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9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m15Ohm5AuYk?si=gtJt7rjBWVPittVk
▣ 들어가는 말
- 종려주일 : 환호의 거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4세기 무렵, 기독교가 공적으로 인정된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실제 예수의 입성 경로를 따라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렬하며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을 몸으로 기억하는 행위”였지요. 이 전례가 점차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로 확산하여 전 세계 교회가 함께 지키는 ‘종려주일’절기가 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과 유대 문화에서 종려나무는 생명, 승리, 번영, 왕권, 축제를 상징합니다. 사막 지역에서 종려나무는 오아시스와 생존의 상징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복”의 이미지와 연결되지요. 특히, 중요한 배경은 마카비 혁명(기원전 2세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대제국은 4개로 나누어지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차지하지요. 그런데 그 제국의 왕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의 율법(할례, 안식일)을 금지하고, 성전에서 이방 신에게 제사를 강요하고, 제단에 돼지 제물을 바치도록 합니다.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나는데, 그 중심이 ‘마카비’입니다. 기원전 164년 마카비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깨끗하게 합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압제에서 유대인들이 독립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해방을 축하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종려나무는 하나님이 주시는 유대민족의 해방과 승리라는 의미가 굳어지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종려 가지를 흔든 것은, 단순한 존경이 아니라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해방할 왕이다”라는 정치적 기대와 열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 권력의 입장에서는 매우 우려할 만한 정치적 메시지가 되었을 테지요. 아울러 군중이 외쳤던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쉬아 나”에서 온 표현인데, 직역하면, “지금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즉 군중은 예수를 영적 구원자가 아니라 현실을 바꿀 지도자로 기대한 것이지요. “지금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절박한 정치적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장면은 종교적 환영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지요. 군중은 예수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해방된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신앙의 환호는 종종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기대인지도 모르지요.
- 군중 속에 계신 예수
수많은 군중이 열광하던 그 날,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그 장면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는지요? 아마도 우리는 밝은 햇살, 흔들리는 수많은 종려나무 가지, 그리고 기쁨과 기대에 찬 열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 장면은 어딘가 장엄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전혀 다르게 그린 사람이 있습니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브뤼셀 입성』(1889)입니다. 작품의 제목도 예루살렘 입성이 아니라 브뤼셀 입성입니다. 아마도 ‘예수가 오늘 이 시대에 온다면 어디로 올까?’ 생각하며, 예루살렘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현대 도시 브뤼셀을 선택합니다. 예수의 입성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 세계에서 반복되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테지요. 이 그림을 처음 보면 약간 당황하게 됩니다. 예수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얼굴입니다. 웃고 있는 얼굴, 소리치는 얼굴, 가면을 쓴 얼굴,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 마치 축제 같기도 하고, 시위 같기도 하고, 시장통 같기도 합니다. 이 그림에서 중심은 예수가 아니라 군중입니다. 앙소르는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람들은 예수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의 열광에 취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종종 신앙의 열정, 뜨거움을 신앙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 하며 한 편으론 부러워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복음서는 아주 불편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며칠 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환호는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 기대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앙소르의 그림은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나는 정말 예수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군중 속에서 나 자신을 보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과 십자가의 고난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단지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더 쉽게 확신합니다. 그리고 더 쉽게 잔인해집니다. 이것이 군중이라는 존재입니다. 환호하던 군중은 조롱하는 군중으로 바뀝니다. 이 장면은 배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군중이라는 존재
- 우리는 왜 함께 있을 때 더 쉽게 잔인해지는가?
군중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모인 상태가 아닙니다. 군중은 하나의 심리적 환경입니다.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망설이고, 의심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중 속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감정이 먼저 움직입니다. 군중은 개인보다 더 쉽게 열광합니다. 군중은 개인보다 더 쉽게 확신합니다. 그리고 군중은 개인보다 더 쉽게 변합니다. 왜냐하면 군중 속에서는 책임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누가 외치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먼저 돌을 던졌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분위기 속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 점을 통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중은 비진리이다.” 그의 말은 ‘군중은 항상 틀리다’라는 것이 아니라 군중 속에서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그 결단의 자리에서 쉽게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군중 속에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을 수 있고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은 때로는 가장 따뜻한 연대의 얼굴을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얼굴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이 장면이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전까지 “나는 시저를 사랑했지만, 로마를 더 사랑했다”라는 브루투스를 찬양하던 군중은 교묘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안토니우스의 연설을 듣는 순간 돌변하여 분노로 바뀝니다. 군중은 진리를 따라 움직이기보다 그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를 따라 움직입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악은 특별한 괴물에게서 나오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자라난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서는 이 인간의 구조를 놀랍도록 정직하게 보여 줍니다. 며칠 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십자가 아래에서 말합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 변화는 단순한 배반이라기보다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기대를 채워 주는 메시아를 환영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길을 허락하는 하나님 앞에서는 쉽게 침묵하거나 돌아섭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보다 확실한 기적과 분명한 권위를 주는 존재를 더 쉽게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환호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드러납니다. 종려주일은 군중이 보여 주는 신앙의 얼굴입니다. 고난주일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신앙의 얼굴입니다. 군중의 신앙은 기대가 무너지면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신앙은 사랑 때문에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배신과 변심이 드러난 자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마음과 사랑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두 얼굴 사이에 서 있습니다.
