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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존재는 선물인가, 과제인가 (합 1:12-17, 2:1-4, 3:16-19)

2026년 3월 2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yXVu6I8-50M?si=4DK1x7r3m1Qx579x

▣ 들어가는 말

- 언제 우리는 존재를 인식하는가?

인간은 언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까요. 우리는 분주한 일상에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매일매일 우리 앞에 주어진 일과 맡겨진 역할을 하며 살아가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 삶이 우리를 멈춰 세울 때가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 불안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멈춰 서서 묻게 되지요. “나는 왜 사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통스러운 질문을 통해 존재는 깨어납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 합니다. 그는 인간을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즉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중에, 주인공 그래버는 운이 좋게도 2년 만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옵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추억이 가득한 기억 속 고향 풍경이 아니라 무너진 돌 더미와 검게 그을린 벽들뿐입니다. 거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 자리에 있지만 추억과 삶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깨진 창문들, 부서지고 열려 젖혀진 문들, 허물어져 내린 벽들…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온기들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지요. 전쟁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래버의 내면에서도 신뢰가 무너지고 의미가 사라지고 인간으로서의 확신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폐허가 된 도시는 폐허가 된 자기 영혼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그 무너진 도시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우리는 빛을 받았고, 빛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빛을 죽였고, 우리는 다시 동굴 속에 살게 된 거예요.” 인간이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게 되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무너진 벽들 사이를 걸으며 그래버는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묻기 시작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성서는 말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향해 부름을 받은 존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존재를 받았습니다. 존재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과제이기도 하지요. 삶 자체, 존재 자체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바로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박국(껴안다, 포옹하다)입니다. 그는 시대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신앙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 절망의 땅에서

- 신학적 전환

성서에 등장하는 대부분 선지자(아모스, 호세아, 미가)는 먼저, 백성의 죄를 고발하고, 이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백성에게 선포하기보다 하나님께 항의하고 논쟁합니다. 하박국의 메시지는 설교가 아니라 대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요. 다시 말해 백성에게 말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질문하는 선지자입니다. 이 점은 구약에서 매우 드문 유형이지요.

대부분 선지자는 “왜 이리도 백성들이 타락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왜 하나님은 악을 그대로 두는가?”를 묻지요. 이것은 신학적으로 굉장한 전환입니다. 역사의 문제를 인간 윤리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정론’ 즉, 신의 통치 방식(다스림, 섭리)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하박국은 욥과 매우 유사합니다. 하박국의 메시지는 “심판 예언” 중심이 아니라 “신앙의 내적 변화 과정”을 보여 주는 매우 독특한 구조입니다.

이것이 왜 신학적으로 굉장한 전환인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박국에게서 신앙은 ‘선은 복을 받고 악은 심판받는다’라는 계산할 수 있는 세계관에서 신뢰의 세계관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유치한 신관에서 인격적 신관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자동적인 인과관계의 신’의 모습에서 ‘역사 속에서 자유롭게 일하시는 인격신’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전보다 신앙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되었지만, 삶에 대한 책임과 근거를 외적인 보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이동시킨 것입니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성(대화성) 속에서 자신의 신앙, 삶은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 되는 것이지요. 진정한 주체 신앙이 탄생했다고 할까요. 이러한 신학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 존재를 위협하는 역사

학자들은 대체로 하박국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7세기 말, 곧 유다 왕국 말기로 봅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갈대아인,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 1:6) 즉, 바빌로니아 제국의 급부상을 근거로, 하박국은 기원전 7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당시는 오랫동안 강대국이던 아시리아 제국이 쇠퇴하고 그 틈을 타 바빌로니아 제국이 급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즉, 고대 세계가 전쟁과 정복으로 크게 흔들리던 시기이지요. 이 시기의 유다는 외세의 위협뿐만 아니라, 하박국 1장의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같은 표현을 보면, 내부적으로도 사회 질서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유다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사회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강포”와 “분쟁”이 가득하고 “정의가 굽게 행해집니다.” 주변 강대국은 호시탐탐 조국을 노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입니까?”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절망의 땅에서 하박국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 저항하는 인간

- 질문하는 인간

하이데거나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은 일반적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을 따라 산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das Man의 삶” 즉, 그저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사는 삶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인간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환경, 조건, 욕망, 사회 흐름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존재를 잊어버린, 잃어버린 삶이지요.

“아무리 외쳐도 왜 주님은 구원하지 아니하십니까?”(1:2)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십니까?”(1:13)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습니까?”(1:17) 하박국은 환경을 따라,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함께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왜 악이 존재하는가? 왜 하나님은 침묵하는가? 정의는 어디 있는가? 이 질문은 그저 경건한 종교적 질문이라기보다 존재를 자각한 인간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서는 ‘존재의 깨어남’의 차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대의 불의와 부조리를 보며 하박국은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가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질문할 수 있다는 것, 고통을 느낀다는 것, 정의를 갈망한다는 것은 그저 생존하는 것을 넘어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의미를 요구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인간 존재는 그저 주어진 상태에 머물 수 없습니다. 존재는 질문을 통해 깨어납니다.

