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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렘 23:1-8), 11월21일, 성령강림절 후 26째 주일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성령강림절 후 26째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력 첫 주일인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에 유대가 멸망하는 순간을 직접 목도한 예언자였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을 보는 것만큼 비통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제에 합병되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한 파멸이었었습니다. 유다가 역사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성전의 값진 기물은 모두 약탈당했고, 마을의 모든 집은 불타버렸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은 시드기야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 밤에 몇몇의 군사를 데리고 도망쳤다가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시키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서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시드기야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질병에 걸려 죽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남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지식인과 기술자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 지역에는 주로 하층민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

     조국의 몰락만이 예레미야를 힘들게 한 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도살당하러 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렘 11:19)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크게 들고 일어났습니다.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렘 26:8b) 그들은 유다 고관들에게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외친 제사장들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는 그를 지지하는 일부 백성들과 유다 고관들의 올바른 판단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비판한 대표 인물은 선지자 하나냐입니다. 그와 예레미야가 성전에 공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일종의 신학 논쟁입니다. 하나냐가 먼저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 왕느부갓네살이 유다 민족에게 씌운 멍에를 하나님께서 꺾을 것이며,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서 빼앗아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2년 안에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기 10 여 년 전에 이미 일부가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성전 기물도 강탈당했었습니다. 그것을 원상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반론이 이어집니다. 하나냐의 예언이 이뤄지기를 바라지만 그것보다 먼저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냐의 말은 현실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냐가 앞에서 한 자기의 이야기를 다시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2년 안에 나무 멍에를 꺾듯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꺾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반대의 예언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나무 멍에가 아니라 쇠 멍에를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렘 28:16)

     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은 바벨론의 위협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총체적으로 불안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냐와 예레미야가 똑같이 선지자이면서 서로 다른 말을 했습니다. 하나냐는 모든 문제가 속히 해결된다고 주장했고,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심지어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돌아올 꿈을 꾸지 말고 바벨론 왕을 잘 섬기면서 살아남으라고 편지를 쓴 일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레미야가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들과 현실유지를 바라는 이들은 모든 게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말을 해주는 선지자를, 그런 설교자를 원합니다. 그런 기대는 사람의 기본 심리입니다.

     예레미야도 유다 백성들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달콤한 말로 위로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신탁(神託)의 담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청중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는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선 일단 청중들의 압력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철없는 자녀들의 요구를 물리치기 힘들어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녀들이 너무 귀엽기 때문에 ‘오냐’ 하는 심정으로 따라갑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탁 담지자가 선지자라는 건 옳지만 모든 선지자가 신탁 담지자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준비가 안 된 선지자들도 많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신탁은 점쟁이의 일처럼 마술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역사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옵니다. 사람과 그 시대를 읽는 눈이 필요합니다. 선지자들은 신앙의 눈을 가진 역사학자라고 보면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대를 뚫어보았습니다. 유다는 바벨론 제국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군사적인 힘도 없었고, 신앙적인 힘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멸망은 필연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을 먹고, 살해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

     예레미야가 조국 유다의 멸망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일정한 기간을 버림받은 것처럼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바로 바벨론 포로 시대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갈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실 거라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본문 렘 23:3절에서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장 오늘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의 현실은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망적인 시간이 지난 뒤에 옵니다. 그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절망적인 현실을 외치지만 동시에 희망의 미래를 외칩니다. 청중들은 이런 미래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이런 청중들의 영적 안목을 하나님이 행하실 미래의 구원으로 열어가는 것입니다. 절망이 깊을수록 이런 희망의 노래를 더 간절하게 불러야 합니다. 단순히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에 대한 희망에서 오늘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야 앞으로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것을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한 왕이 나올 때가 온다고 말했습니다.(5절) 그 왕은 그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고,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합니다. 이때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입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불릴 것입니다.(6절) 구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여호와 우리의 공의’의 원어는 ‘야웨시드기누’인데, 이는 ‘여호와는 나의 변호’라는 뜻의 ‘야웨시드기아’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시드기아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유다가 바벨론 제국 앞에서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하는 길을 자초한 왕입니다. 이런 시드기아 왕과 발음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유다를 구원할 참된 왕이 역사에 등장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에 속한 메시아사상을 따라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메시아 이름은 ‘야웨시드기누’이고, 그가 행할 일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엇일까요? 불의와 반대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질서입니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정의와 공의를 외쳤습니다. 마지막 선지자이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보십시오. 그는 당시 광야로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따라서 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부른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눅 1:52, 53)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예수님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나 누구나 똑같이 일당을 주는 포도원주인과 같다고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력과 상관없이 최소한 먹고 입고 잠잘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정의에 대한 개념입니다.

    정의로운 세상, 요즘 우리나라 정치계에 화두로 등장한 ‘공정한 사회’는 쉬운 목표가 아닙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그런 사회에 도달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가 최고로 보장되는 북유럽에도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아귀다툼처럼 경쟁에만 몰두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최고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도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다가 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에게 한 경고를 보십시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렘 22:13) 이게 인간사회의 딜레마입니다. 정의를 실현해야만 사람과 세상이 삽니다. 그러나 정의롭게만 살면 결국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의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의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사랑해야만 살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에게서 그런 모순, 그런 한계를 느끼실 겁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 년 동안의 먹을거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 절기를 끝낸다면 바른 신앙의 모습은 아닙니다. 공정한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한쪽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고, 다른 한쪽은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먹을거리마저 없다면 이건 메시아의 정의와 공의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입니다. 이런 현상을 그리스도인들이 동조하거나 묵인할 수는 없습니다. 잊지 말고 기억해 두십시오. 정의는 근본적으로 메시아의 일입니다. 메시아만이 정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린다면 당연히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메시아가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레미야가 말한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이며, 왕이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메시아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도식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정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불법한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운명이 끝났다면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지배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악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바로 궁극적인 정의입니다. 죽음의 극복보다 더 큰 정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질적으로 새로운 정의를 이 세상에서 실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불의가 판을 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그 사실을 실제로 믿는다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정의와 공의의 빛을 반사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각자의 영적인 분량만큼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자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예레미야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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