속합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37:14)

고통을 소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감내할 때, 그래서 자신이 곧 거룩한 성전이 되어 살아가게 될 때, 부활을, 회복을 약속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언제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우리의 심장 속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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