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길
눅 14:25-34
망대와 전쟁
오늘 본문 말씀은 약간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25-27절은 예수님의 제작 되려는 사람이 취해야 할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며, 28-32절은 이것에 대한 두 가지 비유를 제시하고 있고, 33-35절은 제자의 속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할 인간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첫째 단락과 소유를 포기해야한다는 셋째 단락은 대충 연결이 되는데 망대와 전쟁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둘째 단락을 이것과 연결시키는 좀 까다롭습니다. 과연 망대와 전쟁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일단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망대를 세울 계획을 짰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그 망대를 세우는데 소요되는 예산 계획을 짜지 않고 무조건 시작했다가 기초만 쌓고 결국 일을 끝내지 못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모든 일에는 그 일의 전체 과정을 염두에 둔 준비가 우선 착실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 말은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잠깐의 기분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 전체를 통해서 진행되는 삶의 결단이기 때문에 미리 정신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31,32절이 제시하고 있는 전쟁의 비유도 망대비유와 거의 똑같습니다.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력을 비교해서 자신들이 우세한 경우와 불리한 경우로 나누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전력이 우세하면 전쟁을 해도 승산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겠지만 만약 전력이 부족하다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화해하는 게 지혜롭습니다. 이 전쟁 비유도 역시 위의 망대비유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전쟁을 준비하는 듯한 영적인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서의 십자가
여기까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전체 존재를 던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26절에 말씀하신 대로 자기의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늘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이 힘들어도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로 알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가르침에 동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부모와 가족,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 미워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대로 믿고 따라야합니다. 흡사 어렸을 때 부모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그게 옳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우리는 순종할 뿐입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예수님이 무슨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주가 말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따라가다가 결국 삶을 훼손시키는 사이비 이단 종파의 사람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게 순종적인 자세이지만 일단 바르게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자기 가족까지 미워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 우리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씀을 예수님이 가족을 실제로 미워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신앙 문제로 인해서 가족과 원수 질 일은 별로 없습니다. 간혹 믿지 않는 집이나 불교 집안으로 시집간 며느리의 고생에 대해서 듣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일반적인 사건들은 아닙니다. 유대교와 로마 정치의 질서 안에서 신앙을 유지해야만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아마 순교의 위협을 실제로 느꼈겠지만, 그리고 그 뒤로도 인류 역사에서 그런 상황이 특별하게 주어진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족들만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자기의 생명까지 미워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상황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온 세계보다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예수님이 주신다는 생명은 영적인 것이고,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육체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는 금욕주의자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금욕적인 가치를 좋은 것으로 내세우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등, 금욕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신앙의 업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은 육체를 부정하거나 낮추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셨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었던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의 길
오늘 예수님은 가족을 미워하거나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의 길’, 즉 제자도(道)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일상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길을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그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의 삶을 걸어두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에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자기의 삶을 옮겨야 합니다. 반드시 자기의 가족을 미워하라거나 자기의 육체적 생명을 부정하라는 것과는 다른 말씀입니다. 물론 본문에 미워하라는 말씀이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만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문자 한 구절 한 구절에 묶이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가장 긴밀한 인간관계인 가족을 미워할 정도로 우리의 영적인 태도가 민감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망대와 전쟁만이 아니라 가족 이야기도 역시 이런 점에서는 비유입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마저 상대적인 차원으로 밀려나야만 할 그런 세계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제자의 길을 잘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모른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게 좀 어색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모인 공동체인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 나라를 모른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공허함에 의해서 다툼과 시비가 일어납니다.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온갖 화려한 종교적 업적을 쌓았지만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또렷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것으로 그 공백을 메우려고 안간힘을 쓸 뿐입니다. 음악의 예를 다시 들겠습니다. 누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음악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은 그런 악보나 악기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세계입니다. 그런 음악 경험은 설령 음악대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리에 대한 시원적 체험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집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는 바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몇 가지 종교적인 습관을 몸에 익힌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족과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신 이유도 이것과 연관됩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것들은 아무리 강화시키고 확대시킨다고 해도 우리가 근원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소유 지향성
다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33절).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소유를 통해서만 자신을 확보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현상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소유 지향적인 사람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소유 지향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현상 중에서 일단 하나가 깨져야 다른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두 현상이 우리에게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시나브로 그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26절에 열거되어 있는 미워해야할 항목들은 우리에게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소유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으로 삶의 목표를 삼는 사람은 결코 제자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위에서 열거된 그런 항목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신앙까지도 소유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교회도 역시 소유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 나라 운동에 기대어 있을 뿐인 교회마저도 ‘네 교회’와 ‘내 교회’로 갈라져서 서로 소유감으로 만족스러워합니다. 만약 교회를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헌금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모든 시간을 교회활동에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이 비정상적인 열정은 분명히 신앙을 소유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존재
신앙은 철저하게 존재론적인 사건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소금의 짠맛에 대해서 언급하신 게 우연이 아닙니다. 소금의 존재는 짠맛입니다. 소금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짜다는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 짠맛을 잃은 소금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아도 쓸모가 없습니다. 반면에 아주 적은 양이라고 하더라도 짠맛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것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짠맛에 집중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짠맛을 유지한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쉽게 생각합시다. 짠맛을 유지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둔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한걸음씩 나갈 뿐입니다. 그 나라의 생명, 사랑, 기쁨, 자유, 평화에 직면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세계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 것입니다. 흡사 시인들인 꽃과 나비, 나무, 산, 강 등등, 모든 세계에 마음을 열어두듯이 말입니다.
아마 이런 질문을 할 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가만히 짠맛만 유지하고 있으면 게으른 종이 되는 거 아니냐? 비전을 갖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예, 좋습니다. 일할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이 사실 하나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끌어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두 사실의 차이를 혼동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독차지하듯이 많은 일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일을 누가 할지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매달아놓으십시오. 우리가 자고 있을 때도 지구는 생명 운동을 펼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일에 동참하게 될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일이 고생이 아니라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유지하기만 하면 이미 소금으로서 충분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진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그런 영적인 긴장을 유지하기만 하면 이미 제자로서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맛이 없을 때는 버려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들은 들으시오.”(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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