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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http://wms.kehc.org/d/dabia/ENCO-009.MP3http://wms.kehc.org/d/dabia/ENCO-009.MP32005. 6.19.        
롬 6:1-11
죄로부터의 해방

죄와 은총
아마 ‘신의 아그네스’라는 연극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있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성당의 주일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주일에 성당에 오지 않고 가족과 함께 야외에 놀러갔다가 마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모였을 때 어린이를 담당하고 있는 수녀는 죽은 아이의 이름을 대면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가 사고를 당해 죽은 이유는 주일에 성당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불행과 죄를 연결시키는 생각은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놓여 있습니다. 성당 이야기를 한 번 더 한다면, 그들은 매 주일 미사를 드리기 전에 신부 앞에서 고백성사를 해야만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 고백성사라는 건 지난 일주일 동안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들의 영성에 죄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대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은 늘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담으로 느끼고 살아갈 것입니다. 죄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한 탓인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에 나가자는 말을 들을 때 “내가 죄가 많아서 ··· ”라고 토를 답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과 죄는 무슨 관계일까요? 또한 죄라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문제에서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서를 그렇게 많이 읽고 가깝게 지내면서도 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별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암에 걸린 사람이 민간요법만 의지할 뿐 권위 있는 의사의 진단과 치료를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오늘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다음과 같은 5장20절 말씀과 연관됩니다.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이 구절은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크게 잘못한 사람과 조금 잘못한 사람이 모두 용서를 받았다면 당연히 크게 잘못한 사람이 훨씬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별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범생들보다는 세리나 깡패들처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좋아할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옳다면 은총을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합니다. 지금 바울은 이런 논리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논리가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와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죄와 은총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설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이 구도가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지 죄의 심층과 은총의 심층은 간과되고 맙니다. 흡사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학생들이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반성문 한 장 쓰고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는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처럼 아무리 사고를 쳐도 아버지가 모두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죄와 용서, 죄와 은총이 기계적으로 작동하게 되면 결국 죄 문제는 두 가지 관점으로 왜곡됩니다. 하나는 숙명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낙관론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죄의 숙명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늘 자신을 죄인으로 자책합니다. 자신의 실존을 죄로 본다는 게 매우 기독교적인 태도인 것 같지만 이런 태도로는 결국 죄로부터 해방된 삶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기독교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숙명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죄 낙관론의 이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반성문을 자주 쓴 학생처럼 모든 죄 문제가 당연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숙명주의에 사로잡힌 사람과 마찬가지로 결국 죄로부터 해방된 삶을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숙명주의와 낙관론이 우리의 삶에 불안하게 결탁하게 되면 기독교인은 탈(脫)역사적이고, 고립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율법적이면서 동시에 무(無)율법적인 상태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죄와 죽음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해서 “죄를 짓자”는 논리에 대해서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어서 세례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우리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고 한다면 이제 예수와 함께 죽은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작용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죄에서 해방된다는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의미입니다. 아무리 욕망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으면 더 이상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독한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죽으면 더 이상 악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으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죄는 인간이 살아있을 때만 작동되는 매우 한정적인 힘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거꾸로 인간이 죽기 전에는 결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다스리는 공부를 하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조금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또는 법을 통해서 사회질서를 잡아나갈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벌 받을 게 두려워서 죄를 멀리하거나, 또는 칭찬을 받으려고 착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도 사람들을 악에서 멀리하게 만들고 선을 추구하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조금 착하게 살아갈 뿐이지 근본적으로 죄로부터 해방 받지는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죽어야 죄에서 해방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옳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실존이 놓여 있습니다. 이 실존은 모순이면서 긴장입니다. 한편으로는 죄가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죄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 모순과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기독교인의 실존을 죄와 선의 이중인격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롬 7:22-25).
기독교인의 삶은 늘 이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런 긴장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극단으로 흘러가버립니다. 이미 자기가 완전히 구원받은 것처럼, 흡사 천사 같은 존재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종교적인 마사여구만 사용하고, 행동도 매우 종교적인 척 합니다. 늘 입에 할렐루야와 아멘을 달고 살면서 이 세상의 인간적 삶의 모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조건 세속적인 가치에만 치우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세상과 투쟁하는 방식으로만 살아갑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의 삶을 ‘피안적’이라고 한다면, 후자에 속한 사람의 삶은 ‘차안적’입니다. 이 두 세계가 기독교의 실존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훼손되고 맙니다.

죽음과 삶
이 긴장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죽음과 삶의 변증법입니다. 기독교인은 한편으로는 계속 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삽니다. 죽음과 삶이 우리에게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죽어야만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죽음이 목표가 아니라 결국 생명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현실로만 본다면 우리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죽으면 그만이지 죽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다는 말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는 죽지 않은 사람이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었다는 말은 말이 안 됩니다. 인간은 결코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합니다. 아니 그에게서 그것은 이미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10,11절).
과연 죽음과 삶이 우리에게서 일치되는 게 가능할까요? 바울이 충고하는 대로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며, 하나님을 향해서는 부활한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이 말을 단지 교회에 잘 나오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고상한 수준의 삶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죽음과 삶의 긴장과 역동성 안으로 들어가기를 요구합니다. 어떤 ‘상태’가 아니라 어떤 ‘태도’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까요?
기독교인의 삶은 우선 매일 죽음의 반복입니다. 단지 습관적으로 죽는 연습을 한다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죽음에 직면한다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매일 죽는다.”(고전 15:31)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인의 죽음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단지 인간 삶의 허무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질문합시다.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죽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추구하는 자기 성취를 더 이상 확대할 수 없는 세계로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매일 경험해야 할 죽음은 자신의 성취욕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죄는 자기를 성취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할 때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보다 사업을 빨리 성취하기 위해서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벌기 위해서 부동산 투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의 열정이 모두 죄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열정이 죄의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를 부정한다면 그것이 곧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죽을 때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자기 의지가 완전히 꺾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일이 실제로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이 들 겁니다. 그런 의문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매일의 삶이 바로 ‘세례’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그 선택이 필요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매일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세례 받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세례 받는 날만은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사실과 그와 더불어 다시 산다는 사실을 진지한 자세로 확인하는 것이 곧 세례라고 한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매일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면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죄와 십자가, 생명과 부활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늘 새롭게 확인하는 사람의 삶에서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죽음과 하나님의 통치인 삶이 하나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죽었지만 산 사람이며, 살아있지만 동시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죽음과 삶을 하나로 여기는 삶의 신비가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로마서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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