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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제자도의 위기

22:24-34, 사순절 여섯째 주일, 2019414

 

24.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가장 자세하게 다루는 대목은 예수님이 유월절을 일주일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마지막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당시 유월절에는 팔레스타인 지역만이 아니라 안디옥이나 알렉산드리아 등등, 지중에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 일행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판단했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자신들의 전통이 흔들린다고 생각한 겁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눅 22:1,2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예수의 마지막 순간

이런 상황은 예수님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2:39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습관대로 감람산, 그러니까 올리브나무가 많은 언덕에 올라가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이자 인자이시니 십자가 죽음은 거뜬히 감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으로 사람들이 기대하겠지만 예상 외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이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것 자체가 참혹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기도하던 예수님께서 흘린 땀이 핏방울처럼 보였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제자들이 어느 정도 버팀목이 되어주었어야만 합니다. 그 어떤 제자도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러운 상황을 더 힘들게 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세 가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첫 배신은 가룟 유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22:14절 이하에 따르면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님은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근심하면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물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제자 일반입니다. 오늘 본문 눅 22:24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순간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을 벌였다고 합니다. 지금 상황은 예수님이 오늘밤에 체포당하고 야간 심문을 당한 뒤에 다음날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직전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가장 엄중한 순간입니다. 스승과 동고동락을 했으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연대한 제자들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처한 이 상황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런 마당에 누가 더 크냐?’ 하는 논란을 벌였다는 건 이들이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주로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더 크냐?’는 제자들의 논란을 정리한 뒤에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으니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한다.’는 말은 사탄이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을 가지고 논다는 뜻입니다. 사탄이라는 단어는 가룟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음모를 짜고 돈을 받을 때도 등장했습니다(22:3). 가룟 유다의 배신이나 시몬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행위라는 뜻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더 진행되면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당할 때 몰래 따라가 마당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베드로를 예수의 일당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그 사실을 부정합니다. 똑같은 일들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닭이 울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나서 크게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 눅 22:3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기까지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우리는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중심을 잡지 못했는지 궁금합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은 그런대로 이해는 갑니다. 그들은 그 문제를 신학적인 주제로 삼았을 겁니다. 요즘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이 뭐냐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도 이해는 갑니다. 그는 은 30냥이 탐나서 스승인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로 삼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파렴치한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다는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학문이 깊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관과 세계관을 실현하려고 예수를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로마를 격퇴시키고 이스라엘이 세계의 으뜸 민족이 되는 꿈을 실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한창 잘 나갈 때는 수천수만 명이 모일 정도였으니 이런 기세라면 뭔가 세상을 확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런 정치적인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가 상상력을 빌려서 생각한다면 유다는 조용한 시간이나 길을 가면서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종종 말했을 겁니다.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니 마음만 먹는다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아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님을 막다른 골목으로 밀고 들어가야겠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습니다. 죽음이 목전에 닥치면 뭔가 결정적인 일을 실행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강제하려는 일종의 배수진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부인

우리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에서 으뜸에 속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늘 앞장섰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고, 바로 전에 죽는 데에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큰소리를 친 인물입니다. 초기 기독교 문헌에 따르면 그는 훗날 순교를 당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없었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토대가 잡히지 않았을 겁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선교의 중심인물로, 바울은 이방인 선교의 중심인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2:11절 이하를 따르면 베드로는 안디옥을 방문하여 바울과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잠깐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인들과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바울은 위선적인 행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초기 기독교에서 손에 꼽히는 지도자였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무슨 생각으로, 무슨 배짱으로 예수님이 심문당하는 대제사장 관저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 관저에서 베드로는 일신상의 위협을 실감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 지도층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이 그들에게는 없지만 예수님을 제거해야겠다는 자신들의 결정을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관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로마 총독의 판단까지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총독은 여론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 여론만 조성하면 문제 해결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자 집단에게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은 절대 위기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제자 집단은 당연히 해체되고 말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에 모든 제자들은 각기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실현해보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의 꿈이 끝장났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어정쩡한 입장입니다. 당장 줄행랑을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예수 석방을 위해서 뭔가 액션을 취할 수도 없습니다. 상황을 예의주시해야겠지요. 베드로는 복잡한 마음으로 대제사장 관저 마당에서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면서 신분을 숨긴 채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어떤 여종이 이 사람이 피고인으로 잡혀온 예수와 함께 하는 걸 봤어요.’ 하자 깜짝 놀란 베드로는 나는 그렇지 않소. 당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곧 후회했습니다.

