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성탄절 후 첫째 주일, 2017년 12월31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갈 4:4절에는 특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특별한 표현을 첨가했습니다. 첫째는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여자에게서’라고 하지 않고 ‘동정녀에게서’라고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당시에는 동정녀 이야기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바울이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지 ‘여자에게서’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공동번역은 예수님이 율법의 지배를 받았다고 번역했습니다. 율법은 인간 개인과 공동체가 지켜야할 모든 규범과 법칙들을 가리킵니다. 법과 도덕과 윤리 등이 포함됩니다. 학교와 국회와 법원과 은행 등등이 다 율법에 속합니다. 인간 정신문명이 이런 율법을 만들어냈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율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말과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말은 이런 점에서 똑같은 의미입니다.
율법의 저주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즉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는 구원자라고 한다면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말 한 마디로 사람들을 구원하면 되지 굳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서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살 필요가 무엇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바울의 대답이 5절에 나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대답은 아주 명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속량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속량한다는 말은 구해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미 갈 3:10절에서 율법을 저주라고 표현했습니다. 저주라는 표현은 바울이 인용한 신 27:26절에 근거한 것으로서 신명기에 자주 나옵니다. 저주 받는다는 말은 일단 기분 나쁘게 들립니다. 이런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어울리지 저주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저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절대적인 사랑과 삶의 능력을 모르면 그 사람은 저주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왜 저주일까요?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율법을 체계화했습니다. 출발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만든 데서 출발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문적으로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부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겉만 깨끗해 보일 뿐 속은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는 뜻입니다. 양쪽의 의견에 다 일리가 있습니다. 율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가정과 민족을 지켜내려면 율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율법에 근거해서 경건한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 해야 하고,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모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필요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당시 율법 전문가들이 율법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단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저주라는 바울의 표현은 율법의 한계를 가리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게 그 한계입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1) 여기 교회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예배, 헌금, 기도, 봉사생활이 뛰어납니다. 모든 교인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장로가 되었습니다. 또는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게 최선입니다. 저는 가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전업으로 교회 일과 신학을 하는 사람이니 신앙적으로 살아가기 좋겠지만 일반 신자들은 세속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살기가 힘들다고 말입니다.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목사 역시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교회를 아무리 크게 성장시켜도 그것으로 목사의 영혼이 안식을 얻지는 못합니다. 영혼의 안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2) 여기 세상에서 큰 업적을 이루고 출세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돈도 많이 벌고, 학문적인 업적도 뛰어나고, 건강하고, 자식들도 다 잘 되고,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런 인생은 없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삶의 조건으로 그가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편히 먹고 살 만큼 돈을 벌었는데도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사람은 원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충분하게 벌어놓은 돈으로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거기에 매달리는 겁니다. 교회를 크게 키운 목사나 기업을 크게 키운 기업가 모두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 것에 매달리면서 사는 것이 곧 저주입니다.
이런 설명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율법적인 삶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이런 삶에서 한꺼번에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바울도 사람들의 이런 현실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강한 톤으로 율법적인 삶을 저주받은 거라고 말한 이유는 제가 보기에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거기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삶의 근본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런 충격을 받지 않으면 율법적인 삶의 수렁 안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여러분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바울은 갈 4: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세상의 초등학문은 헬라 철학의 한 파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점성술에 맡기거나 헬라 지혜에 맡기거나 유대의 율법에 맡기는 것을 바울은 세상의 초등학문에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종노릇은 자유를 잃는 것입니다. 21세기 온갖 화려한 것들에 우리는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이 스마트 폰에 종노릇하고 있듯이 수많은 정보와 주장들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아들의 영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바울은 아들의 명분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되었다는 겁니다. 영화 <벤허>에 나오는 주인공이 친구의 모함으로 전함의 노를 짓은 노예가 되었지만 전함 사령관을 구출함으로써 그의 양자가 됩니다. 사령관의 특별한 조치로 인해서 노예 신분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게 되었고, 사령관의 유산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지위를 얻었습니다. 종과 아들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종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유를 얻지 못하는 반면에 아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겉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자신이 아들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바울은 6절에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시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아들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없습니다. 아들의 영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아들의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영은 보이지 않기에 우리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한 힘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예를 들어 설명하겠으니 비교해서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마음 깊이 존경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고 합시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은사라 해도 좋고, 같은 동네 이웃사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친구도 좋고, 제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귀한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어도 빛이 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시한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니면 그의 자녀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큰 불행을 당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의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의 영혼에 평화가 가득하다는 게 전달됩니다. 그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여러분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을 겁니다. 그가 경험한 평화가 여러분의 영혼에 불길처럼 솟아날 것입니다. 평화의 영이 여러분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화를 전달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그들에게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적으로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마지막 절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피하고 ‘자녀’로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도 자녀로 번역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아들보다는 자녀가 성경의 근본 가르침에 더 어울리는 단어로 보입니다. 우리는 일단 개역개정을 따라서 그냥 아들이라고 표현할 텐데, 여러분은 자녀라는 뜻으로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종으로부터 아들로 존재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와 전적인 신뢰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의 특징은 두려움이지만 아들의 특징은 자유와 평화와 만족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일한 것만큼 대우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아예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상속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아들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바울이 갈 4:9,11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런 모습을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오해는 마십시오. 종노릇하지 말라는 바울의 강력한 권고가 세상일에 손을 떼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만 종노릇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종이나 아들이나 삶의 과정이 똑같습니다. 힘든 일이나 치사한 일도 참아내야 합니다. 아들이라고 해서 좋은 자리에 앉아 유유자적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차이는 종노릇에 달려 있습니다. 아들은 똑같이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결코 종노릇하지는 않습니다. 종노릇이 아니라 자유인 노릇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율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종노릇하는 사람이 있고, 율법을 지키되 자유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자유인 노릇을 한다는 게 구체적인 무엇인지를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불만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영혼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병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묶이지 않습니다. 저는 앞으로 남아있는 저의 삶을 ‘불만제로’가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불만스러워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끼던 것들을 잃으면 크게 속상하겠지만 또 다른 아낄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좋은 사람들과 헤어지게 된다 해도 그것으로 불만스러워하지 않을 겁니다. 테니스장에 다니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그보다 더 큰 일을 당한다고 해도 불만은 없었으면 합니다. 물론 끔찍한 재앙과 재난을 당하면 당분간 못견뎌하겠지만 다시 정신을 차릴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제 운명이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들 그것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며 완성하실 하나님이 나의 ‘아빠 아버지’이시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견디기 힘든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할 뿐이지 불만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아들의 삶이라고 봅니다.
이런 아들의 삶이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불만제로의 삶을 찾았다고 주장하겠지만 저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저에게 다른 그 어떤 위인이나 가르침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지옥에 있다면 나는 지옥을 택하겠다.’는 루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세상의 재미있는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지만 예수에게 일어난 일만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율법과 초등학문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것에 종노릇해야만 행복한 것처럼 강요하고 유혹합니다. 그렇게 끌려가다보면 그게 인생인가보다, 하고 적응해버립니다. 바울은 이제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의 영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에 그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문턱을 들어서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왕 들어섰다면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 그리고 딸로서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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