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딤전 1:12-17)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일반적으로 ‘목회서신’이라고 불립니다.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교회 공동체를 끌어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교회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디모데전서만 하더라도 기도, 감독과 집사의 자격,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 등이 나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읽으면 배울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목회서신이라고 해서 단순히 목회 ‘노하우’만을 가르치는 건 아닙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의 신앙적인 실존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신앙고백인 송영이 겸해서 나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목회서신은 세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째는 목회 또는 교회생활, 둘째는 신앙체험, 셋째는 송영입니다. 이것은 곧 목회, 또는 교회생활이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 관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교회생활이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신앙의 근본으로부터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이런 목회서신의 세 가지 구성 요소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거론합니다. 디모데전서를 기록한 이 사람은 이전에 복음을 박해하던 자였지만 이제는 직분을 맡은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는 죄인의 괴수 같은 자기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딤전 1:12-16절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 17절에서 특이한 내용을 곁들였습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압축해 놓은 송영입니다. 딤전 6:15, 16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딤전 6: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장과 6장 양쪽 모두 송영, 또는 영광송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고백이며, 찬송입니다. 이걸 놓치면 교회 생활이 인간적인 열정으로 뒤범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서신들은 이런 송영을 자주 거론합니다. 골 1:15-20, 빌 2:6-11 등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그들은 이 신앙의 내용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삶을 규정합니다.
존귀와 영광
딤전 1:17절 전체를 다시 읽겠습니다. 단어까지 새기면서 들어보십시오. 앞에서 읽은 딤전 6:16절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구절에서 핵심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염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신앙고백을 나누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한 것일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냥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삶의 자리를 놓치면 성경의 내용은 관념이 되고 맙니다. 공자 왈로 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그는 구체적인 유대교라는 자리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활동하셨습니다. 유대교를 전제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건, 예수의 운명은 모두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에 의해서 해석된 것입니다. 부활 사건까지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 39권을 그대로 경전으로 받아들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모든 신앙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배경은 유대교인 반면에 정치적인 배경은 로마입니다. 그리고 문화사상적인 배경은 헬라입니다. 여기서 특히 로마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지방 장관인 빌라도에 의해서 당시 반국가사범이면서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에게만 내리는 십자가 처형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종교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속적인 차원의 정치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정치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선고를 내렸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지금 더 이상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설교가 진행되면서 저절로 해명이 될 겁니다.
디모데전서 기자가 말하는 ‘존귀와 영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존귀는 헬라어 ‘티메’이고, 영광은 ‘독사’입니다. 둘 다 비슷한 뜻입니다. 특히 독사가 중요합니다. 영광이라는 뜻의 독사는 신구약 전체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구약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카봇’이라고 합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의 현현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어 했습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여기서 영광이 카봇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위틈에 숨기시고 모세를 손으로 덮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3) 왜냐하면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며, 궁극의 생명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구약의 가르침과 같은 차원에서 이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노래했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있다면 굳이 이런 노래를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세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영광을 차지한 세력은 로마 황제입니다. 제국으로서의 로마입니다. 이런 상황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송영은 공허한 독백으로 떨어집니다. 그냥 허공에 대고 자기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에 불과합니다. 이런 경우가 사실은 오늘도 비일비재합니다.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기분에 치우쳐서 노래를 부르고 예배를 드립니다. 로마제국의 특징은 ‘팍스 로마나’였습니다. 즉 로마의 평화입니다. 로마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당시 식민지 국가들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모든 종교에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에 조금이라도 항거하는 집단이 있으면 용서가 없었습니다. 카이저에게만 ‘주’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황제는 모든 인민의 생사여탈권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신처럼 행세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여기에 항거했습니다. ‘퀴리오스’, 즉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영광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이런 고백은 혁명적입니다. 당시 시대정신을 거부하는 외침이자 찬송이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바로 이런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송영을 이런 차원에서 듣지 않으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죽은 말, 죽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이런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동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럴 듯하지만 뭔가 불편하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주로 사적인 영역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개인이 복 받아서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 천당 가는 거라고, 조금 더 나가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면 충분하다는 신앙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제적으로 자기 삶 하나 꾸려가기도 힘이 드는 세상입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귀와 영광을 시대정신과 결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벅찬 일이기도 하고, 막막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는 종교적인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운명을 건 사람들입니다. 벅차더라도 우리는 우리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운명을 걸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배워야 하고, 그들의 영성에 동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송영의 내용을 조금 더 따라가면 우리가 왜 이런 말씀을 어색하게 생각하는지, 거기에 밀착되지 못하는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오늘 본문의 송영은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속성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썩지 않으심, 보이지 않음, 유일하심이 그것입니다. 그런 속성을 지닌 분이 바로 ‘영원하신 왕’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속성을 지닌 분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실제로는 이런 속성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한합니다. 죽어서 곧 썩습니다. 눈에 보입니다. 온 세상의 많은 왕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상대적인 존재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려고 애를 썼습니다. 황제를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많은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결국 로마제국은 식민지 인민들에게 황제를 숭배하게 했습니다. 황제숭배는 특별히 이상한 사건이 아닙니다. 당시의 시대정신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허전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정치인들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황제 숭배가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 겁니다. 돈과 자본이 황제입니다. 우리의 의식구조가 자본으로 완전히 세뇌되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도 오직 돈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로 이런 현상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1973년에 출판되고 전 세계적으로 6백만부가 팔렸다고 하는 <모모>의 저자 미카엘 엔데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994년 2월6일 일본 NHK 한 피디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확실히 돈에는 신이 지닌 특질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돈은 사람을 결합시키기도 하지만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돈은 돌을 빵으로 변화시킬 수도, 빵을 돌로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돈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돈의 증식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게다가 돈에는 불멸이라는 성질까지 있습니다.”(녹평 114호, 41쪽) 엔데는 로마가 황제숭배로 망했듯이 현대문명도 돈 숭배로 망할 거라고 예측합니다. 성서가 지적하고 있듯이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파멸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오? 이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처럼 경제발전을 국가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면 결국 지구의 자원은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후손들의 가난을, 더 나가서 생존의 위기를 담보로 우리가 풍요롭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걱정은 사회학자나 생태학자,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나님만 잘 섬기면 된다고 소박하게,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 잘 되겠지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상과 참 하나님의 차이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것인데, 정확하게 전달이 안 된 분들을 위해서 보충해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썩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썩는 것을 좋아합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썩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게 말이 되나요? 둘째,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는 것을 섬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보이는 교회에만 매달리지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보이는 이 세계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보이는 것에 은폐되어 있는 근원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숙명적으로 황제숭배에, 즉 우상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신을 섬기고 싶어 합니다.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모두 표면적으로는 유일신론자들이 하더라도 실제로는 다신론자들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작용하는 힘들이 몇 개가 되는지 세어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질문의 대답은 설교자가 아니라 성령이 주십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이 너무나 고유하기 때문에 인간인 목사가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주는 대답에 영적인 귀가 열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를 여는 작업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 문서인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의 신앙적인 진정성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이 세상이 온갖 것에 우리의 영혼을 팔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 주일, 9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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