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6:25-27)
갈라디아서를 쓴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특이하고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열 두 사도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칭, 타칭 사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이면서, 단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주장을 근거로 사도로 자칭한다는 게 다른 사도들에게 좋아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업적으로 본다면 그는 그 어떤 사도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신약성서로 묶인 27권의 문서들 중에서 바울의 편지가 10편 내외에 이르고, 오늘 역사적 기독교의 모태가 바로 바울을 태두로 하는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거나, 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뛰어난 신학 사상과 신앙적 열정에 놓여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혁명은 사상에서 나오는 것처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도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최고의 석학이라 할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생으로 뛰어난 유대 학문의 업적을 쌓았고,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로마 헬라 사상에도 일가를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신학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물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유대교, 헬라 로마 철학, 부활의 주님 경험이 바울이라는 한 인격체 안에서 융합해서 아주 고유하고 독특한 영적 세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 흔적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토라와 할례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종과 자녀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우리 개역개정역으로는 자녀가 아니라 아들로 나옵니다만, 두 단어는 똑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이 단락의 결론이라 할 7절 말씀을 읽는 게 좋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여기서 ‘유업을 받을 자’는 헬라어 ‘클레로노모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을 받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유업을 받을 자녀들은 집에서 무슨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서 그런 특징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집에 들어와서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게 지나쳐서 나태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자녀들의 마음은 늘 편안합니다. 그들의 특성은 평안과 자유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자녀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요?
바울은 클레로노모스라는 단어를 갈 3:29, 4:1절에서도 사용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유업을 받을 자녀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살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토라와 할례에 연루된 문제였습니다. 원래 갈라디아 신자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복음은 토라와 할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떠난 뒤에 갈라디아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달리 토라와 할례까지 포함하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저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바울이 이렇게 악담을 쏟아낼 정도로 복음을 변질시킨 이들은 완전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울과 똑같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따르면 세 종류가 이에 속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이며, 둘째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며, 셋째는 게바, 즉 베드로 및 바나바 파입니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바울과 가장 격렬하게 대척점에 섰던 사람들인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 핵심이 토라와 할례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초기 기독교의 가장 첨예한 신학적 문제 중의 하나는 토라와 할례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원래 토라와 할례를 지켰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그런 문제와 아무런 충돌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토라와 할례를 지키지 않던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던지 않은지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그런 압박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의 보도에 따르면 유대로부터 온 기독교인들이 안디옥 기독교인들에게 모세의 법과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학적 내분에 싸인 안디옥 교회는 바울 및 바나바 일행을 예루살렘에 보내서 사도들의 입장을 듣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문제가 이런 공식적인 종교회의로 일단락된 게 아닙니다. 그 뒤로도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 사이에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이단 논쟁에 버금갈 정도의 신학적 논쟁과 투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토라와 할례 없는 복음이 또 다시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다시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토라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솔깃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바울의 전한 복음만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해나가기 힘들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와 구원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했고, 자유의 영혼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도 생기고, 파렴치한 일을 행하는 사람도 생기고, 공동체를 꾸리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로워진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이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토라와 할례를 전했고, 그것이 그들에게 매우 강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토라와 할례는 신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끌어주는 규칙들로서 모세의 법, 즉 율법을 말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기준들입니다. 이런 종교적 규칙과 기준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일정한 틀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일종의 울타리이며, 안전망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무언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할례도 그렇습니다. 몸에 난 상처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토라와 할례가 있어야만 교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갈라디아 신자들의 생각은 크게 틀린 게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이런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었습니다.(갈 3:3) 그것은 초등학문에 머무는 것이며, 종노릇하는 것이었습니다.(갈 4:3) 율법에 매달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갈 2:21)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따라야 할 삶의 자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바울입니까, 아니면 바울과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성수주일과 십일조
누가 옳은지를 오늘 우리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옳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에는 상황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보다는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더 큰 힘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이너리티이며 비주류에 속했습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주류 세력으로부터 왕따 비슷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소아시아에서 그를 복음 설교자로 받아주는 공동체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완전히 문이 닫혔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왜 토라와 할례를 거부하는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폭넓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그들의 주장이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되 토라와 할례를 더불어서 준수하자고 했습니다. 그게 구약성서의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고 공동체를 끌어가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속된 말로 누이 놓고 매부 좋은 방법입니다. 바울은 극단적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복음에서 점점 멀어지고,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사람들이 전한 복음, 즉 토라와 할례를 겸해서 준수하는 신앙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신앙을 가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토라와 할례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신앙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적 목표가 이 두 가지로 집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수 집사나 권사, 또는 장로 같은 항존직의 직분을 받으려면 이 항목에 대한 문서에 서약을 해야 합니다. 모든 설교를 끌어가는 내용도 이 두 가지에 집중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아서 당한 시련이나, 거꾸로 힘든 형편에서도 주일을 고집스럽게 지켜서 받은 행운이 당연한 것으로 선포됩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으로 매도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성수주일과 십일조 헌금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약간의 성서와 신학적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 항목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별로 깊은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물론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이 문제 자체에서 대해서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닙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즉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성수주일과 십일조 헌금을 신자의 의무조항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교회가 허물어진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다시 갈라디아 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의 상황도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토라와 할례가 없어서 교회의 질서가 흔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언가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계속해서 선물이나 전화 등으로 관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이제 토라와 할례에 묶여 있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자녀라고 외칩니다. 바울의 이런 외침이 공허한가요?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해서 뭔가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느끼시나요?
자녀의 자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여기서 종은 무책임한 사람이고 자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보면 본문을 오해하는 겁니다. 종이 오히려 더 성실합니다. 그 종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주인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합니다.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의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늘 인정을 받습니다. 아마 사회에서도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겠지요.
종은 아무리 성실하다고 해도 종일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종으로 인정받을 뿐이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녀는 못됩니다. 그 신자가 성실하냐 아니냐 하는 게 아니냐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종에서 자녀로 변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처음부터 자녀였지만 아직 어린 상태이기 때문에 누가 돌봐주어야 할 종처럼 살았지만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종의 모습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전 13:11절에서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다가 어른이 된 다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살아가는 삶의 특징은 자유입니다. 사람이 만든 규칙에만 묶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성령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특징도 역시 자유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외칩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가 된 사람의 자유를,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된 사람의 자유를 말입니다. 그것은 곧 토라와 할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자유만 중요하고 의무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냐, 복음만 중요하고 율법은 무의미하냐고,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자유는 그에 마땅한 책임을 수반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겠지요. 이것은 책임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에 따라오는 것이지 다른 것을 끌어가는 힘이 아닙니다. 헌금을 복과 화로 윽박질러야 헌금을 한다면 그게 무슨 신앙적 행위가 되겠습니까? 성수주일을 의무적으로 강요해야 예배드리러 온다면 그게 무슨 영적인 행위이겠습니까?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영적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할 것이며, 그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신의 책임을 즐겁게 담당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2009년에 바로 이 사실에 더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200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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