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 생명 완성
마태복음 16:21-28, 성령강림절후 11째 주일, 2011년 8월28일
“예수는 누군가?”라는 질문은 복음서의 중심 주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서 신앙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훌륭한 윤리선생이나 사회운동가였다면, 또는 복을 불러오고 화를 내쫓는 심령술사였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런 수준에 떨어지겠지요. 이 질문을 가장 분명하게 다루고 있는 본문은 마태복음 16:13-20절(막 8:27-30, 눅 9:18-21)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대답이 당시에 예수님을 비교적 우호적으로 본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유대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베드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변입니다. 선지자라는 대답과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선지자는 대사이고, 그리스도는 대통령입니다. 선지자는 중매쟁이라면 그리스도는 신랑이나 신부입니다. 선지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는 복음 자체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신앙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믿지만 예수님 당시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고전 1:23절에서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인류를 구원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는 마치 조난당한 사람을 구출하러 온 사람이 사고로 죽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죽은 자를 구원자로 인정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도 교회 밖의 사람들 중에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도 상당한 경우에는 예수님을 오해하거나 십자가 사건을 오해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의 항변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상황을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6:21-28절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제 이런 정체성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결국 죽은 뒤에 제삼일 만에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셨습니다.
본문 22절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의외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그런 길을 가야만 했다면 제자를 대표하는 베드로는 힘을 내시라고 하든지 자신들이 도울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말하는 게 당연합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부활까지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겁니다. 이 대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우선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부활이라는 말을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또는 당시에 부활은 별로 실질적인 개념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부활을 고난과 한 묶음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이런 대목을 놓고 본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실질적인 의미를 몰랐다는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즉시 아주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바로 직전에 최고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이제는 혹독한 책망을 받은 겁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24-26절에서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의 일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25절) 가능한대로 고난당하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쌓는 길입니다. 그것이 곧 ‘온 천하’를(26절) 얻는 길입니다. 그것은 아주 합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돈이 있어야 교육도 잘 받고 의료혜택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돈만 많다면 무상급식만이 아니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까지 아무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생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쏟습니다. 예수님은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 정리하면, 제 목숨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결국 목숨을 잃게 하고, 하나님의 일만이 목숨을 찾게 합니다. 이런 설명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이해가 가나요? 아니 동의할 수 있나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이 생명이 오늘 본문에는 ‘목숨’으로 표현됩니다. 생명을 가리키는 헬라어는 두 가지입니다. 조에와 프쉬케가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 14:6절에 나오는 조에는 일반적인 생명이라고 한다면 위 본문에 나오는 프쉬케는 내적인 생명을 가리킵니다. 헬라어가 이렇게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생명의 실체를 아직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큰 틀에서는 조에나 프쉬케나 그냥 똑같이 생명이라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프쉬케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에 따르면 온 천하를 얻는 것과 생명을 얻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모든 기업체의 주식을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5분만 숨을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 일에만 마음을 두는 것이 곧 25절이 말하는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23절이 말하는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비교적 분명한데 반해서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의 일은 생명을 잃게 된다면 하나님의 일은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냥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잃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를 말할까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런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순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24절이 말하듯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제 목숨을 구원하려는 수고와 반대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각자 다릅니다.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자기 절대화, 즉 자기 숭배로부터의 해방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을 얻습니다.
인자와 영광
이 생명도 어떤 분들에게는 막연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오히려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생명은 그것과 다른 것입니다. 이 생명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무상합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같이 죽고 썩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흔적은 되지만 궁극적인 생명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생명은 종말로부터 옵니다. 이 사실은 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올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궁극적인 생명의 능력입니다. 천사들은 그 능력을 실행하는 메신저를 가리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는다는 말은 사람의 일만 생각했는지, 또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는지에 따라서 생명을 허락하기도 하고 거절당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온 천하를 손에 넣은 것처럼 떵떵거리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 종말론적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참여하게 된다면 실제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종말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 완전히 치우쳐서 살아갑니다. 그 종말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오해가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지난날 신자들을 피안적인 신앙으로 몰아가서 역사 앞에서 무책임하게 살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역사 허무주의에 빠진 겁니다. 생명을 종말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것과 다릅니다. 생명의 근원이 종말로부터 주어진다는 인식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원인들이 미래를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능력이 오히려 과거를 끌어간다는 영적 통찰입니다. 바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바로 이 종말론적인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사실과 온전히 하나가 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이 바로 종말론적 생명의 주체가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인자이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말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분이라는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생명이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본문 28절이 이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죽기 전에 종말이 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그는 묵시적 열광주의자에 불과했을 겁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참된 생명이 신비의 방식으로 오늘 우리 삶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역에 없으시겠지요.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지만 곧 죽음의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개인적으로 종말입니다. 지금의 우리와 죽을 때의 우리는 신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의 선을 물리적으로 따라갈 수는 없지만 실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죽는 순간을 생각하기 어렵다면 지금과 10년 전의 여러분을 생각해보세요. 오늘의 여러분이 10년 전의 여러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의 실존이 10년 전의 실존에 신비한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완성하실 종말의 빛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역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생명 완성의 역사적 선취사건입니다. 하나님 홀로 주인이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온 천하를 얻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아니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생명이 완성될 종말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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