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道)의 본질
눅 17:7-10
주인과 종
예수님은 삼년 동안의 공생애 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어울리기도 하고, 여러 병을 고치시키고 하셨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이나 신앙과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가르침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 가르침 중에서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으니까 그 형편을 알만 합니다. 이제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그 말씀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것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지난 2천년이라는 세월의 틈이 너무 멀기도 하지만 그 가르침을 왜곡한 역사가 너무 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우리가 따라가기 쉽지 않으며, 더구나 왜곡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일단 우리의 어떤 고정된 신앙적 경험의 틀을 잠시 내려놓고, 이것을 우리는 ‘선험적’(a priori)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 자체와 직접 부딪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인과 종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7절). 고대 사회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주인은 종을 인격체로 다루지 않고 소나 돼지처럼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소유물로 생각했습니다. 고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2백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이 있었습니다. 소가 우시장에서 팔리듯이 흑인들은 노동력에 따라서 값이 매겨졌습니다. 백인 주인들은 노예들을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현상이 여러분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때는 당연했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이렇게 최근의 역사에서도 노예가 물건처럼 다루어졌으니까 로마가 지배하던 2천년 전의 상황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으로는 남자 노예가 앞에 있어도 여자 주인은 스스럼없이 속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남자 노예가 사람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귀여운 강아지쯤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종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오늘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종이 하루 종일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다가 저녁때가 되어 집에 돌아왔지만 주인은 그에게 ‘어서 밥부터 먹게’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이 먹을 저녁밥을 지어야 하고, 주인이 먹는 동안 시중을 든 다음, 모든 집안일이 끝난 다음에야 겨우 자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이 집안에서 일하는 종을 따로 두지 않은 걸 보면 아마 그렇게 큰 부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집안일을 하는 종이 따로 있었다면 하루 종일 밭이나 들에서 일하다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 종들이 좀 쉴 수 있었을 테지요.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해서 이렇게 주석을 달았습니다. 이 주인의 무리한 명령을 종이 그대로 따랐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종이지만 거의 기계처럼 주인에게 봉사했다면 주인이 마땅히 고맙게 생각할 것 같은데, 그럴 이유가 없다는 예수님의 주석은 좀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강아지도 귀여워해주고, 소도 시간 맞추어 먹을거리를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어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위에서 언급한대로 고대사회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이런 게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도나 법이 그런 걸 가능하게 했지만 인간의 의식 자체가 그렇게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을 아무렇게나 다루면서도 주인은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종을 자기 자식이나 동생처럼 생각한 특별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일반적으로 주인은 종이 감당해야 할 비인간적인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노예윤리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으셨습니다.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10). 종이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린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저녁 내도록 주인을 시중들었대도 주인이 전혀 칭찬 한 마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다면 좀 짜증이 날만도 한데도 무조건 자기를 낮추는 게 바로 종이 지녀야 할 바른 태도인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이런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인의 미덕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일단 이런 가르침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교만이 하늘 끝까지 닿았다는 점에서 보면 종처럼 자기를 낮추는 태도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신앙적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자리에서도 늘 겸손을 강조하셨으며,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죽기 까지 자기를 낮추셨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자학적인 수준에 이르는 수고를 기울였어도 자랑하지 말고 끝까지 자기를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원칙적인 관점에서 옳습니다만 이 가르침이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확대 적용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앞에서 미국의 노예제도를 지적했는데, 만약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미국의 역사에 있었던 그런 노예제도를 합리화한다면 그것은 말씀에 대한 오해이며 왜곡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문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이 가르침에 근해서 일종의 노예윤리로 작용할 가능성은 많습니다. 예컨대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교회 일에 매달리게 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니까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 말고 오직 교회 일에만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습니다. 이런 상태가 더 왜곡되면 교회 지도자를 주인처럼 따르는 게 곧 신앙인 것처럼 강요됩니다. 이런 신앙적 정서는 교회가 기독교인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과 맞물려 상승됩니다. 노예의 심리에는 기본적으로 열등감이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듯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죄책감이 그런 작용을 합니다. 주인이 그 어떤 요구를 해도 기계적으로 따라가는 그런 노예윤리를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하는 일이 우리의 현실에서 허다합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경고
거의 노예윤리와 흡사한 것처럼 들리는 오늘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상황과 사람들을 대상으로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즉 이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이 노예 심리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사건이라 할 신앙을 사물화하고 상대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곧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앙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 보면 바리새인은 자기가 죄 많은 세리와 달리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라고 자기의 업적을 늘어놓았습니다. 구조적으로 경건하게 살아갈 수 없었던 세리에 비해서 매우 월등한 삶의 조건 안에서 살아갔던 바리새인은 그런 조건을 무시한 채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하게 대우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걸 기득권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만 구원받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까지야 어찌할 수 없거나 신앙의 속성상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여기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생각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들의 좁은 범주 안에 가두어두고 자기들 방식으로 독점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등급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마당이니 유구무언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 사람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서 차등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생명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요즘 대입 수시모집에서 고교등급제 적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시골에 있는 고등학교와 서울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 사이에 실제로 학습 수준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것을 입시에 반영하겠다는 유수의 사립대학교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교육부 사이의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고교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대학의 발전을 위해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선발하겠다는 대학 측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고교 평준화 정책이 전체적인 실력 하락을 불러왔다고 하면서 공정한 경쟁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서울 강남과 하양 사이에 교육 조건이 불합리한 가운데서 어떤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고등학교 때의 점수만으로 대학입학의 자격을 매긴다는 그 제도 자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독일도 그렇지만 네덜란드의 경우에 의학대학 입시는 단지 최고 수준의 성적을 받은 학생부터 차례대로 뽑는 게 아니라 그 이하의 학생들도 일정 부분 선발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잘났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을 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이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이런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지향하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공동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는지 대답은 나와 있습니다..
존재론적 기쁨
오늘 본문을 단지 업적과 상벌 중심의 사유에 빠져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경고라고 보는 것은 말씀에 대한 소극적인 해석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소극적이라는 게 아니라 말씀의 어두운 면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제 이 말씀의 적극적인, 또는 밝은 면을 보아야 합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아무리 뜯어봐도 밝은 부분은 없을 것 같지만 우리의 영적인 시각을 조금만 아래로 돌리면 그 세계가 들어올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노예가 자기의 행위를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는 말은 그 행위 자체가 그의 존재론적 토대라는 뜻입니다. 노동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는 노예는 그 노동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 노동을 통해서 그가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노예적인 삶을 미화하거나 추상화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가르침도 노예의 삶 자체에 대한 합리화가 아닙니다. 자기의 행위에서 이미 존재론적 토대를 발견한 사람의 영적인 깊이를 가리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가능합니다. 참된 작곡가는 그 작곡 행위를 통해서 기쁨과 구원을 경험합니다. 시인들도 그렇고 철학자와 신학자들도 그렇습니다. 만약 반대급부를 통해서만 자기의 행위에 값을 매기려는 예술가나 학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사이비입니다. 거꾸로 이런 보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행위에서 인간은 전혀 기쁨과 구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보상에 관계없는 행위, 값으로 측정되지 않는 행위, 그러니까 그것 자체로 진정한 기쁨과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구체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영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제가 알아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종의 수고를 고마워하지 않은 주인의 태도를 보면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킨 노동은 종으로 하여금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행위 자체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이고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보상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 말고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기독교인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말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더 시급하고 더 절실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 보상을 받지 않아도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여러분의 삶은 충분히 행복하고 즐겁습니까? 그런 영성이 확보되어 있나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도(道)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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