먼 훗날 베드로는 자신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며, 그 이야기가 초기 교회에 구전되다가 복음서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가 베드로의 이 진술을 간직한 이유는 베드로의 실수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실존이 베드로의 이 경우와 다를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독일 교회당의 첨탑에 십자가가 아니라 간혹 닭 모형이 달려 있는 건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교회에는 제자도의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일들이 늘 일어났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누가복음은 대략 기원후 8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학자들은 봅니다. 그보다 10년 전인 기원후 70년에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발생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교의 보호막 아래서 지내던 예루살렘 교회도 허허벌판에 버려진 고아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이전과 이후에 로마로부터 꾸준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여러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겁니다. 직업을 잃거나 때로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목숨을 내놓을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올곧게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일신상의 고난이 예상되면 배교하거나 가나안 교인처럼 신앙생활을 포기했습니다. 대제사장 관저 마당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손사래를 친 베드로의 모습은 초기 기독교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제자로서의 정체성

오늘 우리는 초기 기독교와는 다른 시대를 살기에 신앙생활로 인한 직접적인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로서의 정체성이 위기에 떨어지는 일은 당시와 똑같이 일어납니다. 어떤 점에서는 초기 기독교 당시보다 지금이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당시는 기독교 신앙이 로마 체제에 저항하고 있어서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했지만 지금은 기독교 신앙이 이미 세속 정신에 깊숙이 물들어서 제자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21세기 기독교인들은 세상과의 긴장과 갈등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그걸 애써 피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살이는 세상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갈등 없이 수행합니다. 세속의 질서와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제가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그게 무슨 문제냐,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먹고 살아야 하니 열심히 노력해서 돈 많이 벌고 재미있게 인생을 살아야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래야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 하더라도 가난하거나 여러 가지로 경쟁력 없이 사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복음 전파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문제는 부자가 되느냐 가난한 자가 되느냐,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느냐 중산층 아래에 속한 사람이 되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생각하면서 사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습니다. 최소한 그런 문제의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제자도, 즉 제자의 길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업운영의 메커니즘이 있겠으나 먼저 예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해야 하겠지요. 학교 교사라면 학교의 작동 메커니즘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먼저, 아니면 최소한 동시에 생각해야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이기 전에 저는 세례 받은 사람으로서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목회를 어떻게 할지, 예배를 어떻게 인도해야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목사를 비롯해서 교사, 자영업자, 의사, 판사 등등,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보다는 각자 속해있는 체제의 메커니즘에 무작정 매달려서 살아갑니다. 이게 제자도의 위기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 문제 제기가 가능합니다. 세상은 기독교 신앙과 완전히 다른 작동원리에 의해서, 또는 아무 관계없이 돌아가니까 세상살이에서 제자의 정체성을 실제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게 하나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작동원리에 충실하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사십시오.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붙든다는 게 구체적으로 뭔지, 심감 하기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세상에서 가능한 착하고 정의롭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다행이긴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착하고 정의롭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덜 나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겁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별로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자기 마음에 갇힐수록 고집만 강해지고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전 9:27절에서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구도적으로 붙들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부자로 사나 가나하게 사나, 교양 있게 사나 없게 사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은 예수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얼마나 예민하게 확보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22:24-34
https://youtu.be/0d8gfDY1Gj8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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