▣ 고통을 바라보는 인간의 거리
- 우리는 왜 비극 앞에서도 일상을 계속하는가?
W. H. 오든은 20세기 영미권 시를 대표하는 지성적 시인입니다. 1938년 겨울, 대공항과 임박한 전쟁의 기운으로 유럽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브뤼셀의 미술관에 들어가 옛 거장들의 그림을 보다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지만, 세상은 그 비극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특히 오래 머문 것은 브뤼헐의 『이카로스 추락』인데요. 그림을 보시면,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밭 가는 농부가 전면에 있고, 바다는 제 갈 길을 가고, 배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정작 추락하는 이카로스는 화면 구석에서 다리만 거의 보일 뿐입니다. 오든은 바로 이 구도에서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엄청난 재난조차도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 비극은 늘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든의 깨달음은 단순히 “사람들이 너무 차갑다”라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었습니다. 더 깊습니다. 그는 인간 세계의 구조를 본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지만, 그 고통 때문에 모두가 동시에 멈추어 설 수는 없습니다. 삶은 계속되고, 일상은 이어지고, 배는 항로를 바꾸지 않습니다. 오든은 그 냉정한 사실을 잔인하리만큼 정확하게 포착해낸 것이지요. 인간 존재의 구조를 드러내는 통찰입니다. 우리는 모든 고통을 다 끌어안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타인의 비극과 자신의 삶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살아갑니다. 이 거리는 무관심이 아니라 어쩌면 생존의 조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거리가 너무 멀어질 때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더 이상 나의 현실과 연결되지 않을 때 인간은 점점 더 쉽게 잔인해집니다.
십자가 사건은 바로 그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예수는 죽어 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지나가며 욕합니다. 어떤 이는 구경합니다. 어떤 이는 흥미로운 사건처럼 바라봅니다. 어떤 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집으로 돌아갑니다. 도시는 여전히 분주합니다. 시장도 열리고 삶도 계속됩니다. 세상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통 속에 남아 계십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고통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앙은 십자가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에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고통과 거리를 두지만,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 고통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 하나님은 왜 고통 속으로 가까이 오시는가?
- 우리를 향해 오시는 하나님
종려주일의 예수는 군중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입니다. 환호와 기대와 소란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오시는 하나님입니다. 고난주일의 예수는 인간의 버림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침묵과 조롱과 외면 속에서 끝까지 남아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둡니다. 그 거리는 때로는 두려움 때문이고 때로는 살아가기 위한 방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는 눈을 돌리거나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서는 고통이 점점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병든 사람은 격리되고 슬픔은 개인의 문제로 남겨지고 죽음은 일상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리를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놀라운 선언은 하나님이 고통을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구원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위에서 인간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이 있는 자리로, 우리의 눈물이 떨어지는 자리로, 우리의 삶이 무너지는 자리로 몸소 걸어 들어오십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있는 왕을 원합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도자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십니다. 권력 대신 연약함으로, 영광 대신 상처로, 승리 대신 십자가로 오십니다. 십자가는 단지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사건입니다. 모두가, 우리가 외면하는 자리, 우리가 지나쳐 버리는 자리, 우리가 견디지 못해 눈을 돌리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신앙은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고통에서 얼마나 멀리 서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그 자리로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가?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고통과 거리를 두지만,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 고통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오신 사건입니다. 죄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구원이란 다시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존재가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신앙은 결국 “어떤 거리에 서 있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 나가는 말
- 우리는 어느 거리에 서 있을 것인가?
우리는 모두 고통을 피하며 살아갑니다. 고통을 오래 바라보면 마음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다시 일하고, 다시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또한 인간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한 가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설명으로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이 가장 멀리 물러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얼마나 크게 환호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군중의 환호와 십자가의 침묵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묻게 됩니다. 나는 어느 거리에 서 있는가. 나는 누구의 고통을 지나쳐 왔는가. 나는 하나님이 계신 그 자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종려주일의 환호는 지나가지만, 십자가의 사랑은 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가장 아픈 자리로 조용히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고통을 쉽게 판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눈물을 그저 이야기로 소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말 한마디, 전화 한 통, 손 한 번 잡아 주는 일. 그 작은 가까움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배우게 됩니다. 신앙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행동이기 전에 고통 앞에 멈춰 서는 용기일지도 모릅니다. 그 작은 가까움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
모두가 외면하고 도망치고 피하는 그곳으로 오시는 주님.
우리의 추한 영혼과 삶 속으로 와주소서.
우리의 신앙이 ‘환호’ 속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십자가로 한 걸음 다가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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