 

- 기다리고 바라보며(과제로서의 존재)

하박국은 말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이 장면은 단순한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 존재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기다리고 바라보며”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존재에 관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즉각적인 해결책을 주지도 않습니다. 대신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 2:3) 말씀합니다. 이 말은 그저 시간을 견디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존재를 인식하고, 그 존재에 온전히 머물고, 무르익고 성숙해 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보통 결과(외부적 조건)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합니다. 일이 잘되면 존재가 안정된 것 같고 상황이 무너지면 존재도 함께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성취, 즉각적인 변화, 확실한 보증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존재가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하박국은 도망가지도 않고 해답을 만들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기다리고 바라보며” 기다림은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존재를 지키기 위한 능동적 결단입니다. 파수대에 선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향해 방향을 고정하는 행위입니다. 존재 물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인간은 선물로 주어진 삶(존재)을 과제(책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다림은 존재를 선물에서 과제로 바꾸는 시간입니다. 신앙적 언어로 표현하면, 사명을 발견하는 시간이지요. 기다림은 시간이 아니라 존재를 형성하는 영적 공간입니다. 질문을 통해 자각한 존재가 무르익어가는 시간입니다.

 

- 신뢰라는 존재 방식

하박국의 마지막 노래는 이 설교의 중심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 고백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끝까지 응시한 사람만이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박국은 이제 기다림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을 노래합니다. 그는 더 이상 환경이나 외부적 조건으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소출이 없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그는 상황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신뢰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입니다. 신뢰한다는 것은 미래를 낙관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선택입니다. 이 선택이 가능해진 이유는 그가 이미 파수대에서 기다림과 바라봄의 시간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존재를 흔드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를 각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의 찬양은 기적의 결과가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형성된 존재의 열매입니다. 존재는 처음에는 선물로 주어지지만 기다림을 통과하며 과제가 되고 마침내 신뢰(믿음) 속에서 완성되고 자유를 얻습니다.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힘을 추구하는 삶

하박국은 두 종류의 삶을 대비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합 1:11) 바빌론은 힘, 정복, 약탈, 축적을 통해 살아가는 제국입니다. 즉, 외부 조건과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삶이지요. 존재 이유가 권력, 경제, 환경, 성공 같은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외부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삶입니다. “환경을 따라 사는 삶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삶인가?”

이 질문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본래 환경 속에 던져져 있고 조건에 영향을 받으며 생존을 위해 적응합니다. 이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삶의 궁극적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입니다. 하박국이 비판하는 삶은 환경 속에서 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힘이 곧 진리라고 믿는 삶, 상황이 의미(존재)를 결정한다고 믿는 삶, 역사적 성공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존재를 “단순한 기능”으로 축소 시킵니다.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가 단지 조건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를 자각한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나는 왜 사는가?”를 묻는 것이지요.

 

- 믿음으로 사는 삶

반대로 의인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즉 삶의 근거가 힘도 아니고 역사적 상황도 아니고 환경도 아닙니다. 삶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의인의 삶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관계적 의미에 의해 유지됩니다.

하박국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교리에 대한 동의나 감정의 상태, 종교적 열심 따위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는 신실함, 관계적 충성, 방향성 있는 삶의 태도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지속적인 신뢰, 흔들리지 않는 관계적 충성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조건 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깊은 관계성, 대화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외부적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존재 방식이 변화합니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움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는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 나가는 말

- 존재는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존재는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그분의 놀라운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체로 우리는 그 존재를 잊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존재는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존재 물음을 묻게 되지요.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라는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는 그 물음을 외면할 수 없지요. 이것이 바로 존재가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의미를 추구할 때 비로소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에서 실존적 존재로 나아가게 되지요.

 

- 기다리고 바라보며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기다리고 바라보며’ 끝까지 밀고 나갈 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발견하게 됩니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것도, 또 동시에 존재가 책임이라는 것도 말이지요. 성경은 인간 삶의 의미는 자율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어진다고 봅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입니다. 의미는 상황(외부적 조건)에서 오지 않습니다.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박국은 말합니다. 존재의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입니다. 이 점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말은 상황이 아니라 의미를 따라 존재하는 삶을 선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박국이 마지막에 이르는 고백은 현실이 좋아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관계의 중심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의인은 어떤 조건 속에서도 자기의 존재 근거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존재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존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존재를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으면,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존재를 살아내지 못합니다. 신앙은 삶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어떤 존재로 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영적 선택입니다. 신앙은 삶의 조건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존재 방식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존재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삶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존재를 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질문하지 않는 존재는 잠든 존재입니다. 기다리지 않는 존재는 깊어질 수 없습니다. 신뢰하지 않는 존재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평안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이 변했기 때문에 평안해졌습니다. 그 평안과 자유가 우리에게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질문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질문함으로 깨어있게 하소서.

기다림과 믿음으로 성숙해 가게 하소서.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의 